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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태석 - 자연이미지

은초록별 2007. 11. 24. 17:57




































 
 
형상의 언어적 기능성에 대한 새로운 탐구 ... 이재언(미술평론가)
 
- 중략 -
 
형식 탐닉의 증후군과 현실 참여의 외침이 서로 엉킨 모진 80년대를 넘긴 그의 작업은 89년을 전후하여 큰 변화를 일으킨다. 오늘날 전념하고 있는 <자연 - 이미지> 연작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단순한 방법과 대상의 변화만이 아니라 작가의 내면적 변화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가 자연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 심장한 것으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은 인류의 그림들에 무수한 영감이 원천이 되어왔으며 주된 표현의 대상이 되어왔으나, 오늘날 우리 인간이 자연을 대하는 태도는 전과 사뭇 다른 성질을 띠고 있어 보인다. 이제는 돌아갈 본향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보호되고 양생되어야 할 자연인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종결을 고하면서부터 급속도로 확산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작가가 인공 환경으로부터 자연으로 눈을 돌린 시점도 이와 어느 정도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머무는 자연은 <기차길> 시리즈에서 그랬듯이 피안의 것이 아니다. 그저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가 주목하고 있는 자연은 이미 과거의 자연주의에서 관심을 가진 일루진으로 환 원되는 것만도 아니며, 또한 모더니즘 회화에서 추구하였던 평면성으로 나타나는 것만도 아 니다. 여기서 그는 자연스러움 그 자체인 '자연'과 회화에서의 재현된 - 그래서 이미 부자연 스러운 - 자연 간의 괴리 때문에 심각한 망설임을 한다 '자연'의 모습과 이를 포착해서 화면으로 옮기는 과정은 자연을 아주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아이러니를 갖게 한다. 묘사를 하면 할수록 멀어지고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아득해지는 자연의 실체이다. 자연의 한 단면의 묘사가 아닌 자연의 느낌을 포괄적인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려는 내 노력은 결국 아주 부자연스러운 요식행위를 강조한다. (작가노트) . 이렇듯 존재하는 괴리 앞에서 작가는 새로운 방법의 모색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몇 가지 특이한 화면상의 특징을 갖추게 되는 그림으로 변모한다. 89년 있었던 <자연·이미지>전(수화랑)에 출품된 작품들은 대체로 단조로운 화면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브러쉬 기교가 직접된 대상의 묘사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이전의 <기차길> 시리즈에서는 보기 어려운 서정적이 화면 분위기를 짙게 드리우고 있는 것이 다른 점이기도 하겠지만, 고사(枯死)된 듯한 나무 기둥이 클로즈업되고 배경에 싱그런 숲의 이미지가 실루엣에 가까운 대비 상태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대비는 다름 아닌 예의 일루진과 평면성의 이원적 요소를 상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한편으로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새로운 시도가 그리 예사로운 화면만은 아니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화면 전경에 클로즈업되어 있는 나무 기둥은 오늘날의 환경이 안고 있는 암울한 운명을 시사하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은유적 표현이 화면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게 해주는 요소가 됨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바로 뒤이어 그의 화면은 새로운 방법의 모색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면의 다중적 분할의 방법과, 배경의 이미지가 철저히 평면성을 향해서 가는 것 등이다. 이는 어찌 보면 화면의 단순성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어찌 보면 미술사의 맥락 에서 시도되고 있는 한 방법이 탐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화면의 일원적이고 통일적인 화면을 구축하고자 하는 서구의 전통적인 방법에서 벗어나고자 함과 동시에 일체의 상이한 코드들이 합성되는 새로운 방법의 절충선상에 닿아 있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이미 종래의 극사실주의적 회화를 극복하고 새로운 형상의 세계로 이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어쨌거나 그의 사실적 회화는 몇 가지 일관된 사항에도 불구하고 서정성 회복과 자연의 빛 을 회복하는 가운데 추상적인 충동들이 넘실대는 그림으로 변환하고 있는 것이 역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시도의 배경에는 화면이 합성되거나 교배되는 시대 양식에 영향을 받은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자연관으로부터 오는 것이기도 한 것인데 그의 작업노트가 이를 잘 입증하고 있다.