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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展 - <만종>과 거장들의 영혼(2)

은초록별 2007. 12. 8. 18:48



Musee d'Orsay展
Seoul-Korea, 2007



Le Vase Bleu(푸른 화병), 1889-90
by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Post-Impressionnism)
    이 정물화는 폴 세잔의 1880년대 말 작품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공들여 그린 작품 가운데 하나로, 서로 다른 요소들을 능숙하게 배치했다는 점에서 그의 1870년대 작품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이 작품의 소재로 쓰인 물건들은 엑상프로방스 근처에 있는 그의 자 드 부팡 저택에 있던 것들이다. 이 그림에는 그림자가 없는 게 특징이다. 빛이 대상 정물의 맞은편에 있는 관람자의 위치에서 나오기 때문인 듯하다. 그림자를 없애는 이러한 빛 처리는 사물의 윤곽을 뚜렷하게 만들어주며, 동시에 폴 고갱의 작품에서처럼 낯설게 만드 는 효과가 있다. 이 그림이 몇몇 상징주의 작품들과 비슷한 부류로 구분되는 것도 이러한 특징 때문이며, 에밀 베르나르나 모리스 드니 같은 화가들도 이런 점에 이끌려 세잔에게 관심을 보였다.
Still Life with Mandolin(만돌린이 있는 정물), 1885(미전시 작품) by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Post-Impressionism)
    <푸른 화병>은 조형적 균형이 잘 잡혀 정갈한 느낌을 준다. 화병의 받침 역할을 하는 테이블의 아랫부분은 프레임과 평행하게 배치되어 있지만, 테이블의 윗부분은 어느 곳에 도 기대어 있지 않고 불안하다. 세잔은 이러한 방식으로 두 요소 사이에 불균형 효과를 줌과 동시에 조금 더 어두운 중간 구역을 만들어 직선으로 배치된 정물 너머의 공간을 알아보기 어렵게 만들었다. 그림 중앙의 흰색 접시 앞에 있는 화병과 전경에 나란히 놓여 있는 과일은 직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푸른색 화병은 짙은 색 테두리로 선명하게 처리되어 있고, 화병의 푸른빛은 주변을 환하게 비추며 뒷면의 벽까지 펴져나가는 듯하다. 주황색과 황색 색조로 칠한 그림의 아랫부분에도 푸른빛이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 이다. 이 그림은 1880년대 초부터 인상주의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했던 두 인물이 소유하 고 있었다. 첫 번째 인물은 수집가였다가 화상이 된 외젠 불로이다. 그는 뤽상부르 미술관 후원회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이 기관을 설립하기 위해 1919년에 르누아르의 <조르주 샤르팡티에 부인>과 드가의 <손의 습작> 등 걸작을 찾아내 기증하도록 알선했다. 두 번째 인물은 은행가이자 수집가였던 이작 드카몽도 백작이다. 그는 끊임없이 인상주의 작품을 수집하여 뤽상부르 미술관에 기증하기 위해 화가로부터 작품을 직접 사기도 하고, 최고의 화상으로부터 구입하기도 했다. 화가들은 수집품이 언젠가 국가에 유증된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작품 가격을 깎으려 했던 그를 비난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는 뒤랑 뤼엘 이나 앙브루아즈 볼라르 같은 당대 화상으로부터 최고가를 주고 작품을 사들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수집한 50여 점의 작품을 1914년 전쟁 발발 직전에 뤽상부르 미술관에 유증 했다.
Portrait of Gustave Geffroy(귀스타브 제푸르아), 1895 by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Post-Impressionism) Tahitian Women on the Beach(타히티의 여인들:바닷가에서), 1891 by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Post-Impressionism)
    폴 고갱은 1891년 프랑스를 떠나 열대지방에 머물며 창작 생활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여러 곳의 여행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마침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타히티를 최종적으로 선택했고, 그곳에서 순조로운 삶을 살고자 했다. 하지만 티히티는 더 이상 뱃사람과 작가들이 찬양해 마지않던 그런 섬이 아니었다. 전통 원주민인 마오리족은 진보된 서양 문명에 억눌려 사라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고갱은 수도인 파페에테를 벗어 나 시골로 가서 타히티인들의 일상생활을 체험하기로 작정했다. 이 작품에서는 전통과, 총독이나 신부 혹은 목사에 의해 유입되었을 새로운 풍습과의 충돌이 느껴진다. 화면에서 왼쪽에 보이는 여인은 허리 아래로 흰 티아레 꽃무늬가 장식 된 '파레오'라는 전통 의상을 입고 있다. 여인의 귀에는 옷의 무늬와 똑같은 꽃이 꽂혀 있어 여인의 아름다운 구릿빛 피부를 돋보이게 하며 새까맣고 숱이 많은 머리카락에서 마치 향기가 나는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여인은 고갱의 동반자로서, 선교사들이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움츠러든 듯 웅크리고 있다. 목까지 올라온 이 '선교사 원피스'는 몸의 형태를 완전히 가리고 있는데, 날씨와 어울리 지 않는 긴 소매가 손목까지 길게 내려와 한 치의 피부도 드러나지 않게 꽁꽁 감싸고 있다. 이 그림에는 우울함이 감돈다. 정면을 향한 여인은 생기 없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멍한 시선을 던지고 있다. 이 여인은 종려나무 잎으로 하던 일을 멈춘 듯 짜다 만 동그란 모자가 앞에 놓여 있다. 그녀의 표정과 몸짓은 '이걸 짠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 옆에 있는 여인의 굳은 표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기운 빠지게 한다. 황금빛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한 그림의 뒤쪽으로는 에메랄드 빛 바다가 펼쳐지며 작위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열대지방을 연상케 하는 색채로 표현함으로써 정확히 묘사되 지는 않았어도 현지의 느낌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그림 윗부분까지 색색의 층으로 표현 된 배경은 평면감을 주며, 이로 인해 두 명의 타히티 여인이 뚜렷하게 부각된다. 고갱은 작곡가가 소리를 만들어내듯, 색채를 진동시키며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의 분홍과 주황, 노랑, 초록을 연결한 대담한 채색 방식은 마티스 화풍의 전조가 되었다. 고갱은 '무슨 소식이 있나?'라는 뜻의 타히티 어 '파라우 아피'라는 제목으로 <타히티의 여인들>을 변형시킨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Self-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 1889-90 by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Post-Impressionism) Van Gogh's Room at Arles(아를의 반 고흐의 방), September 1889 by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Post-Impressionism)
