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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비엔나미술사박물관展: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2)

은초록별 2007. 12. 8. 18:40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展
Seoul-Korea, 2007



Infanta Margarita Margarita Teres(1651-1673), c.1656
흰 옷의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1599-1660, Baroque Spanish Painter)

Section 4: 황제 레오폴트 1세(Emperor Leopold I:1640-1705)


Emperor Leopold I, 1701(미전시 작품)
    레오폴트 1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Emperor Ferdinand III:1608-1657)와 스페인 왕 펠리페 3세(Philip III)의 딸이며 자신의 사촌인 마리아 안나와 처음 결혼해서 낳은 둘째 아들이다. 1654년 7월 9일 형 페르디난트 4세가 예기치 않게 죽자 레오폴트는 갑작스럽게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 영토의 상속자가 되었다. 1666년 스페인 왕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와 첫 결혼을 함으로써 스페인 왕위 계승 자격을 획득했으나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1673년에 죽었다. 그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종결된 30년 전쟁 이후 등장한 첫 번째 황제로서, 1658 년 18세의 나이에 황제로 등극하여 50여 년간 재위했다. 그는 30년 전쟁으로 타격을 입은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종교적으로 카톨릭 진영 뿐 아니라 개신교의 제후들로부터도 신망 을 끌어냈고, 위기 타파를 위해 헝가리로 눈을 돌려 그곳의 영토를 확보하였다. 그로부터 본격적인 '바로크 시대'가 열렸으며 그의 두 아들(요제프 1세와 카를 6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위가 연이어 계승되었다. 레오폴트 1세는 정치적인 재건과 통합에만 힘쓴 것이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가가 소장해 왔던 미술품들도 통합 관리했다. 선대인 루돌프 2세와 레오폴트 빌헬름의 컬렉션을 한곳으로 모았고, 티롤계 합스부르크가 (家)에서 관리하던 인스부르크 갤러리도 접수했다. 체코 브라보의 독특한 <아우로라>도 인스부르크 궁정을 장식했던 작품이다.
Infanta Margarita Teresa in a Blue Dress, 1659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미전시 작품)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1599-1660, Baroque Spanish Painter) The Empress Dona Margarita de Austria in Mourning Dress, 1666 She was 15 years old in 1666.(미전시 작품) by Juan Bautista Martinez del Mazo/Museo del Prado, Madrid, Spain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강력한 스페인 왕 펠리페 4세(Philip IV)의 딸로 태어나 이미 두 살때 그의 삼촌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계승할 레오폴트 1세와 결혼하기로 약조를 맺었다. 유럽 영토 대부분을 차지했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땅을 물려줄 자손을 밀폐된 친족관계 내에서 양산해야했기에 이와 같은 근친결혼이 일반적이었다. 스페인에서 자라고 있던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스페인 궁정의 전설적인 궁정화가 벨라스 케스에 의해 3세, 5세, 8세 때의 모습이 그려져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레오폴트에게 보내졌다. 1666년 마르가리타가 15세가 되던 해 결혼할 때까지 스페인 왕실은 정기적으 로 그녀의 초상화를 합스부르크 왕실로 보내야 했다. 작품 <흰 옷의 어린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은 5세 때의 모습으로 벨라스케스의 유명한 <시녀들:Las Meninas, 1656-1657>에 등장할 때와 의상 및 양식에서 거의 일치한다. 벨라스케스는 황녀의 지위를 알려줄 어떠한 장신구도 걸치지 않은 마르가리타를 묘사했 고, 후에 인상주의자들이 그토록 감탄했던 '회화적' 붓터치를 한껏 과시하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면 화면은 그저 불분명한 선들과 얼룩진 색의 자유로운 배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약간의 거리를 두고 관찰할 때 비로소 흰색 원피스의 주름과 재질감 그리고 장식 의 통합적 구조는 놀라우리만치 생생하게 살아나는 것이다.
황제 레오폴트 1세가 영지를 성 요셉의 보호 아래 두다, 1690년경 작자 미상(오스트리아인 화가)
    황제 레오폴트 1세는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과 대를 이을 후사가 없음에 대한 근심으로 1675년 오스트리아의 영지, 1676년에는 신성로마 제국을 성 요셉의 특별한 보호 아래 둔다. 이것으로 성 요셉은 '신성로마 제국의 절대 보호통치권자'로서 마리아 다음가는 제국의 성인이 된다. 예수의 '양부'인 성 요셉에 대한 합스부르크가의 특별한 숭배는 황제 페르디난트 2세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바이센베르크에서의 승리에 대한 기념 으로 1621년 요셉의 날을 국경일로 공포한 바 있다. 1678년 황제 레오폴트 1세는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을 얻게 되자 그에게 요셉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바로 황제 요제프 1세이다. 또한 1683년 12월 12일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비엔나가 승리한 것 역시 성 요셉의 공으로 간주되었다. 옆모습으로 그려진 레오폴트 1세는 성 요셉의 출현에 무릎을 꿇고 있고, 성 요셉은 축복하는 아기예수를 황제 쪽으로 내밀고 있다. 레오폴트 1세 왼쪽에는 오스트리아 대공을 상징하는 모자를 쓴 젊어 보이는 인물이 있는 데 그 인물은 다음 황제 요제프 1세를 나타낸 것이거나 오스트리아 대공 직위를 의인화 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오스트리아 출신 으로 추정된다.