살아 숨쉬며 움직이는 자연의 모습을 순간적인 찰나로 포착하여 그냥 스쳐가듯 자연스러운 형상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지금 눈앞에서 보는 자연보다는 관념적인 자연의 모습이 더 자연스러워 보일 때가 많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그의 자연에 대한 재현이 여러 가지 시도를 통해 화면의 분할적 합성에 이른 것은 재현에서 오는 부자연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와 논리의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종적(異種的)인 것의 물질적 합성이 아니라, 동종적(同種的)인 것의 분할이며, 시간적 분절로 연속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대체로 분할된 화면이 형태면에서 상이하지는 않다. 단지 시간의 변화를 느끼기에 적절한 배경색조의 변화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재현의 결과로 오는 부자연성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은 자연의 관념적 형상화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이는 구체성과 일루전에 의한 재현에의 회의가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동양의 중요한 회화적 태도라 할 수 있다. 순간 순간이 온갖 생명운동으로 연 속되는 자연의 본질과 다양한 현상이 결코 고정적인 재현적 묘사에 의해 담아질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인상주의자들이 미의식 속에서 천명된 바 있는 것이다. (작가가 인상주의의 인식 에 가까이 있기는 하나, 방법적으로 달리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어법과 감수성 때문이라고 보고 싶다) 이러한 점은 화면의 분할 외에도 피스작업에 의한 실루엣 효과와 함께 현대적 감성에 어필하는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실제로 분할 화면의 배경으로 스며들어 있는 색조 는 시간의 변화에 따른 하늘의 색일 수 있지만, 다분히 도식적인 인공 조명 - 네온조명이나 무대조명같은 -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 이렇듯 그의 화면은 형식 속에 속박된 자연이 아 니라 감성의 조심스런 개진을 통해 다채로운 세계를 열어보이는 자연으로 충만한 것이라 말 할 수 있다. 이제 주태석의 그림세계를 통해서 본 우리의 극사실주의는 미국의 하이퍼리얼리즘과 확연 히 다른 궤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우리 작가들 가운데 주태석은 초기의 그림과 달리 최근 극적인 변신을 한 경우도 운위되고 있다. 그의 회화가 거두고 있는 성취는 역시 형상 이라는 자기 언어로 대중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감대를 일관성있게 추구하였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특히 그의 대상이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난해성이나 현학성 에 의해 대중과 유리된 현대회화의 허상을 지우는 데도 한 몫을 하는 것으로 평가될만하다. 대중문화 시대에 있어 대중들의 예술참여를 그들의 언어로 번안하여 인도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우리의 극사실주의를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비판하기도 한다. 즉 현대미술의 국제주의 연장선상에서 수용되고 있다거나, 혹은 물질문명에 대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미학적 맥락을 놓친 채 모방으로만 일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종래의 일루전이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매개로서 실천되는가에 있다. 이런 점에서 주태석의 작업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초기 <기차길>에서는 형상의 언어를 집요하게 추구함으로써 추상주의 미학으로만 경도되어 있는 화단의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80년대말 <자연 - 이미지>로의 변신은 쉬운 그림을 통한 접근 속에서 감각의 청량함과 세련된 미의식을 대중에게 공급한 것이다. 이제 작가는 보다 새로운 미의식과 감수성의 대중을 향해 자연의 빛과 향기를 전하고 있 다. 이미 그는 극사실주의의 끝 - 이미 극사실주의가 아닌 - 에 서서 진공상태의 우리 미술 을 위한 새로운 청사진을 준비해오고 있는 터이다. 70년대에도 어떤 이름으로 불러주어도 개의치 않았듯이 앞으로도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단지 형상의 언어, 그것이 그의 체질이며, 그것의 언어적 가능성 그것만이 가장 중요한 탐구과제일 뿐이기 때문이다.
 
출처 : 주태석 - 자연이미지
글쓴이 : 수선화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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