    빈센트 반 고흐는 <반 고흐의 방>이라는 제목으로 세 점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10월 17일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서 계획하고 있는 작품의 전반적인 구성에 대해 묘사하며, 공간을 기묘하게 변형시켜 모티프에 적용한다고 강조했다. 홍수로 인해 작업실에 방치되었던 최초의 <반 고흐의 방>은 일부가 손상되었으며, 현재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반 고흐는 1889년에 생레미 요양원에서 나온 후 같은 주제로 두 점의 작품을 더 그렸다. 그 가운데 하나는 원본과 동일한 크기로 현재 시카고 인스티튜트에 소장되어 있으며, 어머니와 누이동행 윌을 위해 그린 나머지 하나는 현재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반 고흐는 이 작품을 그린 이유에 관해 친구 이자 화가인 에밀 베르나르에게 색채의 상징주의를 이용하여 고요함을 표현하고, 방의 간결하고 단순한 모습을 부각시키고 싶었다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나는 흐린 남보라색 벽과 금이 가고 생기 없어 보이는 붉은색 바닥, 적색이 감도는 노란 색 의자와 침대, 매우 밝은 연두색 베개와 침대 시트, 진한 빨강의 침대 커버, 오렌지색 탁자, 푸른색 대야, 녹색 창문과 같은 다양한 색조를 통해 절대적인 휴식을 표현하고 싶었다." 각기 다른 세 작품에서 문, 창문, 의자, 침대 같은 주요 요소들은 모두 같은 위치에 그려 졌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가장 쉽게 차이점을 알아볼 수 있는 부분은 오른쪽 벽에 걸린 그림들인데, 특히 캔버스 프레임 바로 아래에 있는 초상화 두 개와 침대 머리맡에 걸린 풍경화에서 변화를 주었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전시된 작품의 경우, 인물의 수염과 붉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V자 네크라인의 옷을 볼 때, 1889년 9월에 생레미 에서 그린 자화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에서는 머리의 위치, 깨끗하게 면도된 얼굴, 스탠드칼라의 상의로 보아 같은 시기에 그려진 또 다른 자화상과 유사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두 개의 자화상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완성 했으면서 작품 속에는 왜 각각 다른 것을 그려넣었는지, 그리고 거의 유사한 두 점의 작품에 왜 이 자화상들을 그려넣었는지는 불가사의다.
The Dance Hall at Arles, 1888 by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Post-Impressionism) Portrait of Honorine Platzer(Woman with Gloves), c.1890 by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Henri de Toulouse Lautrec:1864~1901) Post-Impressionnism Portrait of a Woman(M부인의 초상), 1895-97 by 앙리 루소(Henri Rousseau:1844-1910/Post-Impressionism)
    아마추어 화가였던 앙리 루소는 파리의 세관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에 세관원이라는 별명 을 얻었다. 그는 1886년부터 [앙데팡당전]에 정기적으로 출품했는데, 1896년에는 "M부인 의 초상"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작품을 선보였다. 이 여인은 오래 전 1888년에 사망한 루소의 첫 번째 부인인 클레망스 부아타르로 추정되었다. 독일의 예술비평가이자 미술품 수집가인 빌헬름 우데가 1911년 [앙데팡당전]의 [루소의 회고전]에서 <루소의 첫 번째 아내의 초상>이라는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깨는 부풀리고 팔꿈치부터 좁아 지는 소매가 1893년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점을 들어 그림이 제작된 시기를 그 이전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해보인다. 루소는 일상생활에서 시적인 분위기와 영감을 얻곤 했는데, 이 작품에서는 근엄한 표정의 매혹적인 여인을 크게 그려넣음으로써 일상생활 속 인물에 어떤 틀을 부여했다. 이 그림에서 여성 초상화에 흔히 쓰이는 소품들은 약간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는데, 가령 M부인이 들고 있는 것이 양산이 아니라 어두운 색 우산인 점이 그러하다. "나에게 스승은 자연밖에 없다."고 주장하던 루소는 자신이 '인물 풍경화'를 고안해냈다며, 1890년부터 이러한 화풍을 자화상에도 적용했다. 이 작품은 화면 전체에 편재된 균일한 빛과 함께 그림자의 부재를 통해 통일감을 얻고 있다. 크림같은 부드러운 붓터치는 섬세하게 그려진 다양한 종류의 꽃에 가벼운 질감을 살려준다. 루소는 배경 속에 여러 종류의 꽃을 그려놓았는데, 그 가운데 어떤 꽃들은 식별이 가능할 정도이다. 만일 루소가 꽃말을 알았더라면 이 초상화에서 다음의 세 가지 메시지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백장미와 삼색제비꽃, 고양이는 성모마리아를, 개양귀 비꽃과 삼색제비꽃, 검은색 드레스는 초상을, 산사나무와 장미, 데이지꽃, 삼색제비꽃은 결혼과 사랑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러한 꽃들이 가진 의미는 그의 기억 속에 성스러운 존재로 남아있던 첫 번째 아내를 의미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19세기 말에 살롱에 드나드는 사교계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던 공식 초상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루소의 작품들 중에서 초상화가 상당 부분 차지하는데, 그가 감탄해 마지않는 공식 화가들의 웅장한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아마추어 화가였던 루소는 여성을 묘사할 때 선배 화가들과 동일한 방식을 취하되, 보석을 그려넣어 여인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등 순진함을 가미했다. 이 작품에서는 특히 왼쪽 약지에 끼워진 반지 를 강조했는데, 거침과 섬세함, 순수함과 인공미가 독특한 방식으로 혼합되어 있다.
