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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展 - <만종>과 거장들의 영혼(1)

은초록별 2007. 12. 8. 18:49



Musee d'Orsay展
Seoul-Korea, 2007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은 본래 기차역이었던 루브르박물관과 마주 보는 건물이었다. 오르세미술관의 전신 '오르세 역(驛)'은 파리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시내 중심지의 열차 종착역으로 건설되었다. 파리국립미술학교 건축학 교수였던 빅토르 랄루의 설계로, 본래 오르세 궁전 부지였던 곳을 국가로부터 불하받은 철도회사는 부유한 승객, 고급스러운 시가지에 어울리는, 안락하면서도 화려한 건물을 원했다. 랄루는 화려한 석조물로 장식한 대담한 철골 구조의 건물을 설계했고, 세부 장식은 화가와 조각가들이 맡았다. 오르세 역(驛)은 2년여의 공사 끝에 1900년 7월 14일 문을 열었다. 이 건물이 역사로서 기능을 다한 것은 1939년이다. 철도 기술의 발전으로 더 이상 활용 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이 건물은 포로수용소나 영화 촬영장 등으로 이용되었 다가, 이 자리에 초대형 호텔을 건설하려는 재개발 계획에 따라 영원히 사라질 위험에 직면하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부터 이 건물을 미술관으로 만들자는 논의가 시작됐 고, 1986년 12월 마침내 오늘날의 오르세미술관으로 문을 열었다. 19세기말 건축양식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역사(驛舍)가 19세기 미술의 요람으로 다시 탄생한 것이다. 오르세미술관은 1848년부터 1914년까지의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특히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많은 그림들을 소장하고 있어 '인상주의 미술관'으로 불린다. 소장품의 규모 에서는 루브르박물관에 떨어지지만, 인상파 대표화가들의 우수한 대표작만을 소장하고 있는 오르세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인상적인 미술관으로 손꼽히고 있다.
    2007년 4월 20일부터 9월 2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오르세미술관 한국 특별전'이 열린다. 오르세미술관의 소장품이 한국에 선보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 다. 첫 번째 오르세미술관 한국전은 2000년 10월부터 넉 달간 덕수궁 미술관에서 '인상 파와 근대 미술'이라는 주제로 열려 3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끌어들였다. 7년 만에 열리는 오르세미술관 한국전에는 회화 44점, 사진 30점이 선보인다. 1839년 사진술의 등장과 발전이 기존 예술 분야에 끼친 영향 또한 같은 맥락에서 살펴 볼 수 있는 기회이다. 전시 작품으로는 좀처럼 해외 전시가 허락되지 않는 최고의 걸작 인 밀레의 <만종>을 비롯하여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 <제비꽃 장식을 단 베르트 모리 조>, 인상주의 대표화가인 클로드 모네의 <옹플뢰르의 눈 덮인 길 위의 수레>,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리, 그리고 반 고흐의 <아를의 반 고흐의 방>, 고갱의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타히티의 여인들>, 세잔, 보나르, 뷔야르, 드니, 히브리어로 '예언자' 란 뜻의 나비파의 작품 등이 소개되고 있다.
The Angelus(만종), 1857-59 by 밀레(Jean Francois Millet:1814~1875/Natualism)
    19세기 말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여전히 농업에 종사했다. 일찍이 산업혁명이 태동한 영국 은 유럽 국가들 가운데 가장 먼저 농업 문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점차적으로 유럽 전역에 도시화가 확산되었다. 그러나 조상 대대로 이어온 농촌 생활은 그 열악한 생활환경에도 불구하고 전통과 가치가 살아 있는 '잃어버린 낙원'처럼 여겨졌다.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1814~1877)나 장 프랑수아 밀레(Jean Fran- cois Millet:1814~1875)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은 바로 이런 이미지를 그려내고자 했다. 이들은 농사 짓는 농부의 모습을 즐겨 그렸으며, 특히 밀레는 농부의 모습을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기념비적 성격과 영원성을 부여했다.
