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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展 - 19세기 사진과 회화의 특별한 만남

은초록별 2007. 12. 8. 18:46

★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展 - 19세기 사진과 회화의 특별한 만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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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1865
선 원근법의 촬영 건축물 사진

Charles Mavile

 

사진이 처음 만들어진 시점에서 사진술은 회화의 획기적인 신기술이었다. 사진술이라는 발명품은 당시

회화가 지향했던 '눈으로 보는 것에 가까운 그림 그리기'를 실현함으로써 사실주의적 회화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발명 초기의 사진들은 철저하게 기존의 회화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이나 묘사하는 방법을

따랐고, 한동안 이러한 양상은 평화롭게 유지되는 듯 보였다. 사진은 폭발적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초상

과 정물, 풍경, 역사의 현장 등 화가들의 밑그림으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사진의

본질적 속성을 회화와의 차별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회화가 안료를 사용하는 대신 사진은 빛을

이용하였고 화가들이 손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사진가들은 카메라라는 기계를 사용하였으므로, 회화와

사진은 나뉘어서 본격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하였다.

 

1839년 프랑스에서 사진술이 최초로 공포된 이후의 소위 19세기 사진들은 '사실적 기록성'이라는 사진

의 주특기를 다양한 정면에서 시험하고 활용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발명 이후 최초의 사진술

이 지닌 기술적 제약들은 급속도로 개선되었고 새로운 기술적 진보에 따른 표현의 가능성도 펼쳐졌다.

이 시기의 사진은 화가들의 생활이나 작품 활동에 대한 일차적인 기록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물론 회화

가 추구하던 예술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불러일으켰다. 역사적으로 19세기는 회화와 사진이

가장 친밀한 관계를 었던 시기이다. 그 관계는 달콤한 사랑으로 시작해서 은밀한 질투와 격렬한 증오로

 이어지다 종국에는 무덤덤한 사이로 돌아서는 연인들과 같았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이 시기의

회화와 사진이 나눈 교류는 당시의 회화가 추구하였던 급진적인 변모와 시각매체로서 사진의 성숙에

있어서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회화와 사진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았는가에 대한 학술적 논고들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그것은 손과 기계로 상징되는 회화와 사진의 이질성이 근대 이후 예술의 개념을 변화 확장시키는 과정

에 대한 고찰이기도 하다.

 

19세기 사진들은 '사실적 기록성'이라는 사진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진들은 사진 고유의 예술적 가치에 대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발명 직후인 1840년대의

*다게레오타입(Daguerreortype)과 **칼로타입(Calotype) 등 새로운 인화 방식을 채용한 사진은 초상

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고, 1850년대, 60년대의 풍경사진은 사실주의의 혼란을 야기했으며, 1870년

을 전후하여 스냅사진은 인상주의 회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1880년대 휴대용 카메라의 등장은

예술적 기준을 둘러싼 사진가와 화가들의 치열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1890년대 사진은 새로운

예술 형식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진의 완벽한 재현성은 전통적인 회화의 묘사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였고, 회화와 사진은 서로의 영향력 하에서 상호 모방을 시도하기도 했다.

거창한 학술적 접근이 아니더라도 전설적인 인상파 화가들에게 비밀 병기처럼 사용된 사진이나 예술성

을 인정받기 위한 사진가들의 투쟁적인 노력은 소설처럼 흥미로운 이야기 거리들을 남기기도 했다.

지나간 사랑이 상처로만 기억되는 것은 아니듯이 전무후무한 상호공존의 시대를 거치면서 회화와 사진

은 자신의 영역을 공고히 하고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로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리고 백 년 이상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 사진은 완숙한 시각매체로서 회화와 함께 그 시대를 증언하게

되었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30여 점의 사진들은 발명 초기의 다게레오타입 초상사진에서부터 20세기 초 사진

이 독립적인 미학적 가치를 보여주기 시작하는 시점에 만들어진 초보적 형태의 근대 사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사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작품 중의 하나이며, 그 당시 테크놀로지로는 복제가 불가능하여

단 한 점 밖에 없는 펠릭스 푀아르당(Felix Feuardent)의 <밀레의 남동생과 누이> 뿐 아니라, 최초의

예술 사진가로 분류되는 사진 작가 에드워드 슈타이켄(Edward Steichen)의 작품 두 점이 소개된다. 