자화상(Myself, Portrait-Landscape), 1890/나로드니 갤러리, 프라하(미전시 작품) by 앙리 루소(Henri Rousseau:1844-1910/Post-Impressionism) Les Bretonnes aux ombrelles(양산을 쓴 브르타뉴의 여인들), 1892 by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1868-1941/Simbolism)
    1891년에 고갱이 티히티로 떠난 후에도 에밀 베르나르는 브르타뉴 지방에 남아 작업하며 *종합주의(Synthetism)를 계속 연구했다. 브르타뉴는 산업 개발과는 동떨어진 채 전통 이나 신앙, 미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던 지역으로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과 그 속에서 전통 의상을 입고 지내는 주민들의 농촌 생활에 이끌린 많은 예술가들이 찾아들었다. 특히 베르나르는 '진실의 오아시스'로 여기던 그 곳에서 색다른 영감을 얻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만 같은 이 야생의 땅에는, 자연에 대한 두려움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토속신앙과 더불어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를 대변하는 세계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이러한 원초주의는 자연 그대로의 것에 심취한 화가들에게 강력한 매력으로 다가왔고, 특히 베르나르는 작품을 통해 시간을 초월한 세계 의 영향력과 매력을 표현했다. 베르나르가 표현한 브르타뉴의 모습은 그림 같은 풍경이 아니라는 것이 특징이다. 브르타뉴 여인들의 이상적인 모습을 주제로 한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소재보다 그리는 방식에 더 중점을 두었다. 그림 속에서 전통 의상을 입은 다섯 명의 브르타뉴 여인은 종교 축제인 순례제에 참석하기 위해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그 배경을 짐작하게 할 만한 세부 요소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베르나르는 먼저 보이는 대로 인물을 그려 그것을 연구한 다음, 아틀리에에서 모든 사실 주의적 요소를 의도적으로 배제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 작품 속의 장면은 각각의 색조를 구분하는 선에 의해 마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그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또한 둥글고 작은 색색의 양산은 배경의 둥근 언덕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나무의 높이와 비슷한 키로 그려진 서 있는 여인들을 통해 수직선 구도 의 평행한 느낌을 강조했다. 인물과 배경으로 구성된 장면은 전체적으로 일상의 현실과 거리감을 적절하게 두고 있어 신비감마저 느끼게 한다. 베르나르는 소재의 신비로운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여인들을 입체감 없는 풍경 속에 배치했으며, 연극 무대에서 볼 수 있는 간접조명 효과를 사용했다. 세트처럼 꾸며진 듯한 공간에서 여인들은 눈을 반쯤 감은 채 침묵하고 있는데, 그들의 엄숙한 태도는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의 작품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인물들의 모습 과 흡사하다.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 1886(미전시 작품) by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1859~1891/Neo-Impressionnism)
    *종합주의(綜合主義,Synthetism,Cloisonnism): 2차원의 평면을 강조하는 회회기법 으로 1880년대 폴 고갱와 에밀 베르나르, 루이 앙크탱 등의 화가들에 의해 개발되었다. 인상주의 화풍 및 이론과 결별한 이들의 회화 양식은 자연을 직접 보고 그리기보다는 기억에 의존하여 작업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을 보여주었다. 종합주의라는 용어는 고갱이 처음 쓰기 시작했는데, 이 말은 주제의 느낌이나 기본 개념을 형식(색면과 선)과 종합 시키는 미술양식을 의미했다. 고갱은 자연에서 빛의 효과를 탐구하는 데 전념한 인상주 의자들의 방식이 한계가 있고 피상적이며 생각이나 착상을 소홀히 여긴 것이라고 느꼈다. 명암이나 입체감의 표현이 없는 순수한 색면과 주된 몇몇 선들을 토대로 구성요소들을 거의 2차원적으로 배열한 새로운 장식적 회화 양식을 추구했다. 베르나르와 앙크탱은 자신들의 회화기법을 일컬어 '클루아조니슴'(Cloisonnism)이라 했는데, 순수색의 넓은 면과 굵직한 검정 윤곽선으로 생기는 효과가 중세의 클루아조네 (칸막이된) 에나멜 기법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종합주의는 1890년대 결성된 나비파에 영향을 주었으며, 한때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에 서도 그 영향을 엿볼 수 있다.