Gala and The Angelus of Millet Before the Imminent Arrival of the Conical Anamorphoses, 1933(미전시 작품) 갈라와 밀레의 <만종>. 원추형의 아나모르포스가 긴급한 도착을 알린다 by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1904~1989/Surrealism)
    밀레의 <만종>은 서양미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로서, 끊임없이 모사되고 풍자되고 다양한 형태로 복제되어 왔다.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도 찬양해 마지않았던 이 작품은 19세기 최고의 예술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작품의 유명세로 인해 지금은 '만종의 평야'라고 불리는 바르비종 부근의 샤이 평야 에 멀리 마을 교회에서 종이 울려퍼지고 두 사람은 일손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묵상을 하고 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예수의 수태를 예고하는 천사를 상기시켜주는 기도문을 외는 삼종기도를 드리고 있다. 삼종기도는 하루에 세 번 하던 일을 멈추고 성모마리아를 찬양하는 기도를 하는 예식이다. 이들의 밭 근처에는 쇠스랑과 바구니, 자루, 손수레 같은 농기구가 세밀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지만, 세부적인 내용보다는 그림 전체에서 풍겨져 나오는 웅장함과 차분함이 먼저 느껴진다. 이러한 느낌은 밀레의 독특한 화법과 더불어 크게 부각되어 그려진 인물의 모습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인 농부 부부는 마치 그림의 전경으로 분리된 것처럼 그려져 외로운 느낌을 강하게 주지만, 화폭 전체를 차지하면서 관람자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밀레는 이 작품에서 빛을 교묘하게 사용했다. 어느 늦여름 저녁, 들녘에 낮게 드리워진 빛이 농부 부부를 선명하게 비추고 있지만 얼굴에는 전체적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그림은 인물을 중점적으로 그렸다기보다는 농부의 노동이나 몸짓 그리고 신앙심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풍경화이기도 한 이 그림은 엄숙하면서도 아름다운 분위기를 통해 인물의 장엄한 느낌을 강조하고 있다. 광활하게 펼쳐진 샤이 평야는 무한함을 상징하는데, 동시에 마치 파도가 넘실대듯 구불거리는 땅은 아득히 멀어지는 지평선으로 이어져 바다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아마도 밀레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을 보냈던 그레빌에서 본 추억 속의 바다를 작품에 투영한 것이라 여겨진다.
The Fifer(피리 부는 소년), 1866 by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1883/Impressionism)
    <피리 부는 소년>은 오르세 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들 중 하나로 에두아르 마네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스페인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는 스페인에서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된 벨라스케스(Diego Rodriguez Velazquez:1599~1660)의 작품을 보고 커다란 감동을 받았다. 마네의 이러한 감흥은 팡탱 라투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벨라스케스의 작품은 너무나 뛰어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작품은 프라도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필립 4세 때 어느 유명한 배우의 초상화이다. 이 놀라운 회화는 아마도 사람들이 전혀 시도해보지 못한 새로운 작품일 것이다. 생기를 띤 남자가 온통 검은색 옷으로 차려입고 '배경'이 아닌 단지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
The Buffoon Pablo de Valladolid, 1635-37/Museo del Prado, Madrid(미전시 작품) by Diego Rodriguez Velazquez(1599~1660:Spain Baroque)
