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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명화들(조선후기)

은초록별 2008. 1. 2. 08:12
 

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연당의 여인(蓮塘의女人)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비단에 수묵담채
규격 : 29.6 x 24.8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도회적인 멋을 풍기는 기생의 옷매무시는. 혜원의 풍속화를 통해서 많이 보아 왔다. 사실 혜원만큼 시정(市井) 남녀간의 애정. 그 중에서도 특히 기생들의 사랑이나, 생태 묘사에 열정을 솓은 화가는 드물다. 이 <연당의 여인>은 연못가의 별당 툇마루에 걸터앉아서 한 손에는 장죽. 다른 한손에는 생황(笙篁)을 든채, 잠시 생각에 잠긴 여인을 그린 것이며. 칠흑 같은 트레머리 끝에 살짝 비낀 자주빛 댕기가. 연꽃 봉오리와 조화를 이루어 단조로운 화면의 색조에 산뜻한 액선트를 주고 있다. 치마 밑으로 드러난 흰속곳의 묘사는, 이 화가가 즐겨쓰는 선정적인 표현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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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처네 쓴 여인(처네 쓴 女人)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비단에 채색
규격 : 27.7 x 23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신윤복의 풍속화 중에서 단연 백미는 앞서 소개된 30폭 퐁속화첩이다. 이들은 모두 같은 크기로 종이에 채색된 것들이다. 이에 필적할 만한 그림을 찾는다면 여기서 소개된 두폭이 포함된 6폭으로된 편화(片畵)들을 들수 있다. 이6폭은 모두 비단에 채색이 된것으로 이 가운데 간기(干紀)등 묵서가 있는 두 폭만을 소개한다. 처네 쓴 여인은 혜원 풍속화의 일반적인 형태인 배경속에 주인공을 등장 시켰는데. 화면을 비스듬히 사선으로 양분하여 흙담이 있는 기와집과, 한길을 나타냈고 화면 중앙에서 약간 왼쪽으로 걸어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렸다. 돌담너머의 기와집과 한길은 거의 같은 넓이를 화면에서 점하며. 여인과 오른쪽 하단에 적은 전몽적분약 맹추 혜원사 (㫋蒙赤奮若 孟秋 蕙園寫)의 2행에걸친 간기와 관서(款署)는 같은 크기의 공간을 점하여 마치 인물에 짝하여 나타낸 듯한 화면구성에 있어 놀라운 배치를 발견케 한다. 어찌보면 다소 쓸쓸한 분위기로 보여지기도 하는데. 혜원은 다른 풍속화의 예에서 두 여인을 등장시켜 젊은 아낙은 얼굴을 앞으로 하여 젖무덤까지 짧은 저고리사이로 노출시켜서 건강미를 보이고, 노파는 측면으로 해서 주름진 얼굴을 애써 감춘 것이 있는데. 이 그림에서도 공통된 의도로 보여지기도 한다. 더욱이 계절이 음력 7월의 맹추이고 보면 아낙의 나이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묵서의 점몽(㫋蒙)은 천간(天干)의 옛날갑자(甲子)로서 乙의 이름이며. 적분약(赤奮若)은 육십갑자에 있는 축(丑)의 별명으로 乙丑年에 해당되는바 즉 1892년에 그린것으로 사료된다. 혜원의 그림에 나타난 간단한 묵서들은 달필로 암시하는 내용도 詩的이어서 비록 화원이기는 하지만 詩文에 대한 만만치않은 교양을 능히 짐작할 만하다. 관서에 이어 주문방인(主文方印) 과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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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전모 쓴 여인(氈帽 쓴 女人)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비단에 채색
규격 : 28.2 x 19.1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앞에서 소개한 <처네 쓴 여인> 과는 여러면에서 대조적이다. 전혀 배경이 없은 것이 그 첫째이며. 우안팔면(右顔八面)으로 얼굴을 그렸는데 자신감 넘치는 자태로 앞으로 걸어가는 모습이 두번째 차이 이다. 수줍음이나 부끄러움은 아랑곳 하지 않는 표정에. 오른손에는 쥘부채를 쥐고서 걷는 보폭도 넓다. 조선여인의 아름다움을 그 누구보다 잘 나타낸 혜원은 이 분야의 그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르고 가는 필선으로 여인을 그리되. 치마 저고리의 각기 부풀고 착 달라붙은 모습이라든지. 모든 부분에서 몸체를 숨기는 고유복색이나, 이에 반해서 얼굴. 손끝. 발끝의 맵시가 사뭇 두드러진다, 그러면서도 결코 외설스럽지 않은 묘사에 해학과 멋을 홍건히 담고 있다. 짤룩한 허리에 부푼치마. 그 아래 보이는 속곳바지와 외씨버선이 잠긴 좁은 신의 가는 선 등은. 혜원이 그린 여인도에서 쉽게 발견되는 공통된 묘사이다. 또한 나이 짐작이 다소 힘든 애띤 얼굴에. 초생달 같은 눈썹과 순하게 생긴 둥근 얼굴과 코. 꼭다문 좁은 입 등 전혀 생소하지 않은 얼굴이다. 전모는 무늬가 없는 단순한 형태이나. 이와 대조적으로 전모끈을 길게 늘어뜨렸다. 