The incredulity of St. Thomas(의심하는 도마), 1656/1660 마티아 프레티(Mattia Preti:1613-1699,) Baroque Italian(Malta) Painter
    예수가 부활 후 제자에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 때 도마가 스승의 부활을 의심하자 옆구리의 상처를 만져보게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카톨릭 지역의 바로크 화가 들에게 특히 흥미롭게 느껴졌다. 이 주제로 화가는 기적을 일으키는 종교의 힘을 과시할 수 있었고, 또한 상처와 고통의 표현을 통해 관객의 감정이입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통상 카라바조 화파로 분류되는 바티아 프레티는 한 때 카라바조가 그린 것처럼 거의 '자연주의적'이라 할 만큼의 끔찍한 사실성을 작품에 부가한다. 예수의 상처에 인정사정 없이 손을 찔러 넣는 도마는 찡그린 표정으로 놀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오른쪽의 인물은 예수의 손에 난 상처를 뚫어져라 들여다본다. 관객에 등을 돌린 인물의 뻗은 손은 '놀람'의 극적 표현이다. 주변의 이러한 동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예수는 순교의 동작으로 초연하고 온화한 얼굴빛을 유지한 채 관객을 응시한다. 순간의 포착, 인공적이고 극적인 조명, 강렬한 명암대조, 화면 바깥의 공간으 로 침투하는 인물의 동작, 관객으로 하여금 격렬한 감정적 동화를 유도하는 주제 등의 특징은 모두 바로크 회화의 전형적인 요소들이다.
수호신들에게 둘러싸인 아우로라(Aurora), 1659년경 프란체스코 몬텔라티치(Francesco Montelatici:1607-1661/Cecco Bravo) Baroque Italian Painter
    작품 속의 주인공은 아침노을의 여신인 아우로라(또는 에오스)다. 아우로라는 옷을 벗고 아름다운 베일로 몸의 일부를 가린 채 귀여운 아이들과 함께 공중을 날아다니며 꽃과 진주 비를 떨어뜨리고 있다. 세 아들(바람의 신 제피로스와 보레아스, 노토스)은 그 주위에서 뺨을 한껏 부풀려 바람을 불고 있다. 꽃과 함께 비처럼 쏟아져 내리는 진주는 아침이슬과 눈물을 가리키고, 특히 화려한 꽃은 여신이 세상에 나누어주는 색채의 선물 을 뜻한다. 이 그림에서 가장 눈길이 가는 부분은 아우로라의 투명한 베일이다. 마치 베일이 바람에 출렁거릴 때마다 화려한 색의 꽃들이 새롭게 탄생하는 것 같은 느낌 을 준다. 이것은 어둠이 물러가고 아침이 되었을 때 아침노을의 여신 아우로라가 이 세상에 또 다시 빛과 색을 선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 작품의 분위기는 깨끗 하고 환상적이다. 체코 브라보는 신화를 그림에 도입하는 데 있어 피렌체 르네상스식 은유를 차용하여 더없이 은은하고 감미롭다.
Saint John Baptist Explaining His Mission(세례 요한의 설교), 1643-1644 베르나르도 스트로치(Bernardo Strozzi:1581-1644) Baroque Italian(Genoa) Painter
    세례 요한이 종교지도자인 듯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오심을 증거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화가 베르나르도 스트로치는 제노바의 수도회에 들어가 교구 성직자가 되었고, 그 뒤로는 가난한 집안을 돌보기 위해 항구의 기술자로 일하다가 베네치아 공국으로 이주, 색감이 풍부하고 생동감이 넘치는 베네치아 회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화가이다. 당시만 해도 외지인이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탈리아 미술계를 자국인이 이끌었 던 것은 예외적이다. 스트로치의 예술적 특출함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그림에서 세례 요한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요한은 막대기를 쥐고 또 양털을 뒤집어쓰고 손을 펴서 이야기에 집중한다. 긴 머리에 수염,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는 요한을 나타낼 때 사용하던 회화적 전통이었다. 그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그 단서는 왼손에 쥐고 있는 두루마리에 있다. 거기에는 라틴어로 "Ecce agnus Dei" 즉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29)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세례 요한은 지금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요1:34) 하고 있는 것이다. 서양미술에서는 세례 요한의 설교 장면을 표현할 때 성경구절을 인용 하고 있는데, 이것 외에도 "Ego vox clamantis deserto" 즉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다"(요1:23)라는 구절을 인용하기도 했다. 풍경 앞에 있는 인물들은 관람자에게 가깝게 보이도록 비스듬히 비켜서서 대칭으로 나누 어져 있다. 세례 요한의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 민족과 율법학자들을 가리킨다. 스트로치는 타고난 이야기꾼답게 그들 사이에 모종의 긴장이 흐르고 있음을 전달하고 있다. 한 사람은 손을 허리춤에 대고 잔뜩 못마땅한 포즈를 취하며 눈살을 찌푸린다. 모자를 쓰고 있는 사람도 비슷하다. 그는 손바닥을 펴서 자신의 주장이 옳음을 장황하게 웅변하고 있으며 그의 얼굴 표정으로 미루어 그가 매우 완고한 사람이라는 것을 암시하 고 있다. 진리를 외치는 자와, 이를 애써 외면하고 심지어는 반박하는 자의 대립이 스며 들어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마치 연극 배우들처럼 행동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굽힐 기색이 없는 듯 보인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주의깊게 경청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중심축 에서 밀려나 있다. 화면 하단에 있는 어린이와 뒤쪽의 젊은이가 그들이다. '의심'의 논리로 무장한 자들은 세례 요한의 증언을 한사코 반박하고 있으나 들을 귀가 있는 자들 은 진리의 말씀을 일체 의심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성행하던 르네상스의 화풍과 달리 그림 배경에 나무와 숲을 넣어 실재적 사실감을 살리고 있으며 게다가 색감도 화려해 그림의 풍부성을 더해 주고 있다. 내용 면에서도 루벤스의 과장됨, 카라바조의 드라마적인 요소, 라파엘로의 지나친 미화 없이 평범 속에서도 긴장의 흐름을 잃지않고 있다. 이 작품에서 무엇보다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다. 종교지도자와 유대인들의 온고함과 의심에도 아랑곳 하 지 않고 세례 요한은 자신의 이야기를 중단하지 않는다. 불굴의 신앙이 그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한 가지 가치만을 숨질 때까지 소중하게 여기고 살아간 위대한 삶 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축복하는 야곱, 1692년경 요한 카를 로트(Johann Carl Loth:1632-1698, German Baroque Painter)