이 사진들을 통해서 우리는 ***선 원근법(Linear Perspective)적 시각에 기초한 초기 사진에 대한

이해와 회화의 밑그림으로서의 사진이 추구한 동작과 공간의 묘사, 그리고 빛과 공간에 기초한 사진적

표현성의 탐구 등의 주제에 대한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이 전시를 통해 만나는 사진들의 또 다른 힘은 바로 시간이 만들어 준 것이다. 회화에 비해

다량 복제와 생산이 가능한 사진이지만, 한번 제작된 물건으로서의 가치는 시간이 지날수록 희소성을

지니게 된다. 더 이상의 동질 복제가 불가능한 백 육십 년 전의 사진은 오랜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이제는 유물적 가치를 지닌 작품이 되었다. 처음 만들어진 당시에 그것이 회화에 대한 도전이었든

모방이었든 간에 백 년이 넘는 시간 속에서 새로운 숭배적 가치가 생겨난 것이다.
예술이 주는 즐거움은 이렇게 시간의 흐름을 통해 가치가 변화되는 생명력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다게레오타입(Daguerreortype): 표면이 은으로 처리된 동판을 이용하여 마치 거울 위에 상이

올려 진 것과 같은 형태의 사진을 만드는 방식이다. 발명가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 Jacques

Mande Daguerre)의 특허권을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정부가 공포하고 보상함으로써 세상에 알려

졌고, 그로써 인류 최초의 사진술로 인정받게 되었다. 직접양화방식으로 복제가 불가능하다.

 

**칼로타입(Calotype): 그리스어로 '아름다운 그림'이라는 뜻을 지녔고, 1841년 영국의 헨리 폭스

탈보트(Henry Fox Talbot)가 자신의 공소묘 기술을 발표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금속판이 아닌 종이 원판을 사용하여 회화의 재질감에 더 유사한 제작 방식이었으며, 음화 원판을 인화

하면 여러 장의 양화상을 얻을 수 있는 복제성을 갖추었다.

 

***선 원근법(Linear Perspective): 물체에서 방사되는 광선이 육안으로 들어올 때 한 점으로

수렴되어 망막에 상을 만드는 원리로부터 파생되었다.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

의 <회화론(1435)>에서 개념적으로 정리되었으며, 그는 방사된 광선이 수렴되면 원뿔이나 피라미드

형태의 정점이 우리의 눈에 해당되고 횡단면이 화면에 대응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가까이 있는 물체

는 크고 멀리 있는 물체는 작게 묘사되는 조망법의 기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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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프랑수아 밀레의 남동생과 누이, 1850경
다게레오타입
펠릭스 푀아르당(Felix Feuardent)

 

19세기 사진의 공통된 특징은 재현성을 기초로 하여 대상을 복제하고자 하는 기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기 사진의 양식적 특징은 카메라의 광학적 재현성과 화학적 처리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사진술 발명 당시 다게레오타입이나 칼로타입에 사용된 카메라는 그림 그리는 도구였던

카메라 옵스쿠라(Camera Obscura:'어두운 방', '암실'이라는 뜻으로 사진술이 정립되기 수백 년 전

부터 원근법에 입각하여 그림 그리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바늘구멍 상자 원리를 이용하여 외부의 3차원

대상을 방 내부의 2차원 평면에 투영시키는 장치이며, 바늘구멍이 렌즈로 대체되면서 선명한 상을

관찰하며 따라 그릴 수 있는 도구로 쓰였다.)와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으므로, 사진이 프레임 안에 대상

을 담아내는 방식은 그림의 선 원근법적인 시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셈이다.
하나의 소실점을 기준으로 펼쳐지는 선 원근법의 시각에서, 주피사체의 위치는 중앙으로 집중되어 중앙

에 배치된 주피사체의 비중이 매우 크게 나타난다. 이것은 사진의 정보적 가치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초보적인 단계의 시각매체는 대상에 대한 작가의 주관적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사진은 촬영된 대상의 리얼리티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는 표상으로서의 정보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으므로, 화면 내에서 주피사체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것이다. 사진 발명직후 제작된

초상 사진은 주피사체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단일 시점을 나타낸다.

