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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엔나미술사박물관展: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1)

은초록별 2007. 12. 8. 18:41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展
Seoul-Korea, 2007


    1452년 프리드리히 3세(Frederick III, Holy Roman Emperor:1415-1493)가 신성로마제국 의 황제가 된 후 700년간 유럽을 지배했던 황제의 도시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 비엔나가 자랑하는 16~18세기 서양미술사 걸작들이 서울에 왔다. 유럽 최고의 명문가 합스부르크(Habsburg) 왕가의 걸작 회화로 구성된 '비엔나미술사 박물관展: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을 6월 26일부터 9월 30일까지 서울 덕수궁미술관 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세계 3대 박물관'으로 꼽히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미술사 박물관'의 5천여 점의 회화 컬렉션 중 르네상스 및 바로크 시대의 명작 64점으로 구성 됐다. 19세기 말의 유명한 건축가 고트프리트 폰 젬퍼가 설계하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Emperor Franz Joseph I:1830-1916)에 의해 1891년 일반에 첫 공개된 '비엔나미술사 박물관'은 19세기 말의 절충주의 바로크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로써, 어마어마한 양의 합스부르크 왕가 유물들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할 목적으로 처음부터 박물관의 용도로 설계되었다. 15세기 이후 약 400년간 대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독차지해왔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거처를 두고 있으면서, 프랑스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유럽 영토 를 관할했다. 결국, 르네상스 이후 유럽 문화의 최고급 예술작품 및 유물들이 합스부르 크 제국의 영화를 반영하듯 비엔나미술사박물관에 집약되었다. 이집트 유물, 그리스로마 유물, 왕궁 공예품, 갑옷, 무기, 동전 등 이 박물관의 다양한 컬렉션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세계 최고 수준의 회화 작품 5천여 점이다. 피터, 브뤼겔과 루벤스의 컬렉션은 특히 유명하여 모든 미술사가들의 영원한 답사지가 되고 있으며 켈렉션의 엄청난 규모와 높은 수준을 보면 이 박물관이 오스트리아의 국립박물관에 머물지 않고, 루브르박물관, 프라도박물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박물관의 하나로 꼽히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13세기부터 유럽사에 등장하여 15세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 를 독차지하며 19세기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럽을 지배했다. 오랜 숙적이었던 프랑스 지역을 제외하고 오스트리아 뿐 아니라 헝가리, 체코, 스페인, 이탈리아 남부, 벨기에, 네덜란드 지역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유럽 영토가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통치되고 있 었다. 이 넓은 유럽 영토를 관할하면서도 합스부르크 제국은 700년간 황제의 수도를 비엔 나로 삼고 그곳에 거처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황제와 대공들이 세대를 계승하며 대대로 물려 온 엄청난 유산들은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 의해 1891년 에 세원진 비엔나미술사박물관에 오롯이 집결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의 역사는 비엔나미술사박물관 컬렉션의 역사이기도 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의 팽창 과 쇠퇴, 영광과 쇠락의 역사를 반영하기도 한다. 르네상스, 바로크, 계몽주의 시대를 관통하며 강력한 왕권을 과시하기 위한 황제들의 야심은 유럽 최고의 화가들을 궁정으로 불러들이고 당대 최고의 미술작품들을 사들이는 행위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15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유럽 사회의 변동에 따라 어떠한 그림이 그려지고 수집 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유럽의 정치사, 사회사, 지리사를 종횡무진으로 가르며 미술사 의 위치를 조망해 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는 왕과 대공 등 위대한 컬렉터들의 걸작 수집품에 맞춰 구성되었다. 15세기의 대공 페르디난트 2세(1529-1596)를 필두로 황제 루돌프 2세(1552-1612),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1614-1662), 황제 레오폴트 1세(1640-1705), 황제 카를 6세(1685-1740) 를 거쳐, 18세기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1717-1780)까지 세계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유럽 정치사의 주인공들이 소장했던 작품을 직접 살필 수 있다. 이들은 광대한 유럽 영토를 관할하면서 유명 화가들을 불러모은 만큼 이번 전시에는 티치아노, 틴토레토, 베로네세 등 16세기 베네치아의 거장들에서부터 한스 폰 아헨, 슈프랑거 등의 프라하 매너리즘 화가들, 렘브란트, 루벤스, 벨라스케스, 크라나흐 등 16~18세기 서양미술사 대표작가 56명의 64점의 작품들이 망라됐다. 주요 전시 작품으로는 니클라스 라이저의 <마리 드 부르고뉴의 초상>, 루베스의 <시몬과 에피게니아>, 벨라스케스의 <흰 옷의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 렘브란트의 <책을 읽는 화가의 아들, 티투스>, 루카스 크라나흐의 <롯과 그의 딸들> 등을 꼽을 수 있다.
Section 1: 대공 페르디난트 2세(Archduke Ferdinand II:1529-1596) Portrait of Archduke Ferdinand II(대공 페르디난트 2세의 초상), 1548 야콥 자이제네거(Jakob Seisenegger:1505-1567) Mannerism, Austrian Painter
    대공 페르디난트 2세는 1529년 황제 페르디난트 1세(Emperor Ferdinand I:1503-1564)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보헤미아와 티롤 지역을 상속받은 대공(황세자)이다. 보헤미아 왕국의 총독이 되어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뿐 아니라 예술보호 정책과 수집활동으로도 비중 있게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또한 왕가끼리 정략결혼하는 합스부르크가의 관례를 깨고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의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한 독립형 인간형이다. 예술 작품, 진기한 물품 수집을 워낙 좋아해 암브라스에 성을 짓고 수집품 을 진열, 합스부르크 황실 컬렉션의 전신을 마련하였다. 대공의 관심은 초상화와 갑옷에 있었으며, 그의 초상화 컬렉션은 특히 유명하여 합스부 르크 가문의 위대한 조상들, 과거와 당대의 예술가, 학자, 군인 등 유명인들의 초상화는 약 1,000 점에 이른다. 페르디난트 폰 티롤(페르디난트 2세)은 통치자의 높은 지위를 반영하는 듯 황금색 실로 장식된 화려한 의상, 현대적인 디자인의 옆이 트인 반바지(니커보커스:무릎 아래를 끈 으로 묶는 반바지)를 입고 멋스럽게 깃털로 장식된 베래모를 쓰고 있다. 손에는 장갑을 들고 또 검을 찬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고개를 약간 돌리고 내리깐 시선 으로 관객을 압도하는 이 전신상은 16세기 '절대군주'의 강력한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궁정화가인 자이제네거가 특별히 고안한 양식인 군주초상화 전신상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이 양식은 자이제네거가 몇 해 전인 1532년에 그린 카를 5세(페르디난트 2세의 큰 아버지)의 초상화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후 티치아노에게로 계승되었다.