Les Andelys(레장들리의 강둑), 1886 by 폴 시냐크(Paul Signac:1863~1935/Neo-Impressionnism) Women at the Well(우물가의 여인들), 1892 by 폴 시냐크(Paul Signac:1863~1935/Neo-Impressionism)
    1891년 절친한 친구였던 쇠라가 갑자기 사망하자, 폴 시냐크는 이듬해에 불안감이 고스란 히 담긴 이 작품을 완성했다. 신인상주의 화가들을 공공연하게 비판하곤 했던 폴 고갱은 이 그림을 보고 다음과 같이 적대적인 감상을 피력했다. "바닷가에 우물 하나가 있다. 주위에 열정이 가득하기라도 한지 얼룩덜룩한 줄무늬 옷을 입은 몇몇 파리 여인들은 말라버린 우물에서 갈증을 채워줄 물을 구하고 있다. 온통 종이 꽃가루 투성이다." 푸른 바다와 노란 언덕이 대비를 이루는 눈부신 생트로페의 풍경 속에 두 여인이 우물가 에 있고, 다른 한 여인은 언덕을 향해 멀어져간다. 이 작품은 시냐크가 생트로페라는 지중해의 작은 항구 마을을 발견하고 얼마나 감탄했는 지를 잘 보여준다. 그는 실제로 이곳에서 지내며 작업하곤 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생트 로페 풍경에 대한 경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희미한 빛 속의 화판을 위한 장식'이라는 이 그림의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생각하는 장식적 회화의 역할이란 어두운 실내에 빛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이것은 쇠라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실제로 쇠라가 사망한 후 그의 어머니 집 에 있던 쇠라의 작품들은 '슬픈 부르주아의 아파트'를 환하게 비추는 역할을 했다. 특히 그의 유작이라 할 수 있는 <서커스>가 그랬는데, 시냐크는 무의식적으로 이 작품을 모델 삼아 <우물가의 여인들>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물가의 여인들>은 원시적 단순함이 깃든 지중해 해안의 생활을 표현했고, <서커스>는 아틀리에에서 꾸민 듯한 파리의 공연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두 작품의 주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영향 관계를 감출 수 는 없다. 쇠라는 <서커스>를 그릴 때 다분히 추상적이고 장식적인 영감에 이끌려 그림 의 원근법을 변형시켰는데, 시냐크도 보이는 대상에서 멀어지는 듯한 방식으로 그렸다. 시냐크는 생트로페의 경관을 조합해놓은 듯 이상적인 풍경으로 연출하고 있고, 쇠라의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구성 방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또 화면의 윗부분에서 왼쪽으로 이어지는 정적인 면 구역은 나머지 부분의 동적인 선 구역과 대조를 이루며, 이 두 구역 은 비스듬히 꾸불꾸불하게 난 길에 의해 구분된다. 이 길은 <서커스>에서 어릿광대가 들고 있는 이상하게 생긴 채찍을, 언덕 꼭대기에서 흔들리는 소나무는 관중석에서 몸을 흔들며 악기를 연주하는 음악가의 모습을 연상시킨 다. 이렇듯 시냐크의 작품에는 세상을 먼저 뜬 친구의 그림을 흠모했음을 보여주는 요소 들이 구석구석 베어 있다.
The Circus(서커스), 1891(미전시 작품) by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1859~1891/Neo-Impresionnism) Man at the Helm(키잡이), 1892 by 테오 반 리세베르그(Theo Van Rysselberghe:1862-1926) Belgian Pointillist, Neo-impressionnism Evening Breeze(저녁의 미풍), 1893-94 by 앙리 에드몽 크로스(Henri-Edmond Cross:1856-1910/Neo-Impressionism)
    지중해가 가까운 남프랑스 지방에 정착한 앙리 에드몽 크로스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 에 매료되어 죽는 날까지 그곳에 머물며 그림을 그렸다. 크로스는 폴 시냐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소나무와 떡갈나무 언덕이 마치 파도에 잠겨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듯이 일렁이고, 망슈 해안의 모래사장은 너무나 작고 고운 모래알들로 이루어져 있다네. 근처의 바위들 은 숲을 떠받치며 깎아지른 듯이 아래로 뻗어 있지. 파도는 언제 보아도 굽이굽이 물결 치고, 꿈처럼 아름답고 장식적인 은은한 매력을 지닌 풍경으로 가득하다네. 그래!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을 '꿈처럼 아름답고 장식적인'이라는 이 두 단어만큼 잘 표현해줄 수 있는 수식어는 아마 없을 걸세." 시냐크는 그의 말에 이끌려 생트로페로 거처를 옮겼다. 이곳은 당시 화가들에게 영감을 제공해주었고, 크로스는 이 그림을 통해 '감미로운 풍경'에 대해 경의를 표하려 했던 것이다. 시냐크도 우정 어린 선의의 경쟁을 위해 <조화의 시간>을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생클레르에서 합류해 온 테오 반 리셀베르그가 <작열하는 시간>이라는 작품 을 완성함으로써 크로스, 시냐크와 함께 남프랑스의 3인방을 이루었다. 크로스는 자신의 아내인 이르마 클라르를 모델로 하여 시간을 초월한 이상향에 사는 인물 들을 그렸다. 그의 화가 친구들이나 무정부주의 작가들이 그랬듯, 크로스에게 있어서 인생의 황금기는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었다. 찬란한 미래를 꿈꾼 크로스는 이 작품에서 더위가 한풀 꺾여 은은한 빛과 함께 푸르스름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는 시간대를 묘사 했다. 흐릿한 색채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자연스러운 선의 조화, 화면 전체를 일정하 게 구분하는 붓터치 등의 효과는 그가 일부러 장식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선택한 처리이다. 1904년 여름을 생트로페에서 지내며 시냐크와 함께 작업하던 마티스는 크로스의 아틀리에 에 놓여 있던 <저녁의 미풍>을 보고는 그 뛰어난 조화와 시적인 정취 그리고 넘치는 형식 미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로부터 멏 달 후, 마티스는 이 작품에서 직접적인 영감을 받아 <화사함, 고요함 그리고 쾌락>을 완성했다. 크로스보다 조금 더 강렬한 색채와 정열적인 터치를 사용한 마티스의 이 그림은 1905년 야수주의의 출범을 예고했다. 시냐크는 두 작품을 모두 구입하여 자신이 거처하던 빌라 라윈의 식당에 나란히 걸어두었는데, 이것은 신인상주의와 야수주의의 연관성을 직관했던 시냐크의 뛰어난 감각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할 수 있다.