    1692년 60세의 나이로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던 뮌헨 출신의 화가 요한 카를 로트는 황제 레오폴트 1세의 궁중에 초청되었다. 따스하고 균형 잡힌 채광속에 묘사된 이 장면은 나이로 인해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된 고령의 야곱이 그의 손자들을 축복하려고 하는 (창세기 48:2-22) 순간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의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나이 든 아버지 가 그의 장자이자 야곱의 손자인 므낫세에게 축북을 베풀어 줄 것을 기대하면서 두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태어난 순서대로 야곱의 침대 곁으로 이끈다. 요셉의 부인인 아세 낫은 뒤편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다. 화가의 우선적인 관심은 나체를 묘사하는데 남다른 능력이 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림의 중앙에 배치시켜 꼼꼼히 묘사한 야곱에게 집중 되어 있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Orpheus and Eurydike), 1695/1705년경 조반니 안토니오 부리니(Givanni Antonio Burrini:1656-1727) Late-Baroque or Rococo Italian(Bolognese) Painter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죽자 오르페우스는 그녀를 명부(冥府:저승)에서 다시 이승 으로 데려오면서 명부의 왕 하데스에게 그곳을 빠져나가는 동안 절대 아내를 쳐다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이와 같은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해 부리니가 펼쳐 놓은 회화적인 해석에는 중요한 전환의 순간이 포착되었다. 즉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보고자 하는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여 그녀를 돌아보는 순간 겁에 질린 에우리디케는 다시 명부(그림 에서는 저승을 지키는 개 케베로스가 명부를 상징한다.)로 떨어지고 있다. 이 작품은 원래 황제의 총사령관인 사보이 오이겐공(1664-1736)의 겨울궁정에 걸렸던 장식용 회화였으나 1752년 이후 비엔나 황제의 전시관에 소장되고 있다.
Section 5: 카를 6세(Emperor Karl VI:1685-1740) Emperor Karl VI(미전시 작품)
    카를 6세(Emperor Karl VI:1685-1740)는 레오폴트 1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711년 형 인 요제프 1세(Joseph I:1678-1711)의 사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계승하였다. 한때 자칭 스페인 왕(카를로스 3세)으로 과거 카를 5세가 선포했던 강력한 제국의 재건 을 꿈꾸었지만 결국 이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스페인을 떠나야 했다. 하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이탈리아의 영토 일부를 얻었고,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헝가리 지역을 확보하는 등 제국의 성장을 위해 평생 야심차게 활동했다. 말년에는 맏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해 '국사조칙(國事詔勅Pragmatic Sanction)'을 발동 하여 딸에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야심은 합스부르크에서 소장하고 있던 예술작품의 관리에도 반영되었다. 그는 청년기부터 회화 수집을 시작했고(루카 조르다노의 <마리아의 방문> 등), 후기에는 특히 네델란드 회화에 관심을 두어 주로 렘브란트의 작품을 사 모았다. 무엇보다 그는 황제 소유의 회화 소장품을 모두 비엔나로 옮겨왔으며 레오폴트 빌헬름의 화랑이 있던 슈탈부르크에 바로크양식의 화려한 황제의 화랑을 신축하여 그림으로 빽빽이 채워진 거대한 갤러리를 조성했다. 어마어마한 제국의 부를 과시하는 데에 있어 예술작품과 건축물의 쓸모에 대해 누구보다 잘 인식했던 황제였다.
Titus Reading(책을 읽는 화가의 아들, 티투스), 1665년경 Rembrandt(렘브란트:1606-1669, Baroque Dutch Painter)
    렘브란트는 루벤스와 함께 바로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 손꼽히지만, 루벤스와 달리 생전의 삶이 영화롭지만은 않았다. 사랑했던 부인인 사스키아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4명의 아이들 중 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티투스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이 작품이 그려지기 10여 년전 이미 파산선고를 받아 렘브란트의 말년의 생활은 풍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위대성은 무엇보다 시대를 초월한 독창성에 근거한다. 유럽 남부의 바로크 미술이 카톨릭 종교를 기반으로 화려하고 풍요롭고 과시적이었을 때 렘브란트의 작품은 정반대로 알아볼 수 없을 만치 어둡고 내밀하고 조용하다. 그는 파산시기에도 의뢰인 없이 자신이 원하는 초상화를 그렸으며 자유롭게 자신의 독창적인 명암실험을 감행했다. 티투스는 적당한 길이의 곱슬머리에 챙 없는 모자를 쓰고 입을 약간 벌려 책을 낭독하는 순간이다. 은은한 빛줄기가 티투스의 이마에 직접 떨어지고 펼쳐진 책에는 반사된 빛이 표현된다. 어둠 사이에서 화면 전체를 감도는 빛은 물질성을 넘어 정신의 상태까지도 환기시키는 위대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한참을 들여다보아야만 서서히 떠오르는 형상은 마치 우리가 진리를 들여다 볼 때의 태도를 떠올리는 것이다.