이그림에선 주인공 한사람만을 그렸으되. 화면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 그루의 나무를 그렸으면 하는 위치에 전인미발가위기(前人未發可謂寄)란 제발을 의도적으로 적었다. 그내용을 그림과 같이 견주어 살필 때 이해가 쉽지 않다. 이어서 혜원(蕙園)의 관서와 백문방인. 신윤복인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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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송정아회(松亭雅會)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38 x 32.5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혜원은 지나친 내용의 여속도(女俗圖)를 그린다 해서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났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여속도의 전문화가였으므로. 그가 남긴 산수화는 많지 않은 편이다. 여기 소개하는 산수도 <송정아회>는 그의 몇 안되는 산수화 중에서 가장 뛰어난 수작(秀作) 이라고 할수 있다. 부드러운 담묵의 필선으로 그려 올라간 소나무들은 수려하기가 마치 여속도속의 늘씬한 미인들을 보는 듯하고. 죽림뒤로 자리잡은 초당 속에 반쯤 걷어붙인 휘장 뒤로 비스듬히 상반신을 드러낸 인물이나. 초당을 찾아오는 긴 지팡이의 인물도. 모두 훤칠한 키에 구성진 몸매로 미끈미끈 그려져 있다. 솔숲과 대숲에 싸인 초당이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데. 비교적 강렬한 붓질로 보는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뛰어난 기교를 보이고 있다. 특히 화면 전체를 담청으로 훈염하다시피 한 뒤. 이와 큰 차이 없는 담담한 색조를 구사하는 듯하다가. 소나무 밑에서는 초묵(焦墨)에 가까운 음영을 드리워 단조로움을 깨트려버리는 대담한 솜씨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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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신윤복(申潤福)
아호 : 혜원(蕙園)
제목 : 묘견도(描犬圖)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38 x 32.5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혜원은 초상화로 유명한 신한평(申漢枰)의 아들이다. 그는 여인풍속도로 유명하지만. 산수화(山水畵). 영모(翎毛). 화조화(花鳥畵) 등에도 기량을 보였다. 묘견도를 보면 화폭 중앙 왼쪽에 커다란 괴석(怪石)이 비수(肥痩)가 심하고 빠른 붓놀림으로 묘사했는데. 묘선의 흐름이 거친 바탕의 효과와 함께 생동한다. 바위위에 한 마리의 검은 고양이가 잔뜩 웅크리고. 아래에서 꼬리를 흔들면서 올려다보는 개를 주시하고 있다. 이바위 뒤편에서 담묵으로 친 석류나무가. 오른편을 향해 뻗어 있는데, 석류 세개가 탐스럽게 달려있다. 그림 전경 오른쪽에도 괴석의 일부가 보이고 있어 여기서부터 개. 바위의 뒤틀리면서 움직이는 방향. 그리고 그 위의 고양이로 이어지는 대각선 구도를 석류가 깨트려 준다. 개나 고양이. 특히 개의 잔털 묘사가 잦은 세필에 의존 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영모도와는 달리 식물이나 석질(石質)의 묘선과 크게 대치되지 않고 어울림은 이 그림의 특징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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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정황(鄭榥)
아호 : 손암(巽庵)
제목 : 이안와수석시축(易安窩壽席詩軸)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25.3 x 57.2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정황은 호가 손암(巽庵)이며. 정선의 손자라는 사실만 전해지고 있는 데. 조부 정선에 비하면 격이 뒤지나 실경산수 및 풍속등을 소재로 한 그림들을 남기고 있다. 몰년이 밝혀져 있지 않으나. 여기 소개하는 이 그림을 통하여 적어도 50세 이상 생존했음을 알수 있다. 화면 상단엔 題 가 색을 달리하는 바탕위에 적혀있고. 좌우로 이어 단 바탕에는 6행에 걸친 그림의 내용을 소상히 알려주는 묵서가 있다. 그림과 글씨가 함께 조화되어 아취(雅趣)를 더한다. 일종의 기념사진과 같은 그림이 되겠는데. 남백종(南伯宗)의 회갑일에 문사(文士)를 초대하여 후원에서 벌이는 연회장면 이다. 오른쪽에 상하로 드리운 오동나무가 있고. 담장이 화면 상단에 닿아 있다. 왼쪽 상단에는 멀리 간략하게 나타내긴 했지만 상봉우리의 노송으로 인해 남산(南山)임을 알수있다. 인물들을 화면 중앙에 포치시키고 각기 다른 자세로서 다양한 모습을 잘나타내고 있다. 한단에 보이는 꽃나무들과 담장아래 놓인 괴석과 화분은 당시 사대부들의 운치를 엿볼수 있다. 문사들은 만수(萬壽)를 비는 축시들을 썼고. 여기에 이 그림을 포함하여 축(軸)으로 만든 것이였음을, 이 그림에 붙은 墨書 로 알수있다. 묵서는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역임하며. 시. 서. 화로 이름을 얻은 유한준(兪漢寯)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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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최북(崔北)