    거장 벨라스케스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마네는 자신의 작업실에 돌아오자마자, 벨라스 케스 작품과 유사한 분위기로 영웅적인 느낌을 실린 실물 크기의 초상화를 몇 점 완성 했다. 텅 빈 공간 속에 주인공만 홀로 있는 그림이었다. 당시 마네의 작업실은 파피니에르 병영 근처의 귀요트 거리에 있었는데, 황실 근위군의 소년 병사 하나가 마네의 그림을 위해 군복을 입은 채 포즈를 취해주었다. 마네는 회색을 바탕으로 한 매우 간결한 구도를 선택했다. 인물을 그릴 때 나타날 수 있는 풍속화 분위기를 배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마네의 작품이 <살롱전>에서 거부당하고 비평가들의 혹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에밀 졸라만 이 유일하게 마네를 옹호했다. 졸라는 1866년 5월 7일 [레벤느망]지에 <피리 부는 소년> 에 대해 무게를 실어 다루었다. "(중략)~ 올해 <살롱전>에서 거부당한 <피리 부는 소년>을 손꼽을 수 있다. 회색빛 바탕 에 소년 음악가의 모습이 돋보이는 작품이다.(중략) 소년은 정면을 바라보며 피리를 불고 있다. 이보다 더 단순한 기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 작품만큼 강력한 효과를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 속에서 뭔가 특별한 진실과 활력이 느껴진다. 한쪽 발에 중심을 두고 서는 콘트라포스토 자세를 취하고 있는 소년에게서는 안정감이 느껴진다. 발 뒤로 보이는 그림자는 소년의 발이 바닥에 닿아 있음을 시사해주기도 한다. 또한 소년의 앳된 얼굴과 대조를 이루는 정갈한 군복은 관람자의 시선을 강하게 잡아끈다. 흰색 멜빵에 달려 있는 금색 악기집은 어두운 색의 윗저고리와 붉은색 바지 위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Berthe Morisot Holding a Bunch of Violets, 1872 제비꽃 장식을 단 베르트 모리조 by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1832-1883/Impressionism) The Orchestra of the Opera(오페라좌의 관현악단), 1865 by 에드가 드가(Edgar Degas:1834~1917/Impressionism)
    에드가 드가는 음악 애호가들에게 둘러싸인 채 음악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다는 이유로 연주자들과의 만남을 즐겼다. 음악 마니아였던 그는 공연을 보고 난 후에 음악가와 발레 를 재현한 그림을 그리곤 했는데, 이 <오페라좌의 관현악단>은 작품에서 풍기는 사실성 때문에 오르세미술관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그림은 세 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다. 전경에는 관중과 오케스트라 박스를 구분하는 난간, 중앙에는 음악에 집중하고 있는 관현악단의 모습, 후경에는 무용수들의 무대가 있다. 드가는 모르는 음악가들 대신 자신의 음악가 친구나 음악 애호가 친구들을 모델로 해서 정확하게 그린 다음, 그 각각의 초상화를 한 화폭에 모음으로써 이 허구의 관현악 단을 완성했다. 그림 속 인물 중 파리 오페라극장에 실제로 소속된 음악가는 바이올린 연주자 제피랭 조셉 랑시엥과 장 니콜라 구, 콘트라베이스 연주자 알베를 구페, 그리고 바순 연주자인 데지레 디오, 이렇게 네 명뿐이다. 그들 주위로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는 사람은 화가인 알렉상드르 피오 노르망이고, 무대 쪽으로 몸을 향하고 있는 사람은 의사인 피요이다. 전경에 배치된 연주자들은 정확하게 묘사된 악기 덕분에 다른 사람들 보다 더 부각되어 보인다. 특히 연단 오른쪽에 있는 콘트라베이스 연주자는 관현악단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의 악기 끝부분은 시각적으로 연단과 발레 공연이 진행되고 있는 무대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관현악단이 있는 구역과 무용수들이 있는 구역은 회화 기법이나 색채, 빛, 배치 방법 등에서 서로 대립된다. 오페라에 실제로 소속된 것으로 추정되는 음악가의 초상은 사진처럼 정확하게 묘사된 반면 무용수들의 윤곽은 빠른 붓질로 희미하게 처리되었고, 빛이 환하게 비춰지는 무대 는 어두운 오케스트라 박스와 대조를 이룬다. 무용수들의 다리와 발레복이 무대 앞에 놓인 조명을 받아 환히 빛나며 관람자의 시선을 끌고는 있지만, 머리가 잘린 채 그려진 발레리나의 모습은 모티프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한 채 단순히 중심 소재에 끼워진 역할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면의 왼쪽 위로 보이는 귀빈석에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엠마누엘 샤브라에가 자리잡고 있는데, 오페라 관현 악단의 후견인으로 그려졌다.