 

장 프랑수아 밀레(Millet)의 남동생과 누이를 찍은 다게레오타입은 최초의 사진술로 만들어진 전형적인

초상 사진이다. 단순한 배경에 인물 위주의 프레임을 선택하여 주인공의 상반신 위주로 정적인 모습을

담았다. 낮은 유제 감도로 인해 노출시간이 길어서 사진이 쉽게 흔들릴 수 있는 기술적 제약 때문에

주인공들은 경직된 자세로 서로 의지하여 고정된 포즈를 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한 배경을 사용하

여 전경이 돋보이고, 심도의 표현에 있어서도 뚜렷한 특징이 나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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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르 공예공방의 화가들, 1860년경
콜로디온 유리 원팜을 알부민 종이에 인화
아쉴 보뉘(Achille Bonnuir:1833-after 1894)와
제라르 데리슈바일러(Gerard Derischweiler:1822-after 1884)

 

1860년 경에 만들어진 공방의 화가들은 여덟 명의 등장인물이 찍혔지만 전체적으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위치는 일인 초상과 다를 바가 없다. 세브르 공방의 장식 미술가였던 아쉴 보뉘는 그의 장인인

제라르 데리슈바일러처럼, 제2제정 동안 빅토르 레뇨와 루이 로베르가 이끈 공방과 관련을 맺은 화가들

의 모임에 속해 있었으며, 그들의 창조성과 재능을 보여주었다. 오르세미술관은 세브르 공방 화가의

가족인 엘리자 르 가이가 가지고 있던 다섯 권의 앨범을 소장하고 있다. 예술적 영감이 강하게 드러나는

이 앨범의 사진들은 마치 그림같은 장면들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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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루트의 카미유 로지에의 아틀리에에 있는 젊은 여인의 초상, 1860-66
콜로디온 유리 원판을 알부민 종이에 인화
앙리 소베르(Henri Sauvaire:1831-1896)

 

아틀리에는 주로 동료 화가들이 모여 함께 작업도 하고 회합도 가지는 리셉션 장소 같은 것이었지만,

때로는 작가 개인의 은신처 역할도 했다. 1860년대 중반, 외교관이자 아마추어 사진작가로서 큰 재능을

보였던 앙리 소베르가 베이루트에서 찍은 사진들은 카미유 로지에의 살롱 겸 아틀리에의 모습을 담고

있다. 프랑스를 여행할 때 꼭 들러야 하는 곳으로 여겨졌을 만큼, 옛 페니키아의 도시인 베이루트에

자리 잡은 이 아틀리에는 사교계와 예술계의 리셉션 장소이자 창작 활동의 산실이었다.

테오필 고티에와 에르발의 친구였던 로지에는 화가이자 삽화가로서 동양에 대한 매력에 빠져 베이루트

에서 1840년대를 보냈다. 소베르는 집주인인 로지에가 동양적인 의상을 입고 흰 캔버스 앞에서 손님들

을 맞았다고 회고하면서, 로지에 아틀리에의 열기를 강조했다.
사진가는 창가에 팔을 기댄 갈색 머리의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몽상가적인 우아함을 포착했는데, 아마

그녀는 그를 위해서만 포즈를 취했을 것이다. 그녀는 그 장소를 더욱 예술적으로 만들어주는 방문객이

었지만, 화가는 그것을 알지 못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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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겨눈 토착 군인과 부상자, 1870년경
네가티브 유리를 이용해 알부민 종이에 인화
Oliver Pichat

 

발명 초기의 회화 종속적 양상과는 달리, 불과 이삼십년 만에 사진은 인간의 눈을 대신하여 미지의 영역

을 개척하고 간접적인 시각경험을 제공하면서 지식을 구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시각매체로서 사진이 지닌 가능성은 여행사진이나 과학사진, 탐사사진 등 회화가 미처 관심을

가지지 못했던 영역에서 다양하게 적용되는 실험적 시도를 거쳤다. 이집트에 가보지 않은 사람도 피라

미드 사진을 통해서 그 존재 뿐 아니라 외형과 기능에 관한 시각적 정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으며, 빠르

게 움직이는 말의 발 동작은 회화에서 묘사되었던 것과는 다른 모양으로 사진에 담겨졌다.