아호 : 호생관(毫生館). 삼기재(三奇齋). 거기재(居其齋)
제목 : 금강산표훈사도(金剛山表訓寺圖)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38.5 x 57.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최북의 처음 이름은 식(植)이고 자는 성기(聖器). 유용(有用). 칠칠(七七) 등을 사용했고. 호는 호생관(毫生館). 삼기재(三奇齋). 거기재(居其齋) 등 이었지만 호생관을 가장 많이 이용했다. 이 금강산표훈사도(金剛山表訓寺圖)는 금강산의 표훈사와 그 주위의 아름다운 경치를 그려내듯. 뚜렷하게 넓은 폭으로 전개하여 묘사한 작품이다. 일종의 평원산수법에 의해 내산과 외산을 거의 동일선상에서 묘사하고 있어, 이것은 마치 산으로 들어갈수록 멀리 있는 높은 산들이 오히려 낮게 보이는 시각의 착각 현상을 그대로 나타낸 작품이다. 조희룡의 호산외사(壺山外史)의 최북전(崔北傳)에 의하면. 최북은 중국 원말 사대가의 한 사람인 황공망(黃公望)을 아주 숭상하였다고 한다. 이 점에서 살펴보면 최북을 남화산수에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수 있지만, 실제로는 청조(淸朝)화단과 일맥이 통하는 자기 자신의 독특한 산수법을 유감없이 구사한 사람이라 할 것이다. 최북은 가문이나 출신은 물론 생년 몰년도 명확하지 않고. 한양의 객사에서 세상을 마친때가 49세였다. 최북과 서로 친분이 있는 동료 화가에는 김홍도(金弘道). 김득신(金得臣). 이인문(李寅文) 등이 있지만, 그의 화풍은 이들 동료화가들과는 아주 동떨어져 있다고 볼수있다. 수직 표현의 과장이나. 때로는 밀도가 없는 무기력한 묘사를 보여주지만. 대체로 자유분방한 필치로 야성적인 취향이 듬뿍 깃든 작품이 많다. 그는 한쪽 눈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림은 물론이고 어떤일에도 틀에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타인의 비평이나 칭찬과 비난에도 일체 관심을 두지않는 기행(奇行)과 주벽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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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최북(崔北)
아호 : 호생관(毫生館). 삼기재(三奇齋). 거기재(居其齋)
제목 : 조어산수(釣魚山水)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66.3 x 42.9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최북은 작품에 남긴 간기(刊紀)나 그와 교유한 인물들을 통해 활동연대 추정이 가능하며. 이들이 남긴 전기(傳記)나 제시(題詩)로서 최북 자신의 인간성. 그림에 임한는 자세. 그가 이룬 그림의 격조 등을 살필수 있다. 최북은 여러 분야의 소재에 두루 능했으며. 전래된 작품도 적지않다. 비교적 섬세하게 그린 실경산수화는 당시의 화풍을 대변하며. 사의적(寫意的)인 산수는 활달한 필치로 두드러진 개성이 보인다. <조어산수>는 광생(狂生)이라고도 불리었던 최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듯 대담하고 거친 필치. 빠른속도로 그린 간일한 구성. 담청 황색의 대조적인 설채(設彩)등, 중국에 있어서도 양주팔괴(揚州八怪)에 비견되는 그림이다. 화원임에도 불구하고 문인화(文人畵)에 방불한 격조와 의취가 담긴 수작(秀作)을 남긴 최북은 신분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인(藝人)의 긍지를 지니고 그림에 임했던, 조선시대에 흔치 않은 화가중의 한 사람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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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정조대왕(正祖大王)
아호 : 홍재(弘齋)
제목 : 파초(芭蕉)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84.2 x 51.3 cm
소장 : 동국대학교박물관

해설 : 정조대왕(正祖大王)은 조선 22대 왕으로 이름은 성(성).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아들로 서화(書畵)로 이름 높았다. 이 작품은 정조대왕의 대표작으로. 괴석(怪石)과 파초(芭蕉)의 기품있는 포치구성. 농담을 자유롭게 구사한 청수(淸秀)한 수묵효과. 그리고 점묘(點描)된 혼미점(混米點)에서 느껴지는 조화감 등이 모두 왕자의 그림다운 지체와 권위를 보여주는 秀作이다. 그는 활자의 개발. 인쇄술의 발달. 서적 편찬등 학문과 예술의 진흥에 힘을 기울여 문예중흥의 치적을 쌓았으며.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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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정수영(鄭遂榮)