Luxe, Calme, et Volupte(화사함, 고요함 그리고 쾌락), 1904(미전시 작품) by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1869~1954/Fauvism) The Quai Saint-Michel and Notre-Dame, 1901 by 막시밀리앙 뤼스(Maximilien Luce:1858-1941/Neo-Impressionism)
    1887년부터 1897년까지 신인상주의에 참여했던 막시밀리앙 뤼스는 파리의 상징물 가운데 하나인 노트르담 성당을 소재로 1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이 작품은 생미셀 가에서 성당을 바라본 모습으로, 성당의 서쪽과 남쪽 벽면이 보이고 멀리 퐁오두블 교와 생루이 섬의 집들도 보인다. 뤼스는 이 작품에서 섬세한 점묘 방식으로 주황과 분홍, 붉은색이 주를 이루는 따뜻한 색채를 사용했고, 그림자는 푸르스름하게 처리했다. 화면의 왼쪽에 는 연기로 둘러싸인 건물이 있고, 하늘색과 청록색, 자주색으로 표현된 그림자가 드리 워진 부두와 다리는 성당에 비해 넓게 그려졌다. 이 작품은 잘 차려입은 부르주아, 과일 과 채소를 나르는 하녀,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할머니 등 행인들의 내면적인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림의 전경에는 헌책을 사고파는 상인과 노동자들의 모습이 생동감 있게 묘사되었고, 머리 위에 바구니를 이고 가는 과자 장수, 창이 닫혀 있는 마차, 외투 를 벗고 조끼만 입은 남자가 수레를 끌고 가는 모습 등이 보인다. 대도시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인물들의 일시적이고 분주한 삶의 모습은 뒤로 보이는 성당의 영원성과 대조를 이룬다. 다리 위에는 합승마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뤼스는 '파리'라는 범주 안에서 주민들의 생활의 동반자이자 도시의 역사를 상징하는 성당의 '초상'을 그리고자 했다. 그는 1900년 2월 초에 크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계속 노트르담 성당을 그리고 있다네. 이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사람들의 모습, 그런 파리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네."라고 말했다. 뤼스의 노트르담 성당 연작은 모네의 루앙 대성당 연작과 좋은 대비를 이룬다. 모네의 연작은 성당과 어우러져 있는 사람들의 모습보다는 성당을 비추는 '빛의 드라마'에 초점이 맞춰졌고, 성당의 모습을 마치 돌로 된 절벽처럼 표현했다. 이 작품은 특히 장 베로나 조제프 드니티스 같은 화가가 묘사했던 생동감 있는 도시 풍경에 활력 있는 대중을 그려놓음으로써 파리 시민들의 현실적인 삶 의 모습을 담았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또한 그는 카미유 피사로가 그린 마지막 파리의 전망 연작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 작품은 그의 신인상주의적 경향과 이후 민중주 의 경향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Avenue de l'Opera: Morning Sunshine, 1898(미전시 작품) 겨울의 오페라 거리 풍경/랭스 미술관 by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30~1903/Impressionism) Orpheus(오르페우스), 1865 by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1826~1898/Symbolism)
    오르페우스는 아폴론과 칼리오페 여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신화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음악가이자 시인이다. 아폴론이 오르페우스에게 리라를 선물하자, 여신들은 그 에게 연주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오르페우스의 연주는 너무나 경이로워서 짐승들과 나무와 바위까지 감동시켰다. 이후 오르페우스는 아름다운 에우리디케와 결혼하지만, 에우리디케는 공격자의 추적을 피하다가 독사에 발을 물려 죽고 만다. 깊은 슬품에 빠진 오르페우스는 지옥에 내려가 음악으로 지옥의 신을 감동시킴으로써 아내를 데리고 돌아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는다. 그러나 지상 세계에 도착할 때까지 아내를 뒤돌아보지 않는 다는 조건이 따랐다.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의 절박한 부름에 뒤돌아보게 되고, 결국 죽음까지 불사하며 되찾으려던 사랑하는 아내를 영원히 잃게 되었다. 디오니소스는 절망에 빠진 채 리라만 연주하고 있던 그를 보다 못해 메나드라는 무녀에 게 보낸다. 그런데 메나드는 그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그 머리를 헤브로스 강에 던져버 렸다. 오르페우스의 머리는 사랑하는 에우리디케의 이름을 부르며 강물을 떠다녔고, 안티사 동굴에 닿은 이후 신탁을 내리기 시작했다. 이를 시샘한 아폴론은 그를 침묵하게 만들었으며, 그가 연주하던 리라도 물결에 휩쓸려 레스보스 섬의 아폴론 신전에 좌초하 고 만다. 이 비극적인 이야기는 모로의 작품 <오르페우스>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한 젊은 여인이 헤브르 지방의 트라키아 강가까지 떠내려 온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 를 경건하게 거둔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 작품은 오르페우스를 고향 땅에서 내쫓는다는 전통적인 결말을 덜 잔혹하게 각색한 것이다. 모로는 이와 같은 새로운 결말을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화법과 색채를 사용했다. 화면의 오른쪽은 확 트인 공간을 따라 멀리 강이 보이는 반면, 왼쪽은 커다란 바위로 막혀 있다. 이렇듯 대조적으로 표현된 배경에 그려진 젊은 트라키아 여인의 팔에는 리라가 안겨 있으며, 그 위에 비극의 주인공 오르페우스의 머리가 놓여 있다. 이 장면은 살로메가 세례자 요한의 잘려진 머리를 은쟁반에 담는 성경 의 이야기를 이교도적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젊은 여인의 옷과 리라에는 많은 장식이 달려 있는데, 이것은 당시에 발간된 고고학 문헌이나 일상적인 여행담에서 찾아낸 모티프들이다. 모로는 이 작품에서 이런 것들을 자신의 느낌과 적절하게 융합하여 새롭게 신화를 재현하였다.