Portrait of Marguerite de Gas(the Artist's Sister), 1858-1860 by 에드가 드가(Edgar Degas:1834~1917/Impressionism) The Cart;Snow-Covered Road at Honfieur, with Saint-Simeon Farm, c.1867 옹플뢰르의 눈 덮인 길 위의 수레 by 클로드 모네(Claud Monet:1840~1926/Impressionism)
    클로드 모네는 일찍이 '눈'이라는 소재에 매료되었는데, 그것은 노르망디에 머물며 아름 다운 눈 풍경을 여러 점 그린 쿠르베의 영향을 받았던 까닭이었다. 눈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눈 위에서 반사되는 빛의 변화를 연구해야 했다. 모네는 눈 덮인 길을 흰색으로만 처리하는 대신 색조의 미묘한 차이를 한껏 활용해 푸른 색의 반사광이 감도는 바닥을 무지개 빛으로 채색했다. 옹플뢰르에 있던 화가 뒤부르는 1867년 2월 2일 노르망디 해안에 머물던 부댕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네의 그림에 나타난 '적절한 눈의 효과'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 작품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 다. 모네에 따르면 이 그림의 배경이 된 곳은 트루빌 거리이다. 그림의 전경 왼쪽에는 생시메옹 농가의 눈 덮인 지붕이 보인다. 이곳은 모네가 '진정한 거장'이라 여기던 용킨트, 트루아용, 도비니, 코로, 쿠르베, 부댕, 바지유 같은 화가들 이 만나던 장소였다. 바지유는 르아브르 전시회를 맞이해서 발행된 1868년 10월 9일자 [르아브르 저널]을 통해 야외에서 모네와 만난 일화를 소개했다. 날씨가 그다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이란 소재에 매달려 작업하던 모네를 회상하는 이야기였다. "딱 한번 모네를 알아본 적이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고, 며칠 동안 계속해서 눈이 내려 통신이 거의 단절된 지경이었다. 온몸이 꽁꽁 얼어버릴 만큼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소형 난방기와 이젤을 들고 상의를 세 겹이나 껴입은 한 남자가 눈에 띄었다. 바로 눈의 효과를 연구하던 모네였다." 바지유의 이 기억 속에서 모네가 엄청난 추위에 도 불구하고 결국 완성해낸 작품이 바로 <옹플뢰르의 눈 덮인 길 위의 수레>일 것이다. 1868년 겨울, 모네는 에트르타 주변을 그리던 중 <까치>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당시 그가 바지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눈 풍경에 매료되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시골로 갈 거네. 그곳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고, 여름보다 겨울이 더 매혹적인 곳이지...."
La Pie(까치), c.1868-1869(미전시 작품) by 클로드 모네(Claud Monet:1840~1926/Impressionism) The Harbour at Argenteuil, 1872 by 클로드 모네(Claud Monet:1840~1926/Impressionism) The Corner of the Apartment, 1875 by 클로드 모네(Claud Monet:1840~1926/Impressionism) The Artist's Studio, Rue de la Condamine, 1870 콩다민 가에 있는 바지유의 아틀리에 by 프레데릭 바지유(Frederic Bazille:1841-1870/Impressionism)
    프레데릭 바지유는 1869년 12월 부모님께 보내는 편지에 "친구들과 함께 즐겁게 제 아틀 리에를 그렸는데, 그림 속의 제 모습은 마네가 그려주었습니다."라고 적어 보냈다. 바지유는 이 작품의 배경과 다른 인물들은 직접 그렸으나, 이젤 앞에서 팔레트와 붓을 들고서서 친구들로부터 <마을 풍경>에 대해 축하를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마네가 그려넣도록 했다.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인물은 에드몽 메트로로서, 그는 파리 시청의 직원이자 슈만과 바그너에 열광하던 교양 있고 재능 많은 아마추어 음악가였다. 반면에 그림 속의 다른 인물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바지유와 마네 곁에 있는 사람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친하게 지내던 조각가 겸 예술비평가 인 자카리 아스트뤽과 모네인 것으로 추정된다. 계단 쪽에 그려진 두 인물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으며, 혹자는 르누아르가 계단 아래에 앉아 있는 시슬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이라고 하기도 하고, 작가이자 예술비평가인 에밀 졸라가 르누아르와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든 둘 중 한 인물이 르누아 르라고 추정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바지유는 자신의 아틀리에를 르누아르와 함께 나누어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오른쪽 위로 모네의 과일 정물화와 르누아르의 작품이 그려져 있어 흥미롭다. 왼쪽 벽에는 바지유가 1868년에 완성한 <투망을 든 어부>가 보이고, 소파 바로 위에는 미완성작인 <화장>이, 그 위로는 <에그 모르트의 풍경>이 걸려 있다. 피아노 위쪽으로 는 몽펠리에 근처에 있는 바지유 가족의 집을 그린 <메릭의 테라스>가 보인다. '아틀리에'라는 공간은 19세기에 들어 그 역할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었는데, 아틀리에 가 더이상 교육의 장이 아닌 개인의 창작 공간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한가운데 초록색 의자 하나가 놓여 있을 뿐 아틀리에는 텅 비어 있다. 의자는 분홍색 소파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청색과 녹색, 검은색으로 된 잔잔한 색조에 활기를 불어넣어준다. 전망이 탁 트인 큰 창문 너머로는 파리의 건물들이 보인다. 같은 시기에 바지유가 모델로 등장한 앙리 팡탱 라투르의 작품 <바티뇰의 아틀리에>가 지나치게 부자연스러운 분위기로 표현되어 있다면, 바지유의 말년 작품 중 하나인 이 그림에서는 마치 일상의 한 장면을 정지시켜 놓은 듯한 자연스러움이 묻어난다.