아호 : 지우재(之又齋)
제목 : 청룡담(靑龍潭)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담채
규격 : 33.8 x 30.8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정수영의 자는 군방(君芳). 호는 지우재(之又齋)이다. 그는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이며. 증조부는 지리학자 정상기(鄭尙驥)인데. 이 증조부의 영향이 그에 대한 실경산수 이해의 배경이 된다. 명문의 후예이나. 관직을 외면한채 시. 서. 화를 스스로 즐기며 여행을 다녔다. 정수영은 조선 후기를 풍미한 실경산수에 있어 심사정(沈師正)이나 李麟祥 및 姜世晃과 같은 사인 화가로서 크게 중시되는 인물이다. 그의 현존하는 작품들은 실경산수가 주류이며. 그의 대표작은 무려 15미터에 이르는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과 청룡담이 속해 있는 해산첩(海山帖)을 들수 있다. 이 둘은 실제 탐승을 거쳐 제작한 것들로, 그가 이룩한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대변한다. 청룡담이 속해 있는 해산첩에 함께 게재된 동유기(東遊記)에 의하면. 1797년 가을 벗 여헌적(呂軒適)과 함께 금강산을 여행한뒤 1799년 봄에 제작하였다. 이 화첩은 모두 46면인데 대체로 2면이 한 작품이 되며. 청룡담처럼 1면만으로 한 점이 되는 것들도 있다. 그림이 23점이며. 이중 제일 먼저실린 것은 정수영이 아닌 다른 화가의 작품이고. 묵서만으로 된 것은 3점이다. 그림마다 장소 이름을 적었고. 개중에는 기행문이 적힌것들도 있다. <청룡담>은 이 화첩중에서도 백미로 손꼽힌다. 그림에서도 살필수 있듯이 정선의 영향을 읽을수 있는 각진 암산처리. 스케치를 거친 선묘위주의 고르고 분명한 윤곽표현. 생략에 의한 단순화와 성근화면구성. 담채의 묘에 의한 담백하며 밝은화면 등.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어엿한 자기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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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정수영(鄭遂榮)
아호 : 지우재(之又齋)
제목 : 백사회야유도(白社會野遊圖)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31 x 41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정수영은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서. 학문과 시예(詩藝)로 일생을 보냈던 듯 하다. 그의 화풍은 고씨화보(顧氏畵譜)나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를 통하여 南宗文人畵法 을 익히고. 정선의 眞景山水를 많이 따랐으며. 筆墨法에 있어서는 李麟祥의 영향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다. 이작품은 백사회첩(白社會帖)에 들어있는 일종의 계회도(契會圖) 내지는 시사회도(詩社會圖) 형식이다. 시회첩의 첫장에 실린 정계(鄭棨)의 서(序)를 보면. 서울 서문밖 북쪽에 장수한 시인. 묵객들이 많아 詩會 를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이 그림은 1784년 野遊會를 갖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그린 것이다. 세 그루 노송아래 갓과 도포차림의 노인 14명이 시를 지으며 모임을 갖고 있는 장면으로, 폭포를 바라보며 서있는 두 사람과. 뒤늦게 찾아온 두 사람의 설정으로, 구성상에 현장감을 돋보이게 한다. 정수영의 작품중 매우 짜임새 있는 구도를 보여주며. 이인상의 필묵법을 연상케 하는 각이 진 바위들과, 점채(點彩)한 개나리. 진달래꽃이 향토적 분위기를 한껏 풍겨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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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윤제홍(尹濟弘)
아호 : 학산(鶴山) 또는 찬하(餐霞)