Portrait of Emperor Charles V(카를 5세의 초상화), 1532-1533(미전시 작품) by 티치아노(Tiziano Vecellio:c.1485-1576) High Renaissance, Italian Painter 마리 드 부르고뉴(Mary Duchess of Burgundy)/측면 반신상, 1500년경 니클라스 라이저(Niklas Reiser:1498년에 활동-1512 슈바츠 정착)
    마리 드 부르고뉴(1458-1482)는 중세 이후 유럽의 가장 부유한 땅 부르고뉴 공국의 샤를 호담공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샤를 호담공이 1477년 전사함으로써 유일한 상속녀인 그녀와 결혼하려는 사람이 줄을 섰고, 그 중 운좋게도 막시밀리안 1세가 결혼에 성공했다. 이후 가난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일약 유럽의 강자로 떠오른다. 정략결혼임에도 불구하고 금술이 좋았던 부부의 행복은 마리 드 부르고뉴가 셋째 아이를 임신한 중 왜가리 샤냥에서의 사고로 24세에 급사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막시밀리안 1세는 평생 마리를 잊지 못하고 그녀를 추억하는 시를 썼고, 죽은 후에도 24세 모습의 그녀를 궁정화가 니클라스 라이저를 시켜 계속 그리게 했다. 이 작품에서 마리 드 부르고뉴는 에넹(15세기 프랑스와 플랑드르에서 유행한 원뿔형 머리 장식)과 넓게 드리워진 투명한 베일이 있는 부르고뉴의 후기 고딕식 머리장식을 하고, 아름다운 장신구와 석류 열매 디자인의 이탈리아산 의상을 걸친 새하얀 피부의 마리는 부르고뉴 지방의 경제적 부와 세련된 미를 한껏 과시한다.
막시밀리안 1세(Emperor Maximilian I:1459-1519)/반신 초상화, 1508 베른하르트 슈트리겔(Bernhard Strigel:1460-1528) Northern Renaissance, German(Swabia) Painter
    막시밀리안 1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봉해질 운명이었 지만, 이 때만해도 합스부르크 가문은 그다지 유럽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1477년 프랑스의 샤를 8세와의 경쟁을 뚫고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결혼을 성공한 이후 경제적으로 부유한 네덜란드 지역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로 확보하는 데 성공 했다. 이후 자신의 자식들과 손자들을 이중결혼, 정략결혼시킴으로써 스페인, 보헤미아 와 헝가리 지역으로의 확장을 꾀했고, 손자인 카를 5세 시대에 이르러 스페인계의 합스 부르크가(家) 형성에 성공했다. 막시밀리안 이후로 결혼을 통한 영토 확보와 확장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이 되었다. 막시밀리안의 궁정화가 스트리겔은 이 야심 찬 황제의 공식초상화를 여러 버전으로 그려 유포하였다. 르네상스 초기의 번쩍이는 형태의 리펠양식으로 된 기사 갑옷을 입고, 후기 고딕 장식의 왕관을 쓴 이 측면상은 르네상스 시대의 전통적인 초상화 양식을 따르고 있다.
Emperor Maximilian I with His Family, 1516(미전시 작품) 황제 막스밀리안 1세와 그의 가족들 베른하르트 슈트리겔(Bernhard Strigel:1460-1528)
    이 그림은 황제 막시밀리안 1세가 그의 가족을 이용하여 그의 정치적인 계획과 그의 욕망 을 수행하려는 그의 의도를 기록을 그림으로 남긴 한 예이다. 그림은 막시밀리안 1세, 첫째 부인 부루군트의 마리와 그의 가족들:아들 필립, 필립의 손자인 카를과 페르디난트, 그리고 막시밀리안이 입양한 아들 루이스로 그는 헝가리와 보헤미아 왕국을 물려받았다. 따라서 그림은 1515년에 비엔나에서 있었던 이중 결혼을 말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합스부르크(Habsburgs)와 마자르-야기엘론(Magyar-Jagiellon) 두 왕국이 하나로 합쳐졌다. 인문주의자이면서 막시밀리안 1세의 조언자인 요하네스 쿠스피니안(Johannes Cuspinian:1473-1529)은 1515년 중제를 맡았고, 명부를 받았다. 그리고 화가 슈트리겔에게 명하여 신성한 혈족 그림에 넣어 그리라 했다. 그래서 오늘날 분리된 반대 방향의 그림엔 주 혈족을 그렸고 두 번째 화판(현재 개인 소장)에는 막시밀 리안의 가족들로 또 다른 혈족 그림을 그렸다.
Portrait of the Cuspinian Family, 1520 Private Collection(미전시 작품) 베른하르트 슈트리겔(Bernhard Strigel:1460-1528) Section 2: 황제 루돌프 2세(Emperor Rudolf II:1552-1612) Emperor Rudolf II(황제 루돌프 2세), 1606/1608년경 한스 폰 아헨(Hans von Aachen:1552-1615, German Mannerist Painter)
    황제 루돌프 2세는 1576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여 36년간 황제의 자리에 있었으 나 실권을 동생인 마티아스(Matthias)에게 빼앗긴 채 프라하 궁정에서만 세월을 보냈다. 괴팍한 성격과 우울증으로 유명하나 학문과 예술만큼은 끔찍할 정도로 사랑했다. 티코 브라헤, 케플러 등 천문학자 뿐 아니라, 연금술사, 화가, 공예가들을 모두 프라하 궁으로 끌어들였다. 화가로서는 한스 폰 아헨, 슈프랑거, 롤란트 사베리 등이 프라하 궁에서 루돌프 2세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아헨은 루돌프 2세를 거의 친구 대하듯 편하 게 모셨고, 황제의 초상화를 전혀 '이상화'하여 그리지 않고 결점이 있는 성격까지도 드러나게 그리는 것이 허용되었다. 루돌프 2세는 에로틱한 그림들을 특히 좋아하여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연애담을 자주 그리게 했다. 하지만 자신은 평생 합스부르크 가문의 중매 리스트에 올랐으나 막상 결혼 한번 하지 못했고, 왕위를 계승한 자손도 없이 사망하여 왕위를 동생 마티아스에게 물려주어야만 했다. 그의 전속 궁정화가 중 한스 폰 아헨은 특히 황제와 사적으로 친했고, 그래서 결점이 있는 성격까지도 드러나는 황제의 초상화를 남길 수 있었다. 튀어나온 턱, 슬퍼 보이면 서 예민한 시선, 눈물 주머니와 눈 주위의 주름 등의 표현은 대상을 '이상화'시키는 대신 오히려 지치고 무력한 한 인간의 우울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듯하다. 긴 모자와 뾰족이 솟은 옷깃의 주름장식 그리고 황제의 권력을 상징하는 어떠한 표식도 없이 수수하고 검은 스페인식 의상을 입고 있다. 다만 목에 건 황금양피기사단의 목걸이 만이 그가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임을 증명하고 있다. 사적이고도 진실된 모습을 담아낸 이 초상화의 특징이 분명히 드러난다.