An Atelier in the Batignolles(바티뇰의 아틀리에:Homage to Manet), 1870(미전시 작품) by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1836-1904) Landscape of Aigues-Mortes(에그 모르트의 풍경), 1867(미전시 작품) The Terrace at Meric(메릭의 테라스), 1867(미전시 작품) The Fisherman with a Net(투망을 든 어부), 1868(미전시 작품) La Toilette(화장), 1870(미전시 작품) Portrait of Renoir, 1867 by 프레데릭 바지유(Frederic Bazille:1841-1870/Impressionism) The Red Roofs(빨간 지붕, 시골 마을의 겨울 정취), 1877 by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30~1903/Impressionism)
    <빨간 지붕, 시골 마을의 겨울 정취>는 카미유 피사로가 즐겨 다뤘던 생드니 언덕의 풍경 을 그린 작품으로, 이 모티프는 이미 1867년경에 퐁투아즈의 비에이 드 레르미타주 거리 에 있는 집들을 그린 <생드니 언덕에서 바라본 풍투아즈>에서도 나타난다. 이 작품은 화면구성 방식이나 채색에서 고전적인 화풍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특히 다양한 톤으로 변화를 주면서 공들여 채색한 녹색 배경은 이런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후 1877년 겨울이 끝날 무렵에 완성된 풍경화에서는 훨씬 더 밝은 색채와 새로운 구성을 사용함으로써 이전의 풍경화와는 다른 화풍을 시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View of l'Hermitage, Jallais Hills, Pontoise, c.1867 생드니 언덕에서 바라본 풍투아즈(미전시 작품)
    작품 <빨간 지붕, 시골 마을의 겨울 정취>에서는 원근법을 적용해 후경으로 갈수록 모티프 들의 크기를 점점 작게 그려나감으로써 입체감을 살리는 동시에 풍경이 캔버스 표면 위에 서 평행하게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게 구성했다. 또한 피사로는 단순히 집에서 가까운 장소 에 나가 눈에 보이는 풍경을 무작정 따라 그리기보다는 작품에 <빨간 지붕, 시골 마을의 정취>와 같은 보다 세부적인 제목을 붙임으로써 일반적인 풍경화의 개념에서 벗어나 자신 이 묘사하고자 하는 부분을 강조하는데 주력했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경사진 지붕들은 진한 주황색에서 갈색의 색조를 띠며 화폭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은 화면 전경의 들판과 나무들을 후경의 생드니 언덕과 동일한 색조로 채색했기 때문이다. 그림 군데군데에는 물감을 두텁게 칠함으로써 빛이 분산해 반짝이며 붓터치가 떨리는 듯하 게 표현했다. 이러한 표현은 채색된 표면에 강한 힘과 변화무쌍함을 느끼게 한다. 피사로와 세잔은 1865년부터 동일한 모티프를 가지고 함께 작업했는데, 이 작품은 이 시기 에 완성된 것이다. 특히 세잔은 피사로의 작품에서 그 크기나 공간 배치 등을 종종 따라 그리기도 했으며, 세잔의 작품 <퐁투아즈 생드니 언덕의 과수원(퐁투아즈의 코트데뵈프)> 은 그 크기나 구성면에서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된 피사로의 <퐁투아즈의 코트데뵈프> 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세잔의 작품에 나오는 집과 지붕은 호리호리한 나무 기둥 에 가려져 있고, 색채 효과는 배경의 나무에 의해 제한적으로 표현되었다.