육안의 공간적, 시간적 한계를 뛰어넘는 시각의 확장이 사진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여전히 사진 이미지는 대상의 본질적 리얼리티와 유리되지 않고 사물의 있는 기대로를 반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만, 카메라로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은 빠르게 변화하였다.
몇 분이나 걸리던 촬영 시간은 초 단위로 줄어들었고 사진으로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다는 기대는 그만

큼 커졌다. 회화에 비해 사진은 대상에 대한 지시적 기능이 두드러지고 참조적 속성이 강하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존재 증명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는 사진들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하였

다. 화가들도 사진의 이러한 정보적 가치에 주목하였고 실제 본 적이 없는 장면이라 할지라도 사진에

의존하여 사실을 재현하는 방식의 그림 그리기를 시도하였다.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의 경우

에도 1860년 대에 그린 <막시밀리앙 황제의 처형>을 사진이 제공한 정보에 기초해서 수정, 완성하였다

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뉴스 사진이 역사화의 밑그림 역할을 하는 것은 인쇄술이 발달하여 신문이

나 잡지와 같은 대중매체 시대에 들어서기 이전까지 한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객관적 기록으로서의 사진의 가치가 매체 환경을 통해 일반화되면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회화는 작가

의 주관적 해석의 비중을 높여가야만 했던 것이다. 마네가 멕시코에서 이루어진 처형에서 군인들의

복장을 프랑스 군복으로 바꾸어 그린 것도 그러한 해석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을 통해서 세계를 관찰하는 것은 화가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가고 있었다.
사진가들은 적극적으로 화가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회화용 사진을 제작하기도 하였다.
특정한 사진을 재연하거나 동작을 연출하여 사실적인 그림에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Oliver Pichat

의 사진과 같이 언뜻 보기에는 실제 사건의 기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연결동작의 한 순간을 포착

한 것이 아니라 움직임을 고정시키고 동작을 관찰하기 위한 시도였으며, 물론 실제 전투 장면도 아니다.

이전에 그림으로 그려진 역사의 장면은 아무리 빼어난 화가가 그린다해도 완전한 사실이 아니었으나,

사진의 도움을 부분적으로 혹은 완전히 수용함으로써 화가들은 완벽한 사실을 재현하고자 하는 꿈을

이루는 듯이 보였다. 하지만 그 꿈의 완성은 종국에는 사진가들의 몫으로 돌아갔다. 아무리 좋은 자료들

에 의거한 것일지라도 사람의 손을 거쳐 해석된 그림이 기계적으로 기록된 사진보다 사실적으로 보이지

는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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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니콜라 레 자라스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카미유 코로, 1871-1872
네가티브 유리를 이용해 알부민 종이 위에 인화
샤를 드자바리(Charles Desavary:1837-1885)

 

사진술의 본격적인 정복의 움직임은 휴대용 카메라가 사용된 1880년대 이후에 이루어졌지만, 이미

****콜로디온 습판법이 등장하는 1851년 이후 화가들의 자연스러운 일상이 사진에 담기는 것은 이례적

인 일이 아니었고, 사진으로 담은 화가들의 모습이 판화나 드로잉으로 옮겨지는 일들도 빈번하게 일어

났다. 사실 이러한 화가들의 일상에 대한 스케치는 사진술의 발명으로부터 야기된 회화와의 밀접한

관계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1840년대 후반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를 필두로 한 바르비종파의 화가

들은 야외에서 풍경을 그리면서 빈번하게 카메라를 든 사람들과 마주쳤을 것이다.

1875년 코로가 죽었을 때 그의 집에 300여 명의 사진사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니 양산을 받쳐 들고 이젤

앞에 앉은 그의 모습이 사진에 담긴 것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진술이 본격적인 대중성을 확보하게

되는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진에 담긴 화가들의 여행 장면이나 아틀리에에서 회합하는 모습은 초기

집단 초상 사진의 부자연스러운 경직성을 완전히 벗어나서 본격적인 기념사진의 기능과 외형을 지니게

되었다.

 

****콜로디온 습판법:프레드릭 스코트 아처(Frederik Scott Archer)가 발명하였으며, 유리판 위에

빛에 반응하는 물질을 도포하여 만든 원판 방식을 일컫는다. 콜로디온은 알콜과 에테르에 니트로셀룰로

스를 녹여만든 점액질 용제이며, 이를 은염류와 함께 사용하여 감광성을 지니도록 하였다.