Bacchus, Ceres and Cupid(바쿠스, 케레스, 큐피드), 1600년경 한스 폰 아헨(Hans von Aachen:1552-1615, German Mannerist Painter)
    한스 폰 아헨은 황제 루돌프 2세의 가장 총애 받는 궁정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황제의 친구이기도 한 만큼 그 자부심도 투철하였던 아헨은, 포도주의 신 바쿠스와 곡물 의 신 케레스의 얼굴에 화가 자신과 아내의 얼굴을 그려 넣는 것에 주저함이 없었다. 물론 큐피드는 화가의 아들의 얼굴 초상이다. 매혹적인 피부의 아름다운 여인의 신체를 표현하는 것에 대한 일차적인 관심보다, 이 작품은 '자연의 풍요'에 대한 알레고리로 해석된다. 바쿠스 머리의 포도 넝쿨과 손의 포도 열매, 케레스 머리의 곡물 장식, 큐피드 가 든 풍성한 과일 바구니 등은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하는 자연'의 예찬으로 읽힌다.
Joking Couple(거울을 들고 희롱하는 남녀), 1596년경 한스 폰 아헨(Hans von Aachen:1552-1615, German Mannerist Painter)
    작고(동판:25×20cm) 친밀한 느낌의 이 그림은 이중초상화로서, 웃고 있는 화가 자신과 젊은 아내 레기나 디 라소를 그린 것이다. 루돌프 2세의 궁정화가 아헨은 당대의 유명한 작곡가 올란도 디 라소의 둘째딸과 결혼한 직후, 이 그림을 그려 자신의 결혼을 기념했다. 서로 웃으며 희롱하는 남녀의 도상은 네덜란드에서 특히 많이 그려졌는데, 정상적인 가정 의 행복을 암시할 수도 있지만, 통상 창녀촌을 의미하기도 한다. 배경의 앵무새 또한 이중적인 의미로 해석된다. 더구나 '거울'은 여인의 얼굴을 모든 면 에서 다 보여줄 수 있는 실제적인 기능을 담당하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인생무상(Vani -tas바니타스)'과 '사치'의 상징으로도 해석된다. 이 시대의 문화를 읽기 위해서는 당대 의 독특한 유머 감각을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주피터와 안티오페(Jupiter and Antiope), 1596년경 바르톨로메우스 슈프랑거(Bartholomaus Spranger:1546-1611) Flemish(Prague) Mannerist Painter
    스프랑게르는 루돌프 2세의 프라하 궁정에 모여있던 궁정 화가들 중 한 사람이다. 루돌프 2세는 특히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주제, 그 중에서도 특히 신들의 애정행각을 다룬 그림들을 선호했는데, 슈프랑거는 황제의 이런 욕구를 가장 잘 충족시켜주었던 화가에 속한다. 주피터(제우스)가 염소의 다리를 한 사티로스로 변장하여 아름다운 테베 왕의 딸 안티오페에게 접근하는 장면이다. 안티오페의 새 하얀 다리에 감각적으로 걸쳐있는 검은 독수리는 사티로스가 주피터임을 암시한다. 원래 이야기는 주피터가 잠들어 있는 안티오페에게 다가가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화가 는 두 주인공이 모두 매우 적극적인 포즈를 취하는 것으로 변형했다. 서로를 에워싸기 위해 구부린 신체는 매우 육감적이고 에로틱하여 황제의 기호를 충분히 충족시켰을 것이 다. 나체의 곡선과 뒤틀린 신체의 표현은 바로크 미술의 전형적인 특징을 이루는 요소이 기도 하다.
메르쿠리우스에게 경고받는 비너스와 마르스, 1586/1587 바르톨로메우스 슈프랑거(Bartholomaus Spranger:1546-1611)
    이 그림은 사랑의 여신 비너스와 전쟁의 신 마르스가 불륜을 저지르다 비너스의 남편 불칸에게 들키기 직전의 한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나신을 드러낸 비너스와 마르스의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이 현장을 들여다본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그림에 불칸은 나오지 않는다. 위에 있는 이는 전령의 신 메르쿠리우스로 둘에게 불륜을 저지르지 말거나, 저지 르려면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경고를 보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림의 양식은 16세기 중후반 '프라하 매너리즘'으로 분류된다. 안정감을 내세웠던 르네 상스 시대가 끝나고 바로크로 넘어가기 직전이다. 이 사조의 특징은 불안 등 감정을 표현 하기 위해 몸을 뒤틀고 과장했다는 점이다.
Venus and Vulcan, 1610년경 불카누스의 대장간에 있는 비너스 바르톨로메우스 슈프랑거(Bartholomaus Spranger:1546-1611)
    그림의 전경에 아모르(큐피드)는 자신의 활을 가지고 놀고 있고 벌거벗은 불카누스는 창 을 다듬는 중이다. 비너스는 불카누스를 유혹하여 불카누스가 자신의 아들인 아이네아스 를 위해 무기를 만들어주도록 청한다. 이 그림은 그리스신화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 계열 에 속하는 것으로 바르톨로메우스 슈프랑거는 황제 루돌프 2세를 위해 이러한 종류의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여기에 묘사된 장면은 특히 자극적인 에로티시즘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매혹적인 나체 형상으로 그려진 사랑의 여신으로 인해 유발되고 있으며 또한 이는 황제의 취향과 명백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 그림은 슈프랑거의 후기작품으로 말년에 그는 자신의 1590년대 작품에 속하는 거대한 인체 표현으로 회귀하는 경향을 보 이고 있다.
Landscape with Birds(새가 있는 풍경), 1628 룰란트 사베리(Roelant Savery:1576-1639, Baroque Flemish Painter)
    룰란트 사베리 또한 루돌프 2세의 프라하 궁정에서 활동했던 궁정화가로, 주로 '환상적인 풍경화'를 전문적으로 그렸다. 산과 나무, 멀리 강의 계곡이 보이는 전망, 폐허가 된 건물들을 배경으로 셀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새들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분위기는 매우 오묘하며 환상적이지만, 여기에 그려진 새들은 모두 황제의 동물원에 실제 로 사육되었던 것으로, 동물도감을 보듯이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되었다. 거위, 백조, 오리, 재두루미, 공작, 독수리 등 친숙한 새들 외에도 앵무새, 타조, 펠리칸 등 이국적인 새들도 포함되었다. 이 또한 제국의 기호에 충실한 일종의 컬렉션이다. 특이한 것은 오른쪽 전경에 그려진 퉁퉁한 몸집의 도도새로, 인도양의 모리티우스 섬에만 살았던 날 수 없는 거대한 새이다. 낙원의 섬이라 날아서 먹이를 잡을 필요도 없어 날개 가 발달하지 못했던 이 바보새는 신대륙 발견과 식민지화에 혈안이 되어 있었던 유럽인들 에 의해 '발각'되면서 17세기 말 이미 멸종되었다. 19세기에 지어진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한 바로 그 새이다.