마리아의 방문, 1696 루카 조르다노(Luca Giordano:1632-1705, Baroque Italian(Naples) Painter)
    <마리아의 방문>은 예수 그리스도 집안의 잉태한 두 여인,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녀 의 사촌이자 세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자벳이 만나는 장면을 묘사했다. 화면의 중앙에 푸른 옷을 입은 성모 마리아가 빛을 받으며 멀리서도 두드러져 보인다. 비록 마리아와 엘리자벳의 머리 위에는 후광이 표현되고 하늘에는 천사가 날고 있지만 주변의 광경은 마치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듯 자연스럽고 친근하다. 화면의 전경에 짐보따리를 내리는 듯한 인물은 사람의 눈높이보다 약간 높게 걸렸을 이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높이에 정확히 일치한다. 이 평범한 전경 인물을 통해 관객은 성경의 이야기가 내 눈 앞에서 실현되어 일어나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루카 조르다노는 나폴리 출신의 화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으며, 작품의 구성과 윤곽 표현 등에 있어 바로크 양식의 고전주의적 경향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이 작품은 조르다노가 스페인에서 예수의 가족 이야기를 그린 8점의 연작 중 한 작품 으로 추정된다. 당시 스페인 왕 카를 3세로 있던 황제 카를 6세는 1711년 비엔나의 궁정으로 옮겨가야 했을 때 이 작품을 함께 가지고 왔다.
Portrait of an Old Woman(늙은 여인), 1721 발타자르 데너(Balthasar Denner:1685-1749, German Painter)
    이 늙은 여인의 흉상는 서양 미술사의 정밀화 전통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여인의 얼굴에는 어떠한 붓자국도 찾아볼 수 없으며 수많은 주름과 노화된 피부조직, 심지어 땀구멍까지도 놀라울 정도로 정밀하게 표현되었다. 머리를 감싼 부드러운 천의 질감과 점박이 무늬가 들어간 모피의 재질감까지 모든 세부 하나하나가 접사렌즈를 대고 초점을 정확하게 맞춘 사진처럼 명확하다. 이 작품은 특정 인물을 대상으로 관찰 하여 그린 초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놀랍다. 합스부르크 출신의 화가 데너는 17세기 네덜란드의 헤라르트 다우(Herard Dou)의 계보를 잇는 정밀화가로서 18세기에 전유럽적인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정밀화는 회화사의 큰 흐름은 아니었으나 작가는 큰 명성을 누렸다. 이 작품은 황제 카를 6세의 요청으로 영국 주재 오스트리아 대사를 통해 4,700굴덴의 엄청난 가격으로 사들여졌다. 당시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 비견되는 명성을 누렸 으나, 18세기 후반 이후 회화의 흐름이 '보이는 대로'에서 '보는 대로'로 바뀌면서 이 그림의 인기는 사그라졌다.
Portrait of an Old Woman, 1720-1745(미전시 작품) Balthasar Denner/The Hermitage Musume, St. Petersburg, Russia 베들레헴의 영아살해, 1610/1615년경 알레산드로 투르키(Alessandro Turchi:1578-1649, Italian Baroque Painter)
    모든 복음서에는 예수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서술되어 있다. 마태복음(2:16~18) 을 보면 유대 왕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동방에서 온 세 명의 박사들 에게 전해 듣게 되자 베들레헴에서 두 살 미만의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라고 지시하였다 고 한다. 어린 예수는 주의 천사가 예수의 아버지 요셉에게 나타나 이집트로 도망갈 것 을 명함으로써 이 학살을 피할 수 있었다. 동판 위에 그려진 특히 색감이 매력적인 이 작품은 그 고유의 양식적 혼합을 통해 더욱 돋보인다. 투르키는 그림 표면에 선명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동판과 더불어 석판을 바탕으로 사용했다. 그는 이 그림의 구성에 있어서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의 동판화로 널리 알려진 라파엘로 의 유명한 <영아살해>, 즉 바로크 화가들과 관계있는 16세기 초의 고전적인 구성을 수용 하였으며 또한 이 잔혹한 사건을 동시대의 도시 풍경으로 옮겨왔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로마의 원형경기장의 아치와 성 스테파노의 원탑, 중앙에 있는 아카 데미아 필라르모니카의 팔라디오식 새 궁전, 1609년 착공된 브라 광장의 그란 가르디아 궁전과 같이 대부분 근래에 완공된 베로나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다.
Section 6: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Emperess Maria Theresia:1717-1780) Empress Maria Theresia(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1772 안톤 마론(Anton von Maron:1733-1808, Neoclassicism Austrian Painter)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황제인 프란츠 1세(Emperor Franz I:1708-1765)의 아내로서 황위 를 계승한 요제프 2세(Emperor Joseph II:1741-1790)의 어머니로 유명할 뿐 아니라 합스 부르크 영지의 실질적인 통치자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군, 재정, 행정기구의 개혁을 불러온 계몽군주의 전형적 인물로 추앙 받는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가 300여 년만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아닌 다른 가문이 계승하는 것을 보아야 했고, 주변 국가로부터 끊임없이 논란거리에 휩싸였다. 하지만 남편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 (Emperor Franz I)에 이어 1740년 오스트리아의 왕위에 오른 마리아 테레지아는 40년간의 재위기간 동안 군, 재정, 행정기구 개혁을 통해 근대적인 국가의 통합을 주도한 능력있는 여제로 평가받는다. 정치적 상황에 휘말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개인적으로 예술적인 것과 관계를 맺을만한 여유가 없었고 그래서 엄밀히 말하자면 예술에 대한 막강한 후원자도 탁월한 컬렉터도 아니었다. 하지만 건축과 미술을 궁정의 차원에서 관리해야 할 필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미 국제적인 궁정화가가 된 벨로토를 불러 비엔나의 풍경과 신축 건물들을 그리게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16명의 자녀(Marie Antoinette, Emperor Joseph II and Emperor Leopold II를 포함)를 낳아 10명을 성인으로 길러냈던 어머니로서의 마리 아 테레지아는 누구보다 자식 사랑이 끔찍했고, 유럽에 퍼져 살고 있던 손자들의 초상화 를 비엔나의 신축 궁전인 쉔부른 궁전으로 보내게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안톤 폰 마론은 이 작품에서 미망인의 의복을 입고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묘사하였다. 그녀는 열렬히 사랑했던 남편 프란츠 슈테판 1세가 1765년 세상을 떠나자 줄곧 이 옷을 입었다고 한다. 작품에서 단색조로 그려진 부분, 즉 '단호함으로 이룬 평화'의 화신이라 는 이미지를 통해 마리아 테레지아는 우의적으로 추앙받고 있다. 여기서 그녀의 유일한 장신구는 합스부르크가(家) 휘장의 여성용 팬던트인 별십자 휘장이다. 그녀의 발밑에 있는 '지벤뷔르거의 양탄자'만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한 색의 포인트다. 이 작품은 장식적인 요소가 덜 하고 무미건조하여 이전의 궁중 초상화의 화려함과는 구별 된다. 반면 수사학적인 초상화의 내용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통치자로서의 과제들이 강조 되고 있는데, 이러한 과제들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림에서 그녀는 자신이 즐겨 머물렀던 쉔부른궁의 공원 재정비에 관한 계획도를 손에 쥐고 있다. 이 작품은 비엔나미술사박물관의 소장품인 대형 초상의 초벌그림(55.5X26cm)으로서 1772 년 비엔나에서 그려졌다. 완성된 대형초상화는 1773년 로마에 있게 된다.