Portrait d'Ari Redon au col marin(세일러복을 입은 아리 르동의 초상), 1892 by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Symbolism) Rest(휴식), 1905 by 빌헬름 함메르쇼이(Vilhelm Hammershoi:1864-1916) Denmark Painter, Symbolism Hammershoi worked mainly in his native city, painting portraits, architecture, and interiors. Hammershoi's wife, Ida Ilsted. The Ball(무도회), 1878 by 제임스 티소(James Tissot:1836-1902/French Painter)
    제임스 티소가 작은 화폭에 그린 <무도회>는 사교계를 바라보는 날카롭고 비판적인 시선 이 담겨 있다. 그는 화폭을 가득 채운 폭이 좁고 길이가 긴 공간 안에 대상을 커다랗게 표현했다. 화면 한가운데 노란 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의 머리는 남자의 모습을 가리고 있으며, 화면 왼쪽의 여인은 프레임 밖으로 벗어났다. 티소는 전체적으로 세부적인 묘사 를 잘 활용했지만, 관람자의 시선이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여인에게 집중되도록 여인의 몸 을 곡선 구도 안에 배치햇다. 그림에서 제일 먼저 그리고 가장 강렬하게 보는 이의 시선 을 끄는 것은 왼쪽 아래로 이어지는 화려한 레이스 장식이다. 그리고 리본과 레이스가 평행하게 늘어진 옷자락은 그 아래로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 그림이 그려진 검은 바탕의 일본 무늬 천과 대비를 이룬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전체적인 실루엣은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부채와 이어지면서 화면 중앙에 또 다른 곡선을 만들어낸다. 여인은 연미복을 입은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지만, 시선은 다른 곳에 있는 제3의 인물을 향해 있는 듯하다. 두 사람 뒤에는 무도회장을 장식한 각종 식물과 꽃이 보이고, 거실과 무도회장을 가르는 빨간 커튼이 있다. 그 뒤로 상냥해 보이는 젊고 마른 인물들과 우아함을 뽐내고는 있지만 나이를 숨길 수 없는 노년의 인물들이 모여 있다. 이를 통해 화가는 비현실적인 원근감을 만들어냈다. 이 작품은 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야망을 품은 여인>이라 는 작품과 여인이 입고 있는 드레스의 색깔만 다를 뿐 매우 유사하다. 티소는 이 두 작품을 바탕으로 조금 더 큰 크기의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작품을 통해 티소는 '사회적이고 사교적인 장소'에 대한 일종의 고정관념을 비판적으로 드러냈다.
A Woman of Ambition(The Political Lady), 1883-1885(미전시 작품) 야망을 품은 여인/올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뉴욕 Woman & Child in an Interior(Son of the Artist) by 폴 마테(Paul Mathey:1844-1929/French Painter, Etcher and Designer)
    폴 마테가 아들에게 선물한 이 작품의 중심은 왼쪽 후경에서 오른쪽 전경으로 단계적인 이동을 하고 있다. 아파트 내부에서 문 너머 길거리까지 관람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이끌려 간다. 사실 화폭의 오른쪽 절반 정도는 아들 자크가 기댄 벽에 의해 막혀 있다. 그림에서 관람자를 바라보고 있는 자크는 훗날 미술사학자이자 에두아르 마네를 연구하는 전문가로 성장한다. 꽃무늬 벽지에서 떨어져 있는 그의 머리는 수직적인 연속성이 두드러 지는 주변 환경 속에서 마치 독자적으로 떠 있는 듯 환상적인 느낌을 준다. 관람자의 시선은 아파트 안으로 이동하면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의 옆모습을 만나게 되는데, 다림질에 열중하고 있는 그녀 앞에는 하얀 옷가지가 정성스레 접혀 있다. 여인은 아마도 화가의 아내인 페르낭드일 것이다. 오르세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같은 옷을 입고 해변가에 앉아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시선을 좀 더 왼쪽으로 이동하면, 열린 문을 통해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앞치마를 두른 하녀가 집 앞을 청소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다지 비싸 보이지 않는 가구들을 볼 때, 작가의 집이 파리의 현대적인 아파트가 아닌 시골의 목가적인 집일 것 같다고 상상하게 한다.
Madame Fernande Mathey(미전시 작품)
    폴 마테는 이 작품에서 이러한 공간 배분을 통해 작가는 삶의 세 시기, 즉 아들로 상징 되는 유아기와 아내로 상징되는 성인기, 그리고 하녀로 상징되는 노년기를 표현했다. 관람자의 시선을 따라 점점 멀어지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표현은 마치 인생에 대한 상징 성을 담고 있는 듯하다. 이 작품은 역시 오르세미술관에 있는 알베르 베나르의 <가족의 초상>이란 작품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알베르 베나르의 이 작품은 1890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음악가였던 마르그리트 드 생마르소의 [일기]에서 자주 언급되듯 이, 마테와 베나르의 가족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만나 음악회에 가기 도 하고 다음 전시에 대해서 토론하기도 할 정도로 친했다. 이러한 사실은 이 두 작품 사이의 유사성을 더욱 신빙성 있게 해준다.