La Cote des Boeufs, the Hermitage, 1877/National Gallery, London(미전시 작품) by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30~1903/Impressionism) Boat in the Flood at Port-Marly, 1876 by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1839~1899/Impressionism) The Cradle(요람), 1872 by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1841-1895/Impressionism)
    베르트 모리조는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가한 유일한 여성 화가이다. 당시 비평가들에게 세잔과 모네의 작품은 공격의 대상이었던 반면, 모리조의 작품만큼은 언제나 호의적인 평을 받았다. "이 그림에서보다 더 사실적이고 부드럽게 표현된 어머니 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아이가 잠들어 있는 요람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고, 커다란 모슬린 천 너머로 발그레한 아이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친다."(장 프루베르, '회상':1874 년 4월 20일)이 장면에서 "종교적 사랑과 신성한 것에 대한 경외감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성모자상 이미지를 작품 속에서 세속적으로 변환시켜 놓았다."(실비 파트리, '1841 -1895 베르트 모리조':전시도록)고도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모리조의 언니인 에드마가 요람에서 잠든 딸 블랑쉬를 지켜보는 모습을 묘사 한 것이다. 모리조는 1870년부처 스승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마네의 영향을 받아 유화와 파스텔화 형식의 초상화를 선보였다. 마네는 모리조의 모습을 즐겨 그렸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이 초상화와 더불어 <발코니>가 있다. 이후 마네의 막내 동생인 외젠과 결혼 한 모리조는 1874년 살롱전을 포기하고 카푸친 대로에 있는 사진작가 나다르의 아틀리에 에서 별도로 개최된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어머니와 아이의 모습은 '성모자상'이라는 주제를 통해 오랬동안 회화의 전통으로 인식 되어 왔다. 하지만 성모자상이 갖는 신성함은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씩 퇴색되었고, 대신 가족의 이미지 혹은 친근감 등이 더욱 강조되었다. <요람>에서 보이는 대담한 구성은 마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베일은 외부로부터 아기를 지켜주는 장치로서, 아기를 향한 어머니의 애정과 보호의 감정 을 강하게 드러내준다. 세련되고 온화한 분위기의 분홍색과 푸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흰색 침대 시트를 둘러싸고 있는 모슬린 천과 어머니의 어두운 머리와 옷이 만들어내는 대조, 잠든 아이의 온화한 얼굴, 대칭을 이루는 어머니 손과 아이 손의 움직임, 수직과 수평의 강렬한 구성을 선과 색채를 통해 부드럽게 표현한 점 등은 모리조의 예술가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 회화 작품의 걸작 가운데 하나로, 지나치지 않은 유려한 붓터치에서 섬세한 감수성이 느껴진다.
The Balcony(발코니), 1868-69/오르세미술관, 파리(미전시 작품) by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Mme. Pontillon, 1871(Pastel)/루브르박물관, 파리(미전시 작품) 화가의 언니, 에드마 퐁티용의 초상 Charlotte Dubourg(샤를로트 뒤부르), 1882 by 앙리 팡탱 라투르(Henri Fantin-Latour:1836-1904/Realism)
    앙리 팡탱 라투르는 그의 부인 빅토리아와 처제 샤를로트 뒤부르를 모델로 하여 여러 차례 에 걸쳐 초상화를 그렸다. 현재 리옹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1877년 작 <독서>에는 책을 읽는 빅토리아의 모습과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샤를로트의 옆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또한 1878년 [살롱전]에 소개되었던 <뒤부르 가족>이라는 작품에는 자매와 부모를 함께 화폭에 담기도 했는데, 현재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빅토리아는 정기적으로 [살롱전]에 그림을 출품하는 유명한 화가로서, 에드가 드가와 같이 회화 개혁의 선두에 선 화가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실제로 드가는 1866년에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빅토리아가 잘 알려진 화가인 반면에 그녀의 동생인 샤를로트 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독신녀이며 독일어 교수였던 샤를로트는 평생 팡탱 라투르 부부 가까이 살았지만, 단체 초상화 속에서 혼자 독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으 로 볼 때 강하고 독립적인 성격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모자를 쓰고 손에 부채를 든 채 외출복 차림을 한 여인의 포즈는 전혀 꾸미지 않은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다. 시선을 반대쪽 프레임 바깥을 향해 돌리고 있는 그녀의 몸은 빛과 그림 자 사이에서 비틀린 채 고정되었다. 팡탱 라투르는 의도적으로 그림의 밝기를 희미하게 처리했다. 반면에 무릎 위에 접힌 채로 놓여 있는 빨간색 부채나 왼쪽 손목을 덮고 있는 흰 레이스 소매, 검은색 모자 앞에 달린 꽃에서는 선명한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그림에 활기를 준다. 관람자의 시선은 이 색들을 따라 화면의 하단 왼쪽 모서리에서 상단 중심으 로 움직이게 된다. 이 섬세함은 마치 현대 회화를 보는 듯 세련된 느낌을 주며, 이러한 특징이 동시대에 주류를 이루던 과장되고 장황하며 화려한 초상화와 구별되는 점이다. 비평가 모리스 하멜은 [라 가제트]지의 1887년 6월호에서 팡탱 라투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샤를로트 뒤부르와 아돌프 쥘리앵의 초상화에는 묘한 슬픔이 베어 있다. 작품에 나타난 그의 뛰어난 자질과 섬세한 조화로움은 가히 존경할 만하다. 그는 모델을 완벽하게 표현했지만, 모델의 외관상의 특징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지나치 게 세세한 면까지 담아내려고 했다."