발명과 함께 다게레오타입과 칼로타입 사진술을 완전히 대체하면서 1880년까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

던 사진제작 방식이다. 콜로디온판의 출현과 발을 맞추어 렌즈 설계와 인화술에서도 혁신적인 기술들이

대거 등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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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쓴 여인과 정원의 탁자 앞에 앉은 에드가 드가, 1889-1890년경
아리스토타입
알베르 바르톨로메(Albert Bartholome:1848-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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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에 있는 화가 포랭과 그의 부인, 1891
알부민 인화, 작가 미상

 

화가 포랭은 시인 베를렌느의 친구로서, 아내 잔느 보스크와 함께 조각가 제프루아 두루이에의 아틀리

에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부부는 사진작가가 있다는 사실을 거의 의식하고 있지 않은 듯, 화려하

지만 편안한 분위기의 가구들이 비치는 거울에 자신들의 모습을 비춰보며 즐거워하고 있다.

배우자로서 또는 화가와 모델로서 밀접한 그들의 관계를 사진가는 아틀리에의 강한 감성 및 상상력과

연관지어 잘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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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들의 문하 실습생 아틀리에, 1893년경
구연산염 인화, 작가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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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에 있는 빅토르 프루베, 1898
유리 원판을 젤라틴 브롬 은염 인화
퐁통 다메쿠르(Ponton d'Amecourt:?-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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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이자 조각가인 알베르 바르톨로메
1903년 4월 <카메라 워크지> 수록, 사진 제판술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1879-1973)

 

20세기에 가까워지면서 서양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사진이 지니는 시각매체로서의 차별성과 독자적

기능에 주목하기 사작하였다. 그들은 사진이 지닌 독자적 재연 체계가 단순한 현실의 반영을 뛰어넘는

표현성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하였고, 사진의 복제성이 회화와는 다른 인식의 환경을 제공하리라는 사실

을 예견하였다. 같은 인물이라도 그림으로 그려지는 것과 사진에 담기는 것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감수성의 차원에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사진이 지니는 고유한 속성에 대한 탐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다양한 표현기법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밝은 렌즈와 감도 높은 유제가 개발됨에

따라 전경과 배경의 관계에 있어서 임의성이 증가하였으며, 빛에 대한 관심의 증가로 피사체와 그림자

의 관계가 중요한 모티브가 된 것이었다.

 

사진가가 전경과 배경의 관계를 임의로 선택하게 된 것은 피사체에 대한 존재 증명 이상의 해석을 사진

에 담을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단일 피사체의 중앙 집중적 속성이 두드러졌던 초기의 사진에 비

해, 20세기 초에 발표된 사진들 중에는 둘 이상의 피사체가 프레임 내 상호작용하는 것을 다룬 사례가

속속 발견된다. 위 사진과 아래 사진은 미국 근대사진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가 발행한 [카메라 워크(Camera Work):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편집 발행하고, 표지 및 활자

디자인은 에드워드 스타이켄이 맡았다. 시대를 풍미했던 사진의 회화적 사조와 실험적인 사진 창작

활동에 대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며, 1903년에서 1917년까지 계간지의 형태로 총 50권이 발행

되었다.]에 실렸던 작품들이다. 이후에 패션사진 분야에도 탁월한 선구성을 보여주었던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은 이 사진의 주인공인 바르톨로메(Bartholome)와 로댕(Rodin)을 화면

의 주변부에 배치하고 동일하거나 심지어는 더 큰 비중의 배경을 함께 보여줌으로써, 전경과 배경의

상호작용을 통한 의미의 발생을 시도하였다. 여기에서도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 일차적으로 확인되지만,

이 사진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배경은 사실적 기록만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진가의 선택과

해석의 관점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스타이켄은 전통적인 회화에서 인물을 다루는 방식과

는 달리 주인공인 로댕을 배경에 있는 빅토르 위고(Victor Hugo) 조각상보다 어둡게 처리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사진의 중요한 표현 요소인 빛의 효과를 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사진 고유의 언어를