In the Greenhouse, 1881 by Albert Bartholome(1848-1928:French Sculptor, Painter) The Eiffel Tower as Seen from the Trocadero, 1900-1901 by 루이스 웰덴 호킨스(Louis-Welden Hawkins:1849-1910/Simbolism)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파리에서 개최된 제4회 만국박람회에 '300미터 탑' 이 선보였다. 높이가 312.27미터여서 붙은 에펠탑의 별칭인데, 그 높다란 외관만으로도 센 강변에 설치된 수많은 전시장을 압도했다.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과 엔지니어인 모리 스 쾨츨렝, 에밀 누기에에 의해 지어진 에펠탑은 파리를 상징하는 기념물로서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1889년 5월 5일부터 10월 31일까지 180일 동안 열린 박람회 기간에 3,200만 명의 관람객이 파리에 몰렸으며, 그들은 이 탑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화가들 역시 에펠탑의 모습에 매료되어 이 거대한 철탑을 소재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트로카데로의 조망대에서 바라본 에펠탑의 모습으로 그림의 전경 왼쪽에 알렉 상드르 팔기에르가 제작한 [아시아]의 등이 크게 보이도록 화면 처리를 했다. 현재 이 동상은 당시에 주문 제작된 여러 개의 대륙 상징물과 함께 오르세미술관 광장에 전시되어 있다. 화면의 오른쪽 하단에는 센 강에 놓인 다리가 샹드마르스 광장까지 이어 져 있고, 광장 끝에는 루이 15세 통치하에 지어진 군사학교 건물이 보인다. 루이스 웰덴 호킨스는 이처럼 낯선 구성을 미화하기 위해 실제와는 전혀 다른 예상 밖의 색채를 사용했다. 황색이나 주황 계통의 따뜻한 색깔을 이용한 과감한 터치로 좌측 전경 의 청동상을 채색하고 보라와 초록, 파랑으로 음영을 넣었다. 후경은 긴 붓터치로 다양 하게 표현한 파란 색조 위에 연분홍에서 엷은 보라에 이르는 색을 이용해 따뜻한 느낌을 가미했다. 그림의 제작 연도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박람회 당시 센 강변에 있던 수많은 국가관이나 주제관이 그림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889년 박람회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확실치는 않지만 제5회 파리 만국박람회가 개최된 1900년 무렵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호킨스의 선명한 채색 화법과 박력 있는 붓터치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 놀라운 풍경화는 1905년 [살롱 도톤전]에서 자유로 운 색의 선택이나 종합적인 형태를 통해 야수주의의 출현을 예고한 전조로서 그 가치를 평가 받았다.
Intimite(일상생활), 1891 by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Les Nobis)
    피에르 보나르의 통상적인 그림과는 달리 정사각형인 이 작품은 화가의 여동생 앙드레 보나르와 결혼한 작곡가 클로드 테라스를 소개하고 있다. 역광으로 어둡게 그려진 이가 화가의 여동생인 앙드레 보나르이다. 그림 전경에는 보나르의 것으로 보이는 붉은색 손에 화면을 가로지르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파이프가 쥐어져 있다. 보나르는 나비파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던 일본식 판화 기법을 이 그림에 적용했다. 보나르를 비롯해 당시 젊고 재능이 많은 화가였던 에두아르 뷔야르, 모리스 드니, 폴 랑송, 케르 자비에 루셀 등은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하는 '나비(Nobi)'라는 이름의 미술 사조 그룹을 결성하여 회화의 혁신을 꾀했다. 그들은 원근법과 입체감을 이용한 기존의 회화 규범을 버리고 원시적 단순함을 되찾기 위해 태피스트리와 중세 스테인드글라스, 일본식 판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일본 미술의 영향을 받은 보나르는 일본(Japon)과 보나르 (Bonnard)의 합성어인 '자포나르(Japonnard)'라는 개념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자포나르 나비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일상생활>은 보나르가 나비파 초창기에 실내 장면을 주제로 그린 작품들 중 하나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을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세 명의 친구가 함께 담소를 나누며 나선형의 연기를 내뿜고 있다. 앙드레의 담배와 다른 두 명의 파이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벽지에 그려진 멋진 아라베스크 장식과 어우러진다. 이런 요소들은 공간 축소의 효과를 주면서 따뜻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세 인물 사이의 감정과 지적인 교류 관계, 자유로운 영혼과 친밀감이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따뜻하고 긴 외투에 파묻힌 채 끈이 접혀 올라간 모자를 쓰고 있는 클로드 테라스는 빛 을 강하게 받고 있는 반면, 앙드레 보나르의 가려진 옆모습에는 어슴푸레한 빛이 드리 워져 있다. 이 빛은 이 순간의 덧없고 내밀하며 조용한 분위기를 부각시킨다. 한편 손만 강조되어 있는 보나르의 모습은 화면 전체에 독특한 느낌을 자아낸다.