제목 : 옥순봉(玉荀峯)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67 x 45.4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윤제홍은 자를 경도(景道). 호를 학산(鶴山) 또는 찬하(餐霞)라 하며. 정조 16년 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대사간 벼슬까지 하였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그림으로 산수화에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 이 그림은 지두화(指頭畵)이며. 그의 8폭 화첩중의 하나이다. 주제가 되는 옥순봉은 화면의 중앙 아래쪽에 배치하였고 그 좌우로 폭포와 원경을 나란히 묘사했다. 옥순봉은 대상의 간략화에 의한 추상화가 엿보이며. 농담으로 변화를 나타내고 있다. 그 왼쪽 아래로는 정자가 높은 기둥위에 의지해 옥순봉에 바싹 붙어 있고. 정자안에는 경치를 감상하는 인물이 난간에 기대어 있다. 그림을 왼편 위쪽에 써 있는 화제(畵題) 에서는 정자에대한 작가의 심정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내가 매번 옥순봉 아래서 노닐 때마다 적벽 아래에 정자가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까왔는데 근일에 능호관(㴰壺觀)의 화첩을 얻어 방하여 보니, 그것이 바로 이 그림으로, 나는 홀연히 아쉬움을 씻게 되었다” 왼쪽 상단에는 암벽사이로 흘러내리는 폭포가 있는데. 여기서도 역시 매우 간략히 묘사하고 있다. 농담과 굴곡으로서 바위의 거칢을 나타내었고. 그 중간중간에 태점을 찍어 풀. 나무 등을 묘사했다. 폭포 아래에는 덜렁하니 두개의 바위가 있을 뿐이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는 담묵으로 발묵(潑墨)한 안개가 아득해 먼산의 깊이를 더해 주고. 아래로는 인가들이 옹기종기 숲속에 모여있다. 옥순봉의 바로 오른쪽 옆으로는 서너 그루 나무가 자란 언덕에서 정자에 이르는 곳에 다리가 있고. 동자가 등짐을 지고 정자쪽으로 향해 가고 있다. 전체적으로 경치가 중앙과 하단에 펼쳐져 여백이 많으며. 담묵을 붓으로 번지게 하고 지두로 윤곽과 액선트를 줌으로서 문자향(文字香)을 표현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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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윤제홍(尹濟弘)
아호 : 학산(鶴山) 또는 찬하(餐霞)
제목 : 은사보월도(隱士步月圖)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67 x 45.4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이 그림은 봄밤. 달빛 아래를 소요하면서 자신의 감회를 나타낸 것이다. 화면 전경 우측에 초당이 시냇가의 제법 넓은 평지에 있는데. 앞마당에는 오동나무. 집 뒤에는 대숲이 둘러 있고 울타리 밖에는 키 큰 수양버들 두 그루가 시원하게 밤바람에 너울거린다. 대각선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얕으막한 잔교(棧橋)로 건너면. 바위절벽을 따라 벼랑길이 구불구불하다. 중경 우측에 둥그스름한 산봉우리가 그리 높지않게 솟아 있는데. 가운데쯤에 가느다란 폭포가 밤안개 속으로 절벽을 타고 쏟아진다. 더멀리 원산이 나지막하게 안개 위로 펼쳐지는데. 그 위에 조그마한 달을 아주 연한 담묵으로 홍운탁월법(烘雲托月法)을 써 그렸다. 모두 담묵을 번지게 해서 준법을 쓰는 가운데 지두(指頭)로 물상의 윤곽과 태점(苔點). 수엽(樹葉)을 찍어 조촐한 분위기가 감돈다. 역시 지두로 쓴 시는 “오동나무 가지사이로 달은 비추이고. 버들가지 끝에 바람 스치는데. 단장을 의지하여 봄밤에 소요하니. 과연 안락와(安樂窩)선생 같지 않은가” 이 시절을 당하여 가슴속의 기(氣)를 토해내면 반드시 우주에 가득차리라” 하니 이는 北宋때 성리학자 소옹(邵雍)선생의 은거생활을 자신의 복거(卜居)와 비유하는 야인(野人)의 경지를 말함이 아닐까? 화중의 선비가 윤제홍 자신이면서 또 소옹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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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신위(申緯)
아호 : 자하(紫霞),
제목 : 죽병(竹屛)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병풍 종이에 수묵
규격 : 127.4 x 53.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신위의 자는 한수(漢叟). 호는 자하(紫霞), 관은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시. 서. 화 삼절로 특히 묵죽에 능하였고. 4천여 수의 한시(漢詩)를 남겼다. 김정희(金正喜)와 친하여 청나라 옹방강(翁方綱)을 소개받아 교유하였고, 묵죽화를 강세황(姜世晃) 으로부터 배웠다. 이 그림은 8폭 병풍의 한폭으로 화폭 하단 우측 언덕에 바위 하나 의지하여 담묵으로 마디가 죽죽 뻗어올라간 두 그루의 대가, 아랫부분에서 서로 교차하면서 화면 위에까지 미치고 있다. 뒤에 서있는 대는 아주 연한 먹으로 잎을 쳤으나. 앞의 것은 농윤(濃潤)한 먹으로 그렸다. 마디마다 농묵으로 간략하게 두르고, 바위나 풀도 거침없이 흐르는 선조(線條)와 담묵준(淡墨皴)을 썼다. 대나무 위로 역시 담묵의 두 줄기 안개자락이 스친다. 마디가 길쭉길쭉하고 잎이 성겨 힘이 빠진 듯한 필치가 말년의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 왼편 공간에 다음과 같은 시가 써 있다. “사향묵(麝香墨)으로 그린 작은대숲. 아련한 안개자락 달밤에 비껴 찬데. 봄이와 작은 병풍 거두니 푸른창이 꿈속인양. 그 정취 상강(湘江)의 비안개보다 낫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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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재관(李在寬)