실험한 좋은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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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의 조각상 앞의 로댕
1903년 4월 <카메라 워크지> 수록, 사진 제판술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1879-1973)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오귀스트 로댕과 그의 작품들을 여러 차례 사진에 담았다.
조명에 의해 나타나는 명암 속에 대리석 형상들을 창조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사진에 마치 조각과도 같은

입체감을 불어넣었다. 조각가와 그의 손의 움직임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과의 긴밀한 관계, 조각품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빛에 의한 표면의 불규칙함, 색채와 상관없이 음영이 만들어내는 특성 등을 관찰할

수 있는 조각가들의 아틀리에는 사진작가들이 선호하는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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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베네트리 아틀리에, 1906년 8월, 아리스토타입
쥘 르네 라리크(Jule Rene Llique:1860-1945)

 

사진의 표현 도구로서의 빛에 대한 탐구는 여러 장면에서 이루어졌다. 화가들의 아틀리에 역시 빛을

다루는 공간이었으며 동시에 빛의 효과가 사진에 담긴 장소였다.
1906년에 촬영된 쥘 르네 라리크의 아트리에 사진은 발명 초기사진에 비해 풍부한 빛의 느낌이 그대로

살아있다.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대비가 분명하고 음영에 의해 빚어진 형태적인 요소들이 화면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함으로써 공간감이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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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틀리에에 있는 알베르 바르톨로메, 1910
은염 인화, 작가 미상

 

조각가들의 아틀리에는 사진작가들이 선호하는 장소였다. 풍경화가인 바르텔레미 멘의 제자인 알베르

바르톨로메는 파리의 라페 거리에 있는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사진 속의 모델이 되었다.

뒤로는 팡테옹에 묻힌 장 자크 루소의 묘비 장식물인 <영광>이 보인다. 이 작품은 1910년 국립고등학교

[살롱전] 당시 석고로 제작되어 전시되었으며, 1912년 6월 30일에 팡테옹에 안치된 루소의 묘비에

장식되었다. 이 조각상이 쓰고 있는 월계관은 루소를 계몽주의 철학자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흰 앞치마를 두른 단순한 실루엣의 조각가의 모습이 강조된 이 사진을 찍은 사진가는 알려지지 않았지

만, 바르톨레메의 천재성과 재능 뿐 아니라 작품의 탁월함까지도 잘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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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발바닥을 쳐다보는 무희, 1917
은염 인화
고티에(Gautier:1917년 파리에서 활동)

 

빛에 대한 관심은 입체로 제작된 조각상을 사진으로 재현함에 있어서도 새로운 영감을 불러일으겼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의 사후에 촬영된 그의 조각 작품 사진은 객관적인 기록의 가치는 물론이고

조각상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하는 자연과의 조사 각도를 고려하여 양감을 강조하였다.

드가가 당시 자신의 작업에 사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진

으로 재현된 그의 작품이 더욱 이체롭게 보이기도 한다. 사진에 있어서 빛은 이미지를 만드는 근원이므

로 모든 사진은 빛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빛의 효과가 사진의 표현 요소로 선택

되는 것은 사진술이 발명된 후 적어도 반세기 이상이 지나고 나서였다. 이로써 사진은 회화로부터

독립적으로 사진만이 지닌 고유한 예술적 가치를 추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에드가 드가의 사후에 작성된 작품 목록에 따르면, 말이나 무용수의 움직임이나 발꼬기 자세를 표현한

80여 점의 밀랍 작품들이 클리쉬 대로에 위치한 그의 아틀리에에서 발견되었다.

움직임의 관찰에 대한 드가의 애착이 우아함과 감동으로 승화되어 만들어진 밀랍 조각들은 화상 볼라르

의 요청을 받은 고티에라고만 알려진 사진가에 의해 1917년 사진으로 남겨졌다.

드가의 아틀리에에서 촬영된 이 사진들을 보면 쌓여 있는 책 위에 놓인 밀랍 작품들은 드가가 빚어낸

그대로 안정성 있는 받침대에 고정되어 있다. 이 사진들은 그의 창작 과정과 작업에 대한 값지고 충실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글: 신수진(연세대 사진심리학 교수)

 

 

 

 



 

출처 :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展 - 19세기 사진과 회화의 특별한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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