비엔나의 프라이융 남동부 풍경, 1758/1761 베르나르도 벨로토(카날레토,Givanni Antonio Canaletto:1697-1768) Baroque Italian(Venice) Painter
    비엔나 프라이융의 18세기 거리를 실경을 바탕으로 그린 풍경화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비엔나 재건 당시 총애했던 그래서 비엔나의 활기찬 풍경과 당대의 신축 건물들을 그리게 했던 궁정화가 벨로토는 18세기 유럽 유수의 궁정들을 돌아다니며 당대의 번창하는 도시 의 실경을 그려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이 작품에는 가운데 쇼텐교회를 중심으로 양옆에 오스트리아의 재상인 카우니츠가(家) 궁과 하라흐 공작의 궁이 보인다. 이 그림은 충분히 사실성을 담고 있기 때문에 20세기 말에 이르러 건축물을 바로크 시대 당시의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에도 좋은 참고 자료가 되었다. 저물어가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오래된 작은 집들이 즐비하고 그 앞의 광장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로 붐빈다. 천막을 친 노점상들은 약초를 내다팔고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도넛을 파는 행상인은 18 세기 말까지도 이곳에서 전을 펴놓고 있었다. 마부가 끄는 흰색 말들은 지금도 비엔나의 중심가에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안트베르펜에 있는 예수회성당의 내부전경, 1665 안톤 귄터 헤링(Anton Gunther Gheringh:1620-1668)
    1615-1621년에 예수회의 창설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는 안트베르펜에 성당을 축성했다. 이곳은 루벤스와 그의 제자들(예를 들어 반 다이크)에 의해 화려하게 내부 장식이 꾸며 짐으로 해서 순식간에 유명세를 탔다. 루벤스는 중앙제단용 회화 두 점을 기부하였으며 그 중에 하나가 헤링의 <성 이그나티우스 료욜라의 기적>이다. 회당의 오른쪽 측랑에는 마리아예배당으로 통하는 입구가 있는데 이곳에서 루벤스의 <성모 마리아의 승천>을 감상할 수 있다. 1776년 이후로는 두 개의 중앙제단용 그림 뿐 아니라 이 <성모 마리아 의 승천>도 비엔나미술사박물관의 소유가 된다. 1718년 7월 18일 화재로 인해 성당이 심하게 훼손되었고, 이때 루벤스와 그의 제자들이 그린 천장화 역시 함께 소실되었다. 성당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재건되었지만 예전의 그 장관을 다시 볼 수는 없었다. 이 작품은 1776년 안트페르펜에 있는 예수회 소속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아마도 1665년에 바로 이 수도원에 의해 주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값비싼 재료들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던 바로 그 성당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 담소를 나누며 느긋하게 거니 는 사람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성당은 오늘날보다 훨씬 큰 규모의 것으로서 그 당시 사회적 유대를 증진시키는 회합의 장소였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2세와 그의 누이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린 시절, 1768 안드리스 코르넬리위스 렌스(Andries Cornelius Lens:1739-1822) Rococo Flemish Painter
    1768년 월 12일 피렌체에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가 대공 피에트로 레오폴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비엔나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랫동안 염원하던 승계를 이을 남자아이의 탄생이라는 낭보를 듣게 된다. 그 후 몇 달 지나지 않아 마리아 테레지아가 항상 다른 손자, 손녀에 대해서는 그랬듯이 새로 태어난 어린 대공과 그 보다 한 살 남짓 위인 대공의 누이를 그린 초상화를 받게 된다. 생후 몇 개월 되지 않은 아기 대공 은 대공 직위의 관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낮은 쿠션의자에 앉아 있으며 그의 누이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공쪽으로 허리를 숙이고 있고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뛰어올라 의자에 발 을 걸치고 있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의 중요한 의고주의 작가인 안드리스 코르넬리위스 렌스의 청년기 작품임이 그의 서명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는 1739년 안트베르펜에서 태어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제부인 로트링겐의 카를 알렉산더의 궁중화가로 임명되어 1764년 이탈리아로 파견되었다. 로마에서 3년을 머문 후 그는 자신의 형제와 함께 1768년 나폴리, 피렌체, 파르마, 밀라 노를 거쳐 네덜란드로 돌아온다. 1768년 6월 중순부터 9월까지 렌스는 피렌체에 있는 대공의 궁정에 머무르면서 대공과 그의 부인, 그리고 두 자녀의 초상을 그렸으며,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768년 10월 18일 이 초상화는 비엔나에 도착하게 된다.