A fruit and Vegetable Stall(야채시장), 7월-8월, 1590 얀 밥티스트 사이브(Jean Baptist Saive:1540-1624, Flemish Painter)
    16세기말 플랑드르의 한 시장통을 매우 사실에 충실하여 그린 작품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는 풍속화도 정물화도 아니며 일종의 계절화 연작의 일부이다. 즉 1년 12달을 6점의 연속 화로 그린 연작 중 1점이며, 이 작품은 7월과 8월을 의미한다. 상단에 보이는 2점의 작고 둥근 그림에 각각 '7월'과 '8월'이라는 새김문구와 계절에 맞는 농촌 풍경의 알레고리가 그려져 있다. 이러한 종류의 연속화는 중세부터 유래한 전통이며 통상적으로 계절의 흐름 에 맞추어 적절히 돌아가는 세상의 모습을 바라보는 '통치자'의 관점에서 제작된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은 루돌프 2세의 동생 대공 에른스트가 주문하여 그의 삼촌인 카를 대공의 미망인에게 선물한 것이다. 16세기 남부 네덜란드 지역에는 시장과 부엌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유행하였고 거기에 성서 주제가 삽입되곤 했는데, 사이브의 이 작품 또한 그러 한 유행의 흐름 속의 작품으로 파악된다. 모든 사물의 세부가 극도로 정밀하고 세심한 것은 남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회화기법에 기인한다.
산책하는 사람들이 있는 궁전건축화, 1596 한스 프레데만 드 프리스(Hans Vredeman de Vries:1526-1609) Northern Renaissance Dutch Architect & Engineer
    한스 프레데만 드 프리스는 사실상 북부 건축회화의 창시자이다. 그는 세를리오와 관련된 원근법 연구와 상상의 건축물을 내용으로 하는 동판화를 다량 출간했다. 불안한 방랑생활을 하던 화가는 종교적인 이유로 1576년 안트베르펜에서 도망쳐 1596-1598 년 프라하의 루돌프 2세 궁정으로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 유명한 유화 네 점이 그려졌 는데, 이 작품들은 현재 모두 비엔나미술사박물관의 소장품이다. 회화작업에 있어서 한스 프레데만은 자신의 아들 파울의 도움을 받았으며 이 작품에서는 프라하의 화가 다르크 드 크바데 판 라베스테인이 첨경 인물을 그렸다. 북부 유럽과 이탈 리아 르네상스 형식은 이 화려한 상상의 건축물에 잘 들어맞는다. 여기서 구성의 선은 공간의 대담한 건축선과 기둥이 있는 홀 끝의 중앙소실점에서 교차한다. 건축물과 정원은 이 작품에서 내적인 연관을 맺고 있으며, 건축물은 무게감이 없어 보이고 내부와 외부의 구별은 결코 끝나지 않을 궁정의 꿈꾸는 듯한 공간으로 희미하게 사라진다. 이 공간에서 귀족들이 산책을 하거나 거닐고 있다. 연애의 정원에 대한 중세적인 상상은 특히 장미설화(13세기 프랑스 궁정연애시)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지속 되고 있다. 왼쪽의 로지아(지붕과 기둥으로 된 트인 홀)에서는 귀족의 자녀들이 댄스교습 을 받고 있는 중이고, 한 여자정원사가 화려한 분수대에서 물을 받고 있다. 왼쪽에 목걸이를 한 작은 원숭이와 더불어 공작, 칠면조와 재두루미가 그려져 있으며 이들 동물은 자만 혹은 사치의 죄악에 대한 경고의 의미로 해석되기보다 궁정의 호사스러움에 걸맞는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작은 꽃다발(Bouquet in a Clay Vase), 1599이후, 1607년으로 추정 얀 브뤼겔(Jan Brueghel the Elder:1568-1625, Baroque Flemish Painter)
    얀 브뤼겔은 <농가의 결혼식>으로 유명한 피터 브뤼겔의 둘째 아들이다. 일찍부터 전문 분야을 개발해야 했던 네덜란드의 풍토에 맞게 1600년경부터 줄곧 꽃 그림만 집중적으로 그려 17세기 네덜란드의 가장 유명한 꽃그림 화가가 되었다. 다양한 꽃들의 세부는 너무 나 세밀하게 그려져 마치 화훼도감을 보는 듯 하다. 하지만 전혀 겹쳐지지 않고 꼿꼿하게 서있는 각각의 꽃들은 의도적으로 배치되었을 뿐 아니라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왜냐하면 이 다양한 꽃들은 결코 한 계절에 한꺼번에 필 수 없기 때문이다. 활짝 핀 이 꽃들이 아무리 지금 최고조로 아름답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금방 시들고 말 것이라는 교훈 이 이 그림에 숨어있다. 이는 '인상무상(Vanitas)'을 근본적인 교훈으로 깔고 있었던 바로크인들의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뿌리가 뽑힌 작은 시클라멘은 동전과 장신구, 반지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덧없음에 대한 생각을 강조한다. 아래의 금화에는 1599년이라고 표기 되어 있는데, 이는 작품의 연대를 표기한 것이 아니고 다만 하나의 시간적인 경계, 즉 작품이 적어도 1599년 이후에 생성된 것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양식적인 이유에서 이 작품의 제작연대를 1607년경 이후로 추정하기도 한다.