아호 : 소당(小塘)
제목 : 귀어(歸漁)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화첩 종이에 수묵담채
규격 : 26.6 x 33.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이재관의 자는 원강(元剛) 호는 소당(小塘)으로 그는 일찍이 아버지 를 여의고 집안이 가난하여 그림을 팔아 어머니를 봉양했다고 한다. 그는 구름. 초목. 나는 새 들을 잘 그렸으며. 초상화에도 뛰어나. 헌종2년 에는 태조의 어진(御眞)이 훼손된 것을 복원한 공으로 등산진첨절제사(登山鎭僉節制使)가 되었으나 이듬해 병사하였다. 이그림은 소당화첩(小塘畵帖) 중의 하나이다. 순백의 옥판선지 위에 담담한 수묵의 선과 점과 훈염(暈染)으로 이루어 졌으며. 화면의 요소(要所) 몇군데에 초점묵을 변화있게 찍어 산뜻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언뜻보면 중국적인 상념산수(想念山水)에서 파생된 어떤 분위기를 연상시키고 있지만. 주저없는 간결한 필치에서 오는 맑고 평범한 점경(點景) 속에 한국적인 시정(詩情)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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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재관(李在寬)
아호 : 소당(小塘)
제목 : 오수도(午睡圖)
언제 : 18세기 중엽 ~ 19세기 초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122.3 x 56.3 cm
소장 : 호암미술관

해설 : 특별한 사승(師承) 관계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그림을 팔아 어머니를 모셨다는 사실로 미루어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붓을 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수도는 서재에서 독서를 하다가 책을 베고 자는 노인과 뜰 한모퉁이 에서 찻물 끓이는 소동(小童) 및 유한(幽閑)한 경경을 더하는듯, 한쌍의 학을 등장시키고 있다. 화면 좌우에 노송과 대나무가 있는 괴석을 그려넣고. 이를 전경으로 해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중앙에 서재를 포치했다. 수묵이 주가 되며 담청과 담황이 가채된 밝고 청아한 화면을 보여준다. 오른쪽 상단에는 흔히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조희룡(趙熙龍)의 제(題)가 아니 그 자신의 것으로 생각되는 제발(題跋)이 보인다. “새소리 위아래서 들려오는데 낮잠이 곧 쏟아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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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재관(李在寬)
아호 : 소당(小塘)
제목 : 파초하선인(芭蕉下仙人)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139.4 x 66.7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이 그림은 6폭으로 이루어진 선인도(仙人圖) 중의 한 폭으로. 이중 네 폭에는 여선(女仙)이 등장하고 있으며 두 폭에 고사(高士)가 나타나 있다. 6폭에는 모두 조희룡의 발문이 있어 그와의 친교를 시사케 한다. 조희룡은 그의 저서 호산외기(壺山外記)에서, 이재관을 상하백년(上下百年)에 다시없을 그림을 그린 인물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당시 최대의 안목 金正喜 도 이재관의 그림에 題跋을 남기고 있어, 비록 화원이긴 하지만 그가 이룩한 화경이 어떠하였는가를 대변하는 사례들이다. 굵은 붓으로 농묵을 듬뿍 찍어 몇 번 손을 움직이지 않은듯, 유려한 필치로 그린 파초하선인 은 틀 잡힌 이재관의 기량을 보여준다. 우단 중앙에 파초엽상게제시 소당(芭蕉葉狀揭題詩 小塘)의 제(題)와 관서(款署)에 이어 일소석실(一簫石室)이란 백문방인(白文方印)과 소당(小塘)이란 주문방인(朱文方印)이 있다. 그러나 이 제(題)는 이재관의 글씨가 아니며 첫번째 있는 백문은 조희룡의 그림에 나오는 인(印)인 바 좌상단의 찬(贊)과 마찬가지로 조희룡의 글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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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정희(金正喜)
아호 :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과파(果坡). 노과(老果)