The Breakfast, 1902 by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1868~1940/Les Nabis)
    19세기 말 화가들에게 실내 공간은 도시화된 파리의 거리 못지않게 모더니티를 반영하는 공간이었다. 뷔야르의 그림에서도 실내는 그 속에 어우러진 인물들과 함께 주된 소재로 등장한다. 어머니를 모델로 해서 그린 이 그림 역시 가정의 내밀한 실내 공간을 차분하게 그리고 있다. 뷔야르의 작품에서 초기엔 실내의 가재 도구들과 비슷한 비중을 차지했던 인물들은 후기로 갈수록 화면의 중앙으로 들어와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작품에서 인물은 아직까지 모호한 옆모습만으로 묘사될 뿐, 만년에 주로 그렸던 초상화 들에서 느껴지는 인물의 심리적인 내면은 엿보이지 않는다. 실내의 벽지와 식탁보, 어머니 의 실내복 등이 화가의 어린 시절의 추억, 친밀한 가족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Poker(카드놀이), 1902 by 펠릭스 발로통(Felix Ballotton:1865~1925/Les Nobis)
    1899년 초, 서른다섯 살의 생일을 목전에 둔 펠릭스 발로통은 화상 알렉상드르 베른하임 의 딸 가브리엘 로드리그 앙리크와의 재혼 소식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알렸다. 알렉상드르 베른하임은 유명한 화상이었고, 그의 아들들 또한 파리에서 큰 화랑을 운영 하는 재력가였다. 이러한 배경에 끌렸던 발로통은 당시 아이 셋을 둔 미망인이었던 앙리크와의 정략 결혼을 위해 1893년에 결혼한 첫 번째 아내 엘렌 샤트네와 헤어졌다. 결혼 후 처음 몇 년 동안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아내 앙리크와 그녀의 아이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을 화폭에 담았다. 하지만 1902년 이후 처가와의 관계가 나빠지자 더 이상 아내의 가족을 그림의 소재로 삼지 않았으며, 이와 동시에 그들과의 상업적인 거래도 완전히 끊어버렸다. 1902년에 그려진 <카드놀이>는 발로통이 처가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시절에 완성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한가롭게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부르주아의 실내 풍경을 그리기를 선호했는데, 이 그림에는 이러한 그의 취향이 잘 드러 나 있다. 나비파 화풍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의자에 몸을 바싹 붙인 채 화면의 왼쪽 가장자리에 놓인 테이블에 모여 있는 다섯 명의 모델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서 등지고 앉아 있는 사람은 발로통의 장모이고, 그녀의 왼쪽에는 사위인 잭 아기 옹, 오른쪽에는 그녀의 오빠 마르퀴스 아들레르가 앉아 있다. 정면에는 그녀의 사촌인 조스 헤셀과 흰머리의 중년 부인이 희미하게 보인다. 이 여인은 장모의 시누이인 아들레르 부인으로 추정된다. 발로통은 이 작품에서 소실점을 매우 높게 잡아 바닥이 상승하는 것 처럼 표현했으며, 전경을 꽉 채우는 테이블 위에 램프를 배치하여 공간을 이등분했다. 그림의 모티프 '카드놀이'하는 사람들은 왼쪽 전경의 중간 높이에 집중되어 있고, 오른쪽 전경에는 텅 빈듯 칠흑 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이러한 독특한 공간 구성과 그로 인해 조금은 답답해 보이는 분위기에 대해 존 클레인은 "발로통은 자신의 불편한 심기를 왜곡된 공간 구성과 가구나 장식물에 대한 지나친 강조 등의 표현으로 여과없이 드러내고 있다."라고 평했다.
파란 바지를 입은 아이, 1897 by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1870-1943/Les Nobis)
    이 그림의 주인공은 모리스 드니의 첫 번째 아내인 마르트와 맏딸 노엘이다. 드니 부부는 1990년 무렵 파리 근교에 있는 몽루즈의 빌라에서 살았다. 드니는 특히 모성애를 그림의 중요한 소재로 삼았고, 그의 세 자녀인 장 폴과 노엘, 베르나데트가 태어날 때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그림을 그렸다. 이 작품은 매우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 후경에는 창문을 여는 여인이 있고, 그 앞쪽으로 공간을 구분하는 문틈이 그려져 있다. 청색 계열에서 보라색에 이르는 배색 효과 또한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었다. 이와 함께 회색 빛이 감도는 인물의 얼굴, 마르트의 황색 머리카락,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받아 반짝이는 벽에 걸린 레몬색의 액자도 돋보인다. 이 액자 속에는 1824년부터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보티첼리의 <세례 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모사한 판화 작품이 그려져 있어 실내 풍경을 담은 이 작품에 성스러운 분위기를 더해준다. 작품 가운데 일부를 종교적 주제에 할애하기도 했던 드니는 1919년에 [종교예술 아틀리에]라는 간행물을 발간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고전주의 예술과 보티첼리를 좋아했고, 그 속에서 느껴지는 차분한 단순함과 경건하고 잔잔한 조화로움, 우아한 데생, 부드러운 광채 같은 것에 감탄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자신의 독실한 기독교 신앙과 가족의 가치, 조화와 화해의 나라로서의 이탈리아에 대한 동경 등을 표현하고자 했다. 아이가 입고 있는 작은 줄무늬 바지는 우첼로나 시뇨렐리의 작품에 나오는 옷의 두 가지 색에서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현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이고 장식적인 이 작품은 입체감 없이 단순한 윤곽을 사용하고 있는 점에서 같은 시기에 뷔야르가 그린 그림과 비슷하다. 이 작품은 또한 회화의 규범을 배제하고 예술의 원시적 순수성을 찾아 중세 시대의 스테 인드글라스나 테피스트리, 일본식 판화로 눈을 돌린 나비파 회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The Virgin and Child with John the Baptist, After 1500 세례 요한과 함께 있는 성모마리아와 아기 예수/루브르 박물관(미전시 작품) by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c.1445-1510/Early Renaissance) Mozart/Clarinet Concerto in A Major KV 622, 2악장 Adagio
출처 :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展 - <만종>과 거장들의 영혼(2)
글쓴이 : isado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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