Section 3: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Archduke Leopold Wilhelm:1614-1662) Archduke Leopold Wilhelm in His Gallery at Brussels, c.1651 브뤼셀 갤러리에 있는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 다비드 테니에르(David Teniers the Younger:1610-1690) Baroque Flemish(Antwerp) Genre(Scenes of Peasant Life) Painter
    레오폴트 빌헬름은 황제 페르디난트 2세(Emperor Ferdinand II:1578-1637)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장자상속권의 순위에 따라 후대의 통치에서 배제되었다. 그런 1647년 그의 사촌이 자 제부인 스페인의 왕 펠리페 4세에 의해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임명되어 부뤼 셀에 거처하게 된다. 이후 그는 브뤼셀 궁정에 약 1,500점 이상의 회화작품들이 전시된 갤러리를 만들고, 당대 유럽에 떠돌던 걸작 회회들을 사 모았다. 특히 영국의 시민혁명 으로 처형된 찰스 1세의 시종이었던 해밀턴공의 어마어마한 이탈리아 회화 컬렉션이 그 대로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의 갤러리로 들어왔다. 이 중에는 리치니오의 <남자의 초상>, 만 프레디의 <카인과 아벨>, 귀도 레니의 <베드로의 참회> 등이 전시에 출품된다. 레오폴트 빌헬름은 당시의 '현대' 미술 컬렉터이기도 해서 브뤼겔을 포함한 플랑드르, 네덜란드의 당대 회화작품을 거침없이 사 모았고, 당시의 화가들을 아낌없이 후원했다. 남부 유럽의 관점에서 보면 독특하고 지나치게 '현대적'일 수 있는 네덜란드 회화작품이 수집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안목 덕분이다. 합스브루크 사람들 중 가장 중요한 미술수집가인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은 스페인령 남부 네덜란드를 통치하던 1647년부터 1656년까지 수집한 작품 대부분을 전시실에 모아 두었다. 1648년 영국 왕조가 몰락 했기 때문에 당시로선 수집가들에겐 좋은 때였다. 영국 왕의 수집품과 수많은 영국 귀족들 소장품들이 이 시기에 시장에 팔려고 나왔다. 이 그림에서 레오폴드 빌헬름은 자기 화랑 방문자로 그려졌고 작가인 테니에르(Teniers) 자신도 그렸는데 그는 이 화랑의 책임자이면서 대공의 전속 화가였다. 다른 주요 수집가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작품들을 가상적으로 배치하여 그린 화랑 내부는 네덜란드의 전통 양식이다. 이 그림은 레오폴트 빌헬름의 형이자 프라하에 있던 황제 페르디난트 3세가 소유하고 있었다. 약 51점의 이태리 화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오늘날 그림 속의 작품들은 모두 비엔나미술사박물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홀로 모자를 쓴 인물이 레오폴트 빌헬름 자신이며 그는 이 작품을 그린 궁정화가 테니에 르와 대화를 나누면서 한 초상화를 감상하고 있다. 대공은 자신의 컬렉션에 대단한 자부 심을 가지고 있었고, 어떤 소장품을 이 갤러리 그림에 포함시킬지를 직접 결정했다. 전경의 두 마리 개는 그 의미가 모호하지만, 걸작을 구입하기 위한 '선의의 경쟁'을 암시 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Archduke Leopold Wilhelm in His Gallery, c.1647 Museo del Prado, Madrid, Spain(미전시 작품)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디트, 1580년경 베로네세(Paolo Veronese:1528-1588, Italian Mannerist Painter)
    베로네세는 16세기 베네치아의 독창적인 화풍을 대변하는 화가이다. 베로네세는 화가가 그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그리고자 했고 그러기에 앗시리아의 적장 홀로페르 네스의 목을 베어 고국을 구한 유디트의 소재는 유용한 것이었다. 한국판 논개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이 이야기는 구약성서에 등장한다. 술에 취해 잠을 자는 적장의 목을 칼로 베고, 이제 막 잘린 목을 하인이 든 자루에 담으려는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끔찍하고 참혹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유디트의 얼굴은 극히 평화롭고 우아하게 그려졌으며 마치 축제라도 있는 듯 의상은 화려하다. 극도의 명암 대비를 통해 유디트의 피부에는 환한 빛이 떨어지고, 적장의 머리와 하녀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져 있다. 명암의 극적인 대조다. 기이한 면을 지녔던 화가 베로네세는 적장 홀로페르네스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는 주장이 있다. 16세기 베네치아 3대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베로네세의 최전성기 작품이다.
Allegory with Lovers(알레고리화-마르스, 비너스, 빅토리아, 큐피드), 1550 파리스 보르도네(Paris Paschalinus Bordone:1500-1571) High Renaissance Italian(Venice) Painter
    여신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미의 여신 비너스는 절름발이 신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와 의 결혼 후에도 여러 신들과 바람이 났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 중 남성다운 전쟁의 신 마르스와의 애정행각은 유명한데 큐피드는 아마도 그 사이에서 난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보르도네의 그림에서 비너스와 마르스는 날개달린 승리의 신 빅토리아의 축복 을 받으며 등장한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는 결혼의 상징인 미르테 나무로 엮은 화환이 올려지고, 사랑의 신 큐피드는 화살통을 잠시 레몬나무에 매달아 둔 채 비너스와 마르스 에게 장미를 뿌리고 있다. 이 때 장미는 사랑과 다산의 상징이다. 비너스가 막 따려고 하는 레몬나무는 그윽한 향기가 오래 지속되므로 결혼의 유지를 의미한다. 비너스의 얼굴은 보르도네가 통상적으로 그린 유형을 따랐지만, 마르스는 분명 그 시대 한 인물의 실제 초상으로 보인다. 전형성을 거부하는 소재, 불확실한 메시지, 독특한 색감 등은 16세기 후반 매너리즘 회화의 징후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장갑을 들고 베레모를 쓴 젊은 남자의 초상, 1520/1525년경 베르나르디노 리치니오(Bernardino Licinio:c.1485/89-c.1550) High Renaissance Italian Painter
    이 초상화는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의 소장목록에 따르면 1659년 처음으로 황실 갤러리에 소장되었다. 수염이 있는 젊은 남자는 베네치아인으로 보이는데, 그는 하얀 셔츠 위에 소매가 긴 검은 자켓을 입고 있다. 모피로 테두리를 두른 갈색빛이 도는 그의 짧은 덧옷 은 벨벳과 같은 검은 천으로 만든 것으로 머리에는 베레모를 쓰고 있다. 반신상의 이 젊은 남자의 손에서 느껴지는 역동성은 1520년대 초반이라는 제작연대를 대변하고 있다. 이러한 역동적인 손의 동작은 이 남자의 심리 표현과도 부합되는 것으로, 그는 가벼이 의문을 품은 듯 하지만 순진무구한 시선으로 활기찬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리치니오 특유의 관찰 능력이라 할 수 있다. 목의 주름이나 단색으로 처리된 배경 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실루엣과 같은 섬세함 또한 리치니오의 특징을 말해준다. 이 초상화는 심리적인 순간의 포착에 집중하고 있는 점에서 티치아노와 로마니노(Girolamo Romanino:1484-1562, Italian High Renaissance Painter)에 근접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한때 그들의 작품으로 오인되었다.
Repentance of St. Peter(참회하는 베드로), 1637년경 귀도 레니(Guido Reni:1575-1642, Baroque Italian(Bologna) Painter>
    하늘을 향해 치켜든 통한의 눈, 어이없는 듯 약간 벌어진 입, 힘없이 기울어진 얼굴과 그 얼굴을 받치고 있는 오른손, 어찌할 수 없는 회한으로 가슴을 어루만지는 왼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가 뒤늦게 이를 깨닫고 비탄으로 울부짖는 모습이다. 그 참회의 순간을 사실감 넘치게 표현했다. 얼굴을 화면 가득 클로즈업함으로써 그 격정 적인 회한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다. 이 작품은 종교적인 예배의식을 인도 하는 예배용 그림인 동시에 예술가의 뛰어난 예술적 기교, 신속함과 정확성을 표출해 낸 회화의 걸작이다. 귀도 레니는 17세기 이탈리아의 대표 화가로 초상화를 통해 격정적인 인간의 내면을 즐겨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초상화엔 주인공의 내밀한 심경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얼굴 속에 감춰진 주인공의 내면과 갈등을 읽어 내는 것이야말로 초상화 감상 의 진정한 매력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같은 감동을 체험할 수 있다.