제목 : 세한도(歲寒圖)
언제 : 18세기
재료 : 두루마리 종이에 수묵
규격 : 23.7 x 108.2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김정희는 자를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과파(果坡). 노과(老果)등 2백여 가지를 썼던 문신(文臣). 문인(文人). 금석학자(金石學者). 서화가(書畵家)였다. 그의 문인화가 지닌 특유의 화격(畵格)은 조선화단을 통틀어 따를 이가 없었다 함은 여기 보는 세한도 같은 그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갈필로 그린 이 세한도의 맑고도 고담(枯淡)한 경애(境涯)나 그 간결한 조형속에 오가는 시의(詩意)와 정감은 서(書)와 화(畵)의 범주를 아울러 딛고 넘어선 제3의 조형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 이것이 바로 사의(寫意)의 그림이며. 동양선비의 심상(心像)이 지니는 맑은 경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화제낙관(畵題落款)에 우선시상(藕船是賞)이라 있듯이 그가 59세 때 청나라에 가 있던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보낸 회심의 작품으로 화제의 위치와 글씨 크기. 그리고 도서(圖書)의 검붉은 인주색 등. 점하나 소흘히 하지 않았음을 이 한 폭의 그림은 분명히 교시하고 있다. 김정희가 이 그림에 덧붙인 跋文에 의하면. 이 그림은 자기가 귀양살이할 때. 당시 높은 관직에 있던 옛 제자인 이상적이 남의 눈을 꺼리지 않고 끝까지 사제지간의 의리를 지킨 사실에 감탄하여 그를 송백(松柏)에 비유해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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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김정희(金正喜)
아호 : 추사(秋史). 완당(阮堂). 예당(禮堂). 과파(果坡). 노과(老果)
제목 : 부작란(不作蘭)
언제 : 18세기
재료 : 종이에 수묵
규격 : 55 x 30.6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김정희는 판서 노경(魯敬)의 아들로 백부 노영(魯永)에게 입양했다. 그는 일찍이 생부를 따라 중국에 건너가 청나라 당세의 거유(巨儒) 완원(阮元) 옹방강(翁方綱)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과 덕성을 계발하고 견식을 넓혔다. 또 한(漢). 육조(六朝)의 금석문(金石文)을 연구하여 순조(純祖) 16년에는 종래 승(僧) 무학(無學)의 비석으로 알려져 온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신라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임을 고증했다. 그의 추사체 서예는 한(漢). 육조(六朝)의 초. 예서체의 오의(奧義)를 규명한 위에. 오랜세월 동안 갈고 닦아 전무후무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그는 서예뿐 아니라 문인화 특히 사란(寫蘭)에는 그의 화론(畵論) 난결(蘭訣)과 함께 이른바 추사란(秋史蘭)의 독보적 격조를 이룩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그림은 사실보다 품격을 위주로 하며. 남종화의 선미(禪味)와 그 맥락이 닿는다 하겠다. 이 <부작란>은 그의 지론(持論)인 예서(隸書)와 견주어 초예기자지법(草隸奇字之法)으로 친 작품이니, 그의 난을 치는 격조 높은 문기(文氣)를 보여 주는 명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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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조희룡(趙熙龍)
아호 : 호산(壺山).우봉(又峯).철적(鐵笛).단로(丹老).매수(梅叟). 석감(石憨)
제목 : 매화서옥(梅花書屋)
언제 : 18세기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106.1 x 45.6 cm
소장 : 간송미술관

해설 : 조선후기에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이 중국으로부터 전래되면서 화보식의 명대 오파풍(吳派風) 매화가 그려지다가. 김정희에 의해 청조문인화풍(淸朝文人畵風)이 정착되자 형사(形似)보다는 극도의 이념미(理念美)를 구현해 내려는 쪽으로 매화 그림의 화풍이 변화된다. 이런 문인풍 매화 그림의 대표적인 작가가 조희룡이다. 조희룡은 허유(許維). 전기(田琦). 김수철(金秀哲) 등과 같이 金正喜 門下에서 청조문인화풍을 익히며 성장한 서화가 중의 한사람으로 자는 치운(致雲). 호는 호산(壺山). 우봉(又峯). 철적(鐵笛). 단로(丹老). 매수(梅叟). 석감(石憨)등을 사용하였다. 金正喜는 당시 청의 서화가들과 묵연(墨緣)을 긴밀히 하고 있었으므로, 그들로부터 매화서옥도류의 그림을 기증받고 있었을 터이니. 김정희 문인들의 매화서옥도는, 그것을 모본(模本)으로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록 중국화가의 그림을 모본으로 하였다고는 하지만, 이그림에서 보이는 과감한 흑백대조와 강렬한 묵묘법은 조선중기 이래의 전통화풍에서 보이는 특징이라서. 