시빌레(Sibylle), 1640년 직후 조반니 안드레아 시라니(Giovanni Andrea Sirani:1610-1670)
    시라니의 시빌레(고대 그리스로마시대의 여자 예언자)는 귀도 레니의 작품 가운데 아르 테미스와 루크레치아 그리고 그 외 다른 고대 그리스로마 신화와 역사에 등장하는 여걸 들은 주제로 한 반신상들을 모범으로 하고 있다. 이 반신상들을 통칭하여 '레니의 시빌 레들'이라고도 한다. 이 작품은 1780년에도 귀도 레니의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으나 19 세기부터 조반니 안드레아 시라니의 화법으로 또는 그림의 모델이 된 그의 딸 엘리자베 스 시라니로 떠올릴 수 있다. 의자에 앉아 오른손을 턱에 괴고 시선을 밑으로 향해 책 을 읽고 있는 모습이 평온하다. 가슴을 살짝 드러낸 관능적 분위기와 독서를 하는 지적 인 분위기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이 그림의 두드러진 특징은 파스텔 톤의 부드러 운 색조이다. 배경을 이루는 커튼과 주인공 시빌레의 색조는 붉은색과 노란색 톤이고 붓의 터치 역시 매우 차분하고 조용하다. 17세기 중반 바로크시대의 그림이지만 격정적 인 바로크풍 그림과는 많이 다르다. 오히려 18세기 로코코 미술의 여성적 분위기와 많이 닮아 있다. 그래서 로코코 미술에 영향을 준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Section 7: 1780년 이후 현재 Emperor Franz II, 1832(미전시 작품) Friedrich von Amerling(1803-1887:Austrian Academic Painter)
    부흥과 위기를 반복적으로 겪었던 합스부르크 왕가가 결정적으로 몰락하는 계기는 1809년 나폴레옹의 비엔나 점령 사건이다. 이 때 대부분의 미술작품도 몰수되어 파리로 옮겨졌 다가 1815년 빈 회의 체결이후 다시 비엔나로 돌아오는 수모를 겪었다. 이 무렵 합스부르크의 지배하에 있던 16개의 영방은 탈퇴를 선언했고 당시의 황제 프란 츠 2세(Emperor Franz II:1768-1835)는 퇴위함으로써 유럽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 가문 은 단지 오스트리아 황제의 세력으로 축소된다. 그나마 명맥이 유지되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1914년 황세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로 시작된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와 더불어 1918년 마지막 황제 카를 1세(Emperor Karl I:1887-1922)에 의해 멸망이 선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왕정이 소유하고 있던 황제의 수집품은 오스트리아 공화국의 소유가 되었고 프란츠 요제프 1세(Emperor Franz Joseph I:1830- 1916)에 의해 이미 1891년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던 비엔나미술사박물관은 오스트리아 의 국립박물관이 되었다. 오늘날 박물관은 16세기 독일 회화(크라나흐, 알트도르퍼의 예처럼)와 같이 특정 시기 지역의 작품에 컬렉션에 초점을 맞추며 아주 조금씩 고가의 작품을 사들여 소장품의 구성을 조율하고 있다. 추가되는 수집품이 박물관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하지만 새로운 관객에 의해 끊임없이 새롭게 작품이 읽히고 평가될 때 박물관은 여전히 활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Franz Joseph I, Emperor of Austria, 1865(미전시 작품) Franz Xavier Winterhalt(1805-1873:German Eclecticism Painter) German Academic Classical Painter/Private Collection Woman Peeling Apples(사과를 깎는 여인), 1660년경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Gerard ter Borch:1617-1681, Dutch Genre Painter)
    테르 보르흐는 베르미어, 피터 드 호흐와 함께 17세기 황금기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화가 이다. 이들은 모두 중산층 가정의 실내를 즐겨 그려 '장르화(Genre Painting)'라는 새로운 유형의 작업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과시적이고 화려하며 감정을 자극하는 남부 카톨릭 지역의 바로크 미술과는 의도적으로 상반된 것으로 차분하고 고요하며 경건한 일상의 한 순간을 담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정물화에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과 상징적인 의미가 동시에 유입되는 네덜란드 풍속화의 다중적인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사과 깎는 여인>은 벽에 걸린 지도와 문틀로 경계 지어진 친밀한 분위기의 한 중산층 실내에서 한 아낙네가 조용히 사과를 깎고 있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그 옆에서는 깃털 모자를 쓴 아이가 동그랗게 뜬 두 눈으로 엄마의 집중한 얼굴을 쳐다 보고 있다. 작품의 의미는 실로 다양하게 해석되는데 아이들의 욕구에 성급하게 응하지 말 것을 훈계하는 당시의 네덜란드 속담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애도를 표시하는 여인의 검은 두건, 꺼진 촛불 등은 17세기의 전형적인 '무상함(Vanitas)' 의 도상이다. 작품의 의미가 어찌되었든 간에 모든 대상의 표면 하나하나를 지극한 정성 과 세심한 계산으로 그려내는 작가적 태도 자체가 이상생활에서 경건함을 발견하려는 바로크 시대인의 지혜를 읽게 한다.
정직함의 알레고리, 1665년경 카를로 돌치(Carlo Dolci:1616-1687, Italian Baroque Painter)
    작품의 이 인물을 순수의 비유라고 지칭하고 있다. 백합 또한 분명 그러한 의미이다. 또한 여성의 오른쪽에 꺼내 보이는 심장은 정직함, 즉 모두에게 보여지는 공개적인 종교 적 의미의 정직함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가슴 앞에 놓인 왼손은 구체적인 감정 표현에 대해 인정하고 있음을 표현한다. 돌치는 피렌체 출신의 화가로서 그의 종교적인 그림은 오늘날의 모던한 카톨릭 교회에서는 수용하기 곤란할 수도 있는 유형의 것이다. 즉 지나친 '감상'에서 기인한 색의 혼합, 공개적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관람자의 감정에 대한 공격적인 호소, 대상을 묘사함에 있어 세밀하면서도 관대하며 화려한 색의 사실주의, 빛을 발하며 영원히 썩지 않을 것만 같은 피부의 표현, 그리고 이러한 인물의 시공간을 초월한 무감함이라는 양식적 독특함은 돌치를 뛰어난 초상화가로 규정짓고 있다. 살색의 매끄러운 안료를 이용한 채색과 수사학적이며 화려하게 형상화된 정교한 주름의 모양은 1660년대 초반 돌치의 양식을 대표한다.