Adoration of the Magi(동방박사의 경배), 1555/1560년경 야코보 바사노(Jacopo Bassano:1515-1592, Italian(Venice) Mannerist Painter)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고 찾아 온 동방박사의 경배 장면이다. 야외의 서늘한 여명 속에서 구름 사이의 별빛을 한가득 받으며 아기 예수가 마리아의 무릎에 안겨 있고, 성 요셉이 뒤에서 이를 지켜본다. 각각 황금, 유황, 몰약을 가지고 온 동방의 현자들은 이국적인 옷을 입고 나타나 아기 예수를 향해 선물을 내민다. 통상적인 <동방박사 경배>의 도상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그림은 이상하리만치 길죽하게 늘어져 있고 동작은 어딘가 어색하다. 녹색 망토를 걸친 멜키오르는 관객에게 쭉 뺀 엉덩이를 내보인 다. 빛 바랜 듯한 분홍색을 즐겨 사용하여 신비롭고 독특한 화면 분위기를 더한다. 이 모두는 16세기 후반 이탈리아 매너리즘 회화의 특징적 요소들이다. 이 작품은 엘 그레코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 적이 있는데, 그만큼 엘 그레코의 작품 분 위기와도 많이 닮아 있다.
그리스도의 매장, 1565년경/Titian 공방 작품 티치아노(Titian, Tiziano Vecellio:1490-1576) High Renaissance Venice Italian Painter
    그리스도의 매장이 묘사되어 있는 작품이다. 보통 신교에서는 그리스도가 부유한 상인이 자 예루살렘최고평의회의 구성원인 아리마데의 요셉과 니코데무스라는 바리새인에 의해 무덤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이 자리에는 마리아와 막달레나 마리아 그리고 복음서의 저자인 요한이 함께 있다. 인물들은 대각선 구도에 놓여 있으며, 전경 왼쪽에서부터 빛이 나온다. 짙은 갈색이 도는 배경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머리 뒤쪽에 있는 한 점 빛을 제외 하고는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이 작품은 1556년 티치아노가 그리스도의 매장을 주제로 하여 스페인 궁정을 위해 완성한 작품을 재제작한 것으로 원본은 유실되었다. 현재 마드리드에는 이 주제를 다룬 티치아노의 그림이 두 점 더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티치아노의 공방 작품으로서 가치가 있으며 제작연대는 1565년경으로 잡고 있다.
Man in Armour(금장 갑옷을 입은 남자의 초상), 1555/1556년경 틴토레토(Jacopo Tintoretto:1518-1594, Italian Venice Mannerist Painter)
    틴토레토는 티치아노에 이어 16세기 베네치아 회화의 전통을 확립한 대표적인 화가이다. 종교적인 주제, 신화화, 초상화에 모두 능했던 틴토레토의 최절정기 작품에 속하는 이 초상화는 기둥 아래 새김문구로 보아 30세의 인물을 대상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평온한 표정과 견고한 동작으로 살짝 몸을 돌려 시선을 관객에 고정한 이 인물은 번쩍이 는 갑옷을 입고, 칼을 차고, 한 손을 투구에 올려 이제 막 출전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 아마도 뒤의 창문을 배경으로 펼쳐진 드넓은 바다로 곧 향할 것이며, 아직 돛을 펼치지 않은 저 배는 이 해군장교의 소유일 것이다. 출정을 앞둔 베네치아 해군 장교의 결연한 표정을 잘 담았다. 출정을 앞둔 긴장된 분위기이지만 창밖의 바다 풍경이 그 긴장감을 부드럽게 완화시켜 주고 있다. 틴토레토는 유능한 연출자로서 위에서 쏟아지는 광선을 통해 관객의 눈을 이끌어간다. 즉 그 빛은 갑옷에서 반사되어 부서지고 세 개의 기둥을 따라서 왼쪽으로 흩어지는데, 결국 여기서 창문의 항구 풍경으로 시선이 해체되고 있는 것이다. 틴토레토는 초상화로 그려질 대상의 높은 인격을 전달함과 동시에 사회적인 지위를 은연 중에 드러내는 표현기법에 완전히 정통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모자, 1632년경 조반니 카라치올로(Giovanni Battista Caracciolo:1578-1635) Baroque Italian(Naples) Painter
    카라치올로는 나폴리 바로크 회화의 출발점에 서 있는 화가다. 나폴리 바로크 회화는 카라바조가 1606년 가을에 나폴리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카라치올로는 나폴리 시기 카라바조의 가장 중요한 계승자였다. 이 시기의 그는 롬바르디아의 영적 사실주의를 가장 잘 이해했다. 영적 사실주의는 한편으로는 성경과 성인 이야기의 인간적인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른 한편으로는 명암의 대조에서 발달한 극적인 회화라는 예술적인 수단을 독특하게 결합한 것이었다. 이 작품의 어머니 안나 및 어린 예수와 함께 있는 성모의 재현은 넓은 의미에서는 성가족의 주제로서, 신학적으로는 마리아의 순결한 수태 개념에 속한다. 카톨릭 교리에 따르면 처음부터 마리아는 원죄 없는 존재로 신에 의해 예정되었다. 후기 중세사회의 조각과 회화에서 이러한 주제는 무엇보다도 북부 유럽에 폭넓게 확산되어 반종교개혁의 시대, 다시 말해 카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을 무효화하려던 시대에 다시금 그 가치를 인정받고 널리 유포되기에 이르렀다. 카톨릭 교회는 성모와 성가족에 대한 숭배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이 성경에 기초한 신앙의 핵심에 속하지 않는다 고 거부했던 교리를 보급하려고 하였다. 이 그림에서는 어린 예수의 발치에 빵과 무화과 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원죄(무화과는 아담과 이브가 신의 금기를 어긴 대가로 얻은 것 이다.)와 성체의 빵(변화된 그리스도의 몸)이 상징하는 구원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매우 위계적으로 배치된 인물들이 여기서는 구체적 몸짓을 동반하여 생기 있고 친숙한 '대화' 속에서 서로 엉켜 있다. 그럼에도 신학적으로 중요한 관계들은 분명 히 드러난다. 즉 그림의 중앙에는 서로 교차하는 인물들의 손이 십자 형태로 위치하고 있다.
동생을 살해하는 카인, 1610년경 바르톨로메오 만프레디(Bartolomeo Manfredi:1582-1622) Baroque Italian(Rome) Painter
    구약성경에 나오는 형제 살해에 관한 이야기를 묘사한 작품이다. 카인과 아벨은 아담과 이브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이다. 농부 카인과 양치기 아벨이 신에게 함께 제사를 지냈지 만 신이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이자 카인이 질투와 분노에 휩싸여 동생을 죽인다. 그 순간을 포착한 이 그림은 삼각형 구도로 형제의 몸을 복잡하게 교차시켰다. 등장인물의 극적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 신체의 일부를 뒤틀거나 과장하는 매너리즘 경향 이 뚜렷한 작품이다. 만프레디는 깊고 대조가 풍부한 명암 기법으로 인물에 환각적인 성격을 불어넣었는데, 이 그림에서도 그 특징을 그대로 보여 준다. 카인이 방망이를 내리 치려는 순간이나 이를 보는 아벨의 표정이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현장을 지켜보는 듯한 인상을 자아낸다.