La Lecture(독서), 1877/리옹미술관(미전시 작품) The Dubourg Family(뒤부르 가족), 1878/오르세미술관(미전시 작품) Julie Manet, dit aussi L'Enfant au chat, 1887 줄리 마네-고양이를 안고 있는 아이 by 피에르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Impressionism)
    줄리 마네는 1874년에 에두아르 마네의 동생인 외젠 마네와 베르트 모리조 사이에서 태어 났다. 그 해는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했던 화가 몇 명이 각자의 예술 개념을 발전시키 며 인상파를 떠나려고 하던 때였다. 예를 들면 1879년에는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공식 미술계로 복귀하여 [살롱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르누아르는 새로운 선과 색채를 시도하 여 이른바 '앵그르 시대'라 불리는 화풍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베르트 모리조는 르누아르 의 이러한 변화에 관심을 갖고 에드가 드가나 스테판 말라르메와 함께 르누아르를 식사에 초대하곤 했으며, 1887년에는 이 새로운 기법으로 딸의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부탁했다. 르누아르는 이 초상화를 그리며 새로운 기법을 찾아내는 데 몰두했다. 데생의 정확성과 서서히 엷어지는 색조의 조화, 그리고 캔버스 표면 일부가 도자기처럼 정갈한 점 등을 보면 르누아르가 이 그림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신랄한 비평가 로 소문난 드가는 '르누아르의 인물은 얼굴을 지나치게 둥글게 표현한 나머지 마치 꽃병 을 그려놓은 것 같다."라고 했다. 드가가 보기에 루느아르의 시도는 선과 형태의 종합성 이나 오랫동안 장점으로 부각되었던 입체감 표현에 있어서 혁신적인 독창성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줄리는 어린 아이답게 무릎 위에 있는 고양이를 향해 애정 어린 손길을 주는 소녀일 뿐이다. 고양이와 반대쪽으로 기울인 소녀의 얼굴은 행복과 만족감에 젖어 있다. 소녀와 고양이의 얼굴은 화면에서 다소 왼쪽으로 치우쳐져 타원형으로 그려졌고, 오른쪽 아래 모서리에서 고양이를 감싸고 있는 소녀의 손을 지나 대각선이 이어지면서 작품의 전반적인 수직 구도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모리조가 사망하자 말라르메와 르누아르는 글과 일기를 써보도록 권했다. 줄리의 일기는 그녀의 부모가 젊은 시절을 함께 했던 말라 르메와 르누아르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Frederic Bazille at His Easel(프레데릭 바지유), 1867 by 피에르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Impressionism) Portrait of Claude Monet(그림을 그리는 클로드 모네), 1875 by 피에르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1841-1919/Impressionism) Une soiree(사교계의 밤), 1878 by 장 베로(Jean Beraud:1849-c.1935:Impressionism) *Cont'd* Mozart/Clarinet Concerto in A Major KV 622, 1악장 Allegro
출처 : 오르세미술관(Musee d`Orsay)展 - <만종>과 거장들의 영혼(1)
글쓴이 : isado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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