성모자, 1600년대 전반 알레산드로 투르키(Alessandro Turchi:1578-1649, Baroque Italian Painter
    이 작품은 개인 예배용 성화로서 개인의 사적인 종교생활을 위해 제작된 것이다. 그림의 주인은 이 성화 앞에서 기도할 수 있었고 또한 그래야만 했다. 반종교개혁의 시대, 즉 16세기 중후반과 17세기에는 카톨릭 교회가 트리엔트 공회의 결정 에 따라 미사 전례와 회화적 재현을 통해 신도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함으로써 신교도들 의 종교적인 책략을 좌절시키려고 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시기에 성모자에 대한 묘사는 다정하게 표현된 아이와 어머니의 친밀한 관계로 인해 전형적인 중세 후기 회화를 다시금 떠올리게 했다. 투르키는 이 작품에서 카라바조풍의 자연주의와 라파엘로가 그린 성모 마리아를 모범으로 하는 고전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양식적으로 융합해내고 있다.
벨사살 왕의 연회, 17세기 초 작자 미상(독일인 화가)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아라메라족의 왕 벨사살은 방자하게도 금과 은으로 된 성스러운 그릇들로 밤의 대연회를 벌인다. 이 성스러운 그릇들은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 렘을 정복하고 신전에서 가져온 노획품들이었다. 성스러운 잔에 술을 따라 우상들을 숭배 할 때 갑자기 벽에 손가락이 나타나 불꽃으로 글씨를 쓰는데, 궁정에 있던 선지자 다니엘 만이 이것을 해독할 수 있었다. 그림에 있는 "MANE, THETEL PHARES"라는 원래 성서에서는 '메네 데 겔 우바르신(Mene tekel u pharsin)'으로 그 내용은 벨사살 왕이 페르시아에 통치권을 빼앗기고 바로 그날 밤 죽을 것이며 메데인 다리우스가 권력을 장한다는 것이었 다. 성서에 나와 있는 이 연회에 대한 묘사(다니엘서 5-6장)가 그 역사적인 근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지 않다 해도 오만방자한 이교도인 벨사살이라는 인물상은 기독교에 뿌리를 둔 도상학 연구에서 신성모독과 신의 저주를 초래하는 비그리스도교적 행위를 의미한다. 이 그림의 대각선 구성은 1600년 이후 독일과 네덜란드 화가들이 수없이 복제되고 변용되 어 나타났다.
성 카타리나의 참수형, 1505/1510년경 알브레히트 알트도르퍼(Albrecht Altdorfer:1480-1538) Northern Renaissance German painter
    성인들의 전설모음집인 [황금전설]에 따르면 카타리나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학식 있는 왕녀였다. 그녀는 이교도 철학자들과의 논쟁에서 이들을 설득, 모두 기독교로 개종시켰고, 이때문에 황제 박센티우스에 의해 수레로 사지가 찢겨 처형당하는 형벌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신의 은총으로 수레가 불에 타고 형리의 하수인이 돌에 맞아 죽자 결국에는 참수 된다. 16세기 독일 화가 알트도르퍼는 풍부한 표현력으로 이 장면을 묘사했다. 형을 집행하기 위해 검을 든 형리는 당시 유행하던 보병의복을 입고 카타리나를 처형하 려는 순간에 있다. 오른쪽의 황제 막센티우스는 낙석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는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다. 그림 배경에는 이상하게 휘어진 나무들과 화염에 불타는 고문 기구가 보인다. 정확한 인체비례와 원근법, 사실적인 묘사는 화가의 관심이 아닌 듯 보인다. 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독특하기 그지없는 표현력은 독일 도나우 화파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관객에게 잊지 못할 강력한 인상을 전달하기에 충분하다.
롯과 그의 딸들, 1528 루카스 크라나흐(Lucas Cranach the Elder:1472-1553) Northern Renaissance German Painter
    롯과 두 딸의 이야기는 가장 빈번히 묘사되는 구약성서의 장면 중 하나이다. 환락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과 불로 심판할 때 그 성의 유일하게 의로운 자인 롯 은 주의 천사가 알려주어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피신한다. 롯의 아내는 그만 뒤를 돌아보다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만다. 롯과 두 딸은 산속으로 피신했고, 딸들은 인류의 후대를 잇기 위해 아버지 롯을 유혹하여 동침한다. 크라나흐는 전체 이야기 중 두 개의 장면을 하나의 화면에 통합했다. 배경에는 불타는 도시의 광경과 소금기둥이 된 아내를 두고 피신하는 일행이 보인다. 전면에는 포도주를 따르며 롯을 유혹하는 두 딸이 세밀한 필치로 그려졌다.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는 도나우 화파의 실제적인 창립자였고, 1505년부터 비텐베르크의 3명의 신교도인 작센 선제후들의 궁정화가를 역임했으며, 귀족으로 추대되어 1537년 비텐베르크의 시장까지도 역임하였다. 크라나흐는 마르틴 루터와 가까운 관계였으나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 추기경이나 황제 막시밀리안 1세 같은 카톨릭 주문자들을 위해서도 일하였다. 그가 다룬 소재의 범위는 대단히 폭넓었으나 그 중에서도 아담과 이브, 루크레티아 같은 나체의 인간을 표현한 것들은 그가 가장 즐겨 다루었던 대상이다. 그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탁월한 표현력과 독특한 색감, 인물의 심리를 드러내는 표정의 묘사, 지극히 정교한 디테일 처리를 통해 16세기 북부 유럽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Saint Michael Banishes the Devil to the Abyss, 1665/1668 악마를 심연으로 떨어뜨리는 대천사장 미하엘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1618-1682) Baroque Spanish(Seville) Painter