아침식사 정물, c.1635 얀 다비스존 드 헤임(Jan Davidsz. de Heem:1606-1684) Baroque Dutch(Antwerp) Painter
    17세기 유럽 최고 수준의 정물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탁월한 화면 구성과 색채 대비가 돋보인다. 화면 오른쪽으로 약간 치켜 올라간 은제 접시가 수직의 유리잔, 수평의 식탁 사이에서 하나의 사선을 만들어 내면서 생동감을 부여한다. 여기에 넘어진 은제 병, 몸통 절반만 보이는 가재가 화면의 긴장감을 연출한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녹색 톤이지만 체리와 가재의 붉은색이 대비를 이루는 점도 매력적이다. 얀 다비스존 드 헤임은 17세기 황금기 네덜란드의 화가로 <아침식사 정물>이라는 주제만 을 전문적으로 그렸다. 식탁 위에는 은식기, 유리잔, 레몬과 포도, 바닷가재와 굴 등이 놓여있다. 이 정물들은 어두운 배경에서 극적인 조명을 받으며 화려하게 빛난다. 각 대상의 묘사는 너무나 생생하고 세심하여 녹색 빛이 도는 백포도주 잔 표면에 아틀리 에의 창문이 반사되어 보일 정도이다. 마치 실제로 눈 앞에 정물이 놓여있는 듯한 생생한 착각을 유도하는 것이 이 작품의 목적 중 하나이다. 가재의 다리는 식탁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아 받쳐주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그러나 화가의 또 다른 의도는 깎다가 만 레몬, 변하기 쉬운 음식(자극되는 감각의 인식)을 통해 오히려 삶의 '덧없음'이라는 바로크 시대의 교훈을 상기시킨다. 한편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백포도주와 레몬은 음식 궁합이 잘 맞는다고 믿어져 당시에 실제로 함께 먹는 것이 권장되었다고 한다. 17세기 정물화에는 백포도주와 레몬이 짝을 이뤄 등장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The Liberation of St. Peter(베드로의 구출), 1621 헨드릭 판 스테인베이크(Hendrick van Steenwijck:1580-1649) Baroque Dutch Painter
    <베드로의 구출>은 헨드릭 판 스테인베이크의 작품에서 자주 반복되는 주제 중 하나이다. 이름이 똑같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 건축화가로 양성된 스테인베이크는 이 모티프를 다양한 변용과 판형으로 그렸다. 그는 사도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건축물과 빛의 재현을 묘사하는 데에 더욱 주력하였다. 예루살렘 감옥 밖에서 주의 천사가 사도 베드로를 구출하 려고 하는 찰나에 감옥 안으로 향한 시선은 마치 건축물과 빛에 대한 스케치 같은 인상을 준다. 육중한 기둥들은 웅장한 건물의 궁륭을 떠받치고 있고, 오른쪽과 왼쪽의 공간은 건물의 이어지는 부분을 보여준다. 또한 그림 전면에 있는 중앙 기둥 뒤에는 지하감옥의 입구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헤롯 왕은 베드로를 군중 앞에 세우기 전까지 이곳에 가두어 놓으려고 했다. 건물 밖에서 창백한 달빛이 지하감옥 안으로 떨어지고 등불은 각각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공간에 있으며 그 빛을 통해 빛과 그림자 극이 생겨난다. 성경에서는 각각 네 명의 군사들로 이루어진 네 개의 부대가 경비를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작품에서 사도와 그의 구출자는 이미 파수꾼들을 지나쳐서 감옥을 빠져 나간 상태이다. '베드로의 구출'이라는 수수께끼와도 같은 이 주제에 대해 능숙하게 변용된 장면들은 전체적으로 연결된 본래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현존하는 같은 크기의 몇몇 그림들에서 이러한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마치 연속되는 이야기를 보듯이 관람자는 감옥 을 빠져 나와 길을 가던 천사와 사도를 따라가게 된다. 화가는 비슷한 풍경의 건축물에 대한 작품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후에 화가 스스로 그 작품들에 인물들을 첨가하였거나 다른 화가를 통해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Bacchus, 1648 얀 판 달런(Jan van Dalen:1620 이전-1653 이후) Baroque Flemish Painter
    술의 신, 디오니소스 또는 바쿠스. 그는 인간에게 포도 재배 방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포도주를 마시며 황홀경 속에서 고단한 일상을 망각하도록 했다. 그림 속의 젊은 바쿠스를 보니 술 좋아하는 풍모가 역력하다. 담쟁이 넝쿨로 만든 화환을 쓴 채 포도주 잔을 들고 있는 그의 얼굴 표정은 즐거움 그 자체다. 담쟁이 넝쿨과 포도 나뭇잎은 옛 부터 바쿠스의 상징이었다. 거나하게 마셨는지 두 볼이 발그스레하고 눈은 약간 풀어진 듯하다. 바쿠스는 포도주와 풍요를 관장했지만 그를 숭배하지 않는 자는 참혹하게 다스 렸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의 얼굴엔 심술궂은 성격도 엿보인다. 전체적으로 바쿠스의 이상적인 모습이라기보다는 17세기 네덜란드의 초상화 전통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얀 판 달런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아마도 얀 판 달런 1세(Jan van Dalen I:Flemish, c.1620-c.1653)의 아버지로 추측되며, 1632-33년 사이 안트베르펜에서 다비트 더 미델라르(David de Middelaer)의 제자로 있었다. 1640-41년에는 안트베르펜 루카스 화가 조합의 독립 마이스터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작품 들은 양식상 안톤 반 다이크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Cimone and Efigenia(시몬과 에피게니아), c.1617 피터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 Baroque Flemish(Antwerp) Painter
    화려하고 역동적이고 위풍당당한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루벤스의 대작 이다. 종교화, 신화화, 초상화 등 어떠한 장르도 대가다운 필치로 소화했던 루벤스가 문학 작품인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작품의 소재를 취했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 나 방탕하여 시골 농장으로 쫓겨 가 살던 시몬이 아리따운 에피게니아의 잠든 모습을 우연히 본 순간 첫눈에 반하는 장면이다. 후에 시몬은 맘잡고 열심히 공부해서 결국 에피게니아와 결혼에 성공하게 된다. 루벤스의 일차적인 관심은 불그스름한 볼과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인의 육감적인 신체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인의 신체 표현은 전성기 루벤스 작품의 트레이드마크이다. 시몬을 보고 겁을 집어먹었다는 보카치오의 원작과는 달리 에피게니아는 결이 고운 비치는 옷을 걸치고 살짝 눈을 떠 요염하게 시몬 을 훔쳐보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 주변에 그려진 앵무새는 사랑을 상징하고 꿩은 품행이 바른 사람들 사이에서 호의의 표식이며, 작은 개는 믿음을 나타낸다. 한편 이빨을 드러낸 초록새 긴꼬리원숭이는 어리석음을, 돌고래는 민첩하게 준비가 되어 있지만 참을성 없는 사랑, 즉 순식간에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시몬을 의미한다. 17세기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궁정화가였던 루벤스는 이탈리아, 플랑드르, 스페인, 영국 등으로 불려다니며 수많은 작품을 남겼고, 생전에 최고의 명성과 부를 누렸다. 그의 작품은 역동적이고 강렬하고 화려한 바로크 미학의 지침서가 되어 전유럽에 유사양식을 만들어냈다.
죽은 레안드로스를 애도하는 헤로, 1640 힐리스 바케레일(Gillis Backereel:1572-1662)
    그리스 전설에서 비롯된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17세기와 18세기 유럽회화에서 다양하게 표현된 주제이다. 헬레스폰투스 해협 세스토스의 헤로는 아프로디 테의 여사제로 결혼하지 않을 것을 맹세했으나, 아바도스에 있는 해협의 맞은 편 바닷가 에 살고 있던 레안드로스와 사랑에 빠진다. 그는 연인 헤로에게 가기 위해 밤에 해협을 헤엄쳐가야 했으며 헤로는 밤마다 등불을 밝혀놓고 레안드로스가 그녀에게 오는 것을 찾을 수 있도록 했다. 어느 폭풍우 치는 날 밤, 레안드로스에게 길을 알려주던 등불이 꺼지고 그는 물에 빠져 죽고 만다. 다음날 아침 죽은 연인이 물결에 떠밀려 해안에 나타 나자 헤로는 절망한 나머지 바다에 몸을 던진다. 화가는 레안드로스의 시신이 바다로부터 밀려오고 헤로가 그를 애도하는 극적인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관람자를 사건에 관여하도 록 하기 위한 것인 양, 레안드로스는 앞쪽 그림의 가장자리에서 단축되어 그려져 있다. 헤로의 감상적인 얼굴 표정은 여러 겹으로 갈라져 격렬하게 움직이는 옷의 주름에서 보듯, 반 다이크의 강렬한 그림을 연상시킨다. 배경의 음침한 회색빛의 어둠은 이미 헤로의 자살이라는 이 비극적인 전설의 결말을 예고하고 있다. 이 작품은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의 소장품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갤러리에 동시대 플랑드르 화가들의 작품을 엄청나게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그의 네덜란드 조언자들은 자신들의 동시대 예술적 분야에 대한 정통한 이해에 기반하여 얀 판 덴 호에케, 다비드 테니에르 2세, 안톤 판 데르 바렌 그리고 힐리 스 바케레일의 질적으로 뛰어난 주요작품처럼 덜 알려진 예술가의 작품도 함께 수집하도록 대공을 설득하곤 하였다.
농부의 결혼식(농부의 즐거움), 1648 다비드 테니에르(David Teniers the Younger:1610-1690)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의 궁정화가였던 다비드 테니에르는 대담한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거친 농부들의 현장을 담은 경향에서 자신의 장르화를 발전시켜 더욱 퉁명스럽지만 그렇다고 결코 불쾌감을 일으키지 않는 농부들의 삶을 절제된 화풍으로 그려냈다. 현재 전시 중인 테니에르의 두 작품 <농부의 결혼식(농부의 즐거움)>과 <마을의 습격 (농부의 고난)>은 서로 대응하는 한 쌍으로 구상되어진 관계이다. <농부의 결혼식>의 전경에는 신랑신부의 반신상이 백파이프 연주자와 함께 크게 그려져 있으며, 신랑은 신부를 신혼의 침실로 이끌고자 한다. 한편 그림의 배경에서는 결혼식 피로연과 두 쌍의 남녀가 군무에 앞서 전통적인 스프링댄스를 추고 있다. 순수한 풍속화로서 농부의 결혼식을 긍정적이고 생의 기쁨으로 가득 차게 표현했다. 이에 상응하는 <마을의 습격>에서는 프랑스와의 '30년 전쟁' 중에 자비를 구하고 있는 노인 부부를 장전된 총으로 위협하고 있는 군인을 묘사하고 있다.
여행객 습격, 1644 필립스 바우어만(Philips Wouwerman:1619-1668) Baroque Dutch Painter
    필립스 바우어만은 동물화·풍경화·풍속화를 주로 그린 네덜란드 바로크 양식의 화가 이다. 그는 1640년대 자신만의 고유한 화법을 계발하여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말을 전문적 으로 그린 매우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산길을 지나던 여행자 일행이 강도들에게 습격당하고 있다. 총칼로 무장한 이들이 가축과 마차행렬을 장악한다. 필립스 바우어만은 작품의 구성을 위해 습격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을 선택했다. 즉 총이 발사되고 말은 뒷발로 곧추서 있으며 악당의 형상들은 화약먼지 속 에서 두드러져 보인다. 마부가 목숨을 걸고 헛되이 저항하는 동안 마차에 타고 있던 일행 은 경악하고 있다. 화면의 깊이감을 높이기 위해 전경에 있는 나무와 함께 그림 속에 대각선으로 놓인 구릉, 그리고 작가의 상징처럼 된 말 모티프는 1640년대 중반 화법의 특징적 면모를 드러낸다.
죽은 자고새와 사냥개, 1647 얀 페이트(Jan Fyt:1611-1661, Baroque Flemish Painter)
    나무 밑동에 죽은 자고새 두 마리가 놓여 있고 바위 뒤편에는 이를 지키는 사냥개의 머리 가 나와 있다. 왼쪽 멀리 수풀 너머로 대성당의 고탑과 더불어 안트베르펜의 실루엣이 보인다. 얀 페이트는 그의 사냥정물화와 동물화에서 안트베르펜의 대성당을 자주 묘사 하였다. 멀리 그려진 탑은 그리스도의 구원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와 대조되어 그림의 전면에는 죽은 사냥감들에서 연상되는 삶의 덧없음이 표현되어 있다. 안트베르펜에서 새 사냥은 모든 사회계층에서 일반적이었지만 호화로운 사냥만큼은 여전히 귀족들의 특권이었다. 이와 같은 작은 크기(38X61.5cm)의 사냥정물화는 주로 시민, 상인 계급을 겨냥하여 그려진 작품이었지만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은 얀 페이트의 많은 작품들을 소장하였다.
Georg Philipp Telemann/Concerto for Oboe, Strings & Continuo in F minor, TWV 51:f1, #1 Allegro
출처 : 비엔나미술사박물관展: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1)
글쓴이 : isado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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