    미하엘 대천사장은 그리스도의 군장으로 변절하여 악마로 변한 동료들을 심연으로 떨어 뜨린다. 그래서 미하엘 대천사장은 반종교개혁 시대에 카톨릭 국가들에서 널리 애호되었 던 주제로, 신의 뜻을 받들어 세속의 이단을 처단하는 카톨릭 교회의 정당성이 미하엘 대천사장의 모습을 통해 투사되곤 했다. 어둠 속에 싸여 온몸을 웅크리고 있는 악마는 미하엘 대천사장이 가볍게 누른 발치에서도 두려움에 떨고 있다. 반면 미하엘 대천사장 은 환한 빛을 한 몸에 받으면서 눈부시게 화면에 등장하고, 특히 머리 위와 검을 든 손 에는 초현실적인 후광이 비친다. 옷을 휘날리며 이제 막 악마를 처단하려는 순간을 포착 하고 있지만, 천사의 표정만큼은 극도로 온화하고 차분하다. 안개에 싸인 듯한 신비한 분위기 속에서 악에 대한 선의 승리,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는 명확해 보인다. 강력한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 남부의 작은 도시 세비야에서 태어나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Francisco de Zurbaran:1598-1664, Baroque)과 함께 17세기 스페인의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사람이었던 무리요는 평생 대중의 신도들에게 감정적으로 친밀한 종교화를 그리는 데 헌신했다. 그의 고향 세비야의 카푸친 성당에 걸린 21점의 연작 중 그 첫 번째에 해 당하는 이 작품은 나폴레옹 전쟁 중 지브롤터로 이송되었다. 1814년 유실된 것으로 간주 되어 세비야로 돌아가지 못했다가 1987년 미술시장에 나온 것을 비엔나미술사박물관에서 구입했다.
카를루스 스크리바니(P. Carolus Scribani S.J.:1561-1629)의 초상, 1629 안토니 반 다이크(Sir Anthony Van Dyck:1599-1641, Baroque Flemish Painter)
    카를루스 스크리바니는 예수회 신부로서 남부 네덜란드 반종교개혁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반종교개혁을 지지하는 글과 칼빈교에 반대하는 저서를 집필했고, 주로 안트베르펜에서 활동하면서 루벤스가 제단화와 천장화를 그려 유명한 안트베르펜 예수회 성당의 건축을 진행했다. 1629년 종교인이면서 학자인 스크리바니가 죽은 해에 반 다이크는 30세의 나이로 안트베르펜 예수회 신학교의 청년 신도 모입에 가입해 있었다. 이미 초상화가로 서 명성을 얻고 있던 반 다이크는 유명한 예수회 성직자의 죽음을 기념하여 이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인물은 전형적으로 약간 몸을 틀어 3/4면을 보여주며, 근엄한 표정 으로 생각에 잠긴 듯 한 방향을 응시한다. 검은 의상은 풍성하고 굳건하며 단호하다. 탁자에 놓인 십자가상과 손에 쥔 책은 종교인이자 학자인 이 인물의 지위를 상징한다. 반 다이크는 대상 인물의 인격까지도 그려낼 수 있는 탁월함으로 인해 17세기 최고의 초상화가로 인정받았으며, 이 작품이 그려진지 3년 후인 1632년 런던으로 건너가 찰스 1세의 궁정화가가 되었다.
아벨을 애도함, 1656년경 필리프 드 샹파뉴(Philippe de Champaigne:1602-1674, Baroque French Painter)
    구약성서에서 아담과 이브는 인류의 조상이다. 그들의 아들인 카인과 아벨은 각각 농부 와 양치기였는데 신은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그의 아우인 아벨의 것만을 합당히 여기자 카인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동생 아벨을 살해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에 대한 부모의 슬픔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반면 샹파뉴는 죽은 아벨의 피투성이가 된 머리를 무릎에 올려놓은 이브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눈물을 닦아내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이브의 모습은 예수의 죽음으로 슬픔에 찬 어머니 마리아와 흡사하다. 아담은 똑바로 서서 슬픔에 찬 얼굴을 하늘로 향하고 손을 위로 뻗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에 있던 요한과 비슷한 모습이다. 슬픔에 잠겨있는 아담과 이브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유태교에 따르면 아담과 이브는 3명의 자녀가 더 있었다.) 아이들은 이브를 위로하거나 꽃을 따면서 새와 양들과 함께 뛰놀고 있다. 배경에는 형제가 제물을 올렸던 제단이 있고 저 멀리에는 헤매고 있는 카인의 형상이 보인다. 샹파뉴는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을 위해 1655/56년 브뤼셀에 머물면서 대형 크기 (312X394cm)의 <아벨을 애도함>을 그렸고, 이것은 오늘날에도 비엔나미술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작품은 모델로(Modello:대형 작품을 그리기 전에 의뢰인에게 견본으 로 보이기 위한 작은 그림)인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일종의 스케치로서 의뢰인이 그림 의 완성본에 대해 미리 상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대형 작품의 구성과 비교해 볼 때, 이 작품에서는 아벨의 양치는 개가 빠져 있는데 반해 완성판에서는 개가 죽은 주인을 향해 있고, 아담과 이브는 몸에 털가죽을 두르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오늘날까지도 그 다양한 판본들을 개인이 소장할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아 왔다.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 전시관의 소장목록에는 이 작품의 완성판만이 언급되어 있 으며, 1970년이 되어서야 체르닌전시관으로부터 모델로를 구입하게 되었다.
Georg Philipp Telemann/Concerto for Oboe, Strings & Continuo in F minor, TWV 51:f1, #3 Vivace
출처 : 비엔나미술사박물관展: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2)
글쓴이 : isado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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