전통문화에 기반을 두고 외래문화를 수용해 가던 추사학파(秋史學派)의 진면목을 확인케 해준다. 백설이 온산중에 그득히 쌓여 형형색색의 설화를 피워내더니. 이에 뒤질세라 계곡 가득한 고매(古梅) 가지에서는 백매화가 눈빛 꽃구름을 일으켜 놓았다. 사방을 에워싼 백매림(白梅林) 사이에는 가라앉듯 자리잡은 외딴집 한 채가 있는데. 휘장을 걷은 둥근창 사이로 서책을 층층히 쌓아놓은 서안(書案)을 마주하고 있는 선비의 모습이 보이니. 매화의 청절을 본받으려는 高士의 書屋임이 분명하다. 창밖에 지천으로 피어 있는 매화로도 부족한지 일지매(一枝梅)를 화병에 꽂아 안상(案上)벼루 머리에 놓고 있으니, 선비의 매벽(梅癖)도 어지간하다고 하겠다. 조희룡의 자필제사(自筆題辭)로 보아 늦어도 장년기를 넘어서지 않는 시기의 작품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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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조희룡(趙熙龍)
아호 : 호산(壺山).우봉(又峯).철적(鐵笛).단로(丹老).매수(梅叟). 석감(石憨)
제목 : 홍매도(紅梅圖)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각127.5 x 30.2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조희룡은 김정희보다 불과 3세 연하였으나 평생 그를 스승으로 모셨다. 서(書) 와 난(蘭). 죽(竹). 매(梅) 모두에 뛰어났으며. 나비와 산수도 잘 그렸다. 비록 김정희에 비교할 때 흉내에 머문, 즉 내용과 정신은 닮지 못하고, 외형만 따른 점이 보여지기도 하지만. 필묵(筆墨)과 채(彩) 에 있어 속기(俗氣)로 지칭될 수 있는 감각미의 형사(形似)를 추구했고. 이점에서 문인화의 대중화에 기여한 점도 없지 않다. 이런 면에서도 이 홍매도 대련(對聯)은 중시된다. 세로로 긴화면에 역시 세로로 매화의 굵은 줄기를 꿈틀거리는 용처럼 나타냈다. 수묵 위주로 힘차고 날카로운 필선은 가는 가지의 표현에서도 보이는데. 여기에 다시 선홍의 홍매를 촘촘히 그려 넣었다. 또한 여백에 긴 발문도 마치 그림의 일부인 양 그림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품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화사함이 곁들여져 탈속한 것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두 그림은 처음부터 대련으로 그려진 것임을 둘을 함께 놓고 보면 쉽게 알수 있다. 둘 다 길게 세로로 그렸으되. 각기 무게의 중심을 한쪽이 상단인데 대해. 다른 한폭은 하단에 두고 있어 보는이로 하여금 세밀히 살필 때 두폭을 함께 일견한 뒤 시선을 다시 한번 위아래로 보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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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조희룡(趙熙龍)
아호 : 호산(壺山).우봉(又峯).철적(鐵笛).단로(丹老).매수(梅叟). 석감(石憨)
제목 : 묵죽(墨竹)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127.5 x 44.8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여기서는 두 폭만 게재되었지만 원래는 8폭으로 된 병풍이다. 연폭병(聯幅屛)을 제작할 때 전체를 한 화면으로 해서 폭끼리 겹치는 식으로 연결해서 그리는 경우도 있으나. 이 묵죽 병풍은 매폭마다 독립된 한 작품씩이다. 그렇다고 전혀 구도상 안배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며. 전체를 함께 보면 화면 구성에 있어 다채로움과 변화가 보여. 특히 포치에 있어 놀라운 기량을 살필수 있다. 화면 바탕도 적. 황. 청 등 색지를 두루 사용하여 비록 수목만으로 그린 묵죽임에도 불구하고. 문기와 더불어 시각적인 아름다움까지 간취 되어진다. 화면 중앙에 5 그루의 죽간(竹竿)을 모아 땅위의 표현없이 곧게자란 대나무 두간은 농묵으로. 세간은 담묵으로 그렸으며. 대나무 잎도 마찬가지로 이 양자가 혼용하여 산뜻한 조화를 보이며. 마치 첨예한 삼각형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은 구도이다. 이에 화면 오른쪽 하단에 4행의 긴 제발(題跋)을 적어서 화면에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으며. 용필. 용묵법에 있어 기승(技勝)을 읽게 된다. 다른 한폭은 화면을 비스듬히 대각선으로 비우고 오른쪽 위와 왼쪽 상단에 각기 변각(邊角)구도로 죽군(竹群)을 포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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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유운홍(劉運弘)
아호 : 시산(詩山)
제목 : 기녀(妓女)
언제 : 19세기
재료 : 화첩 종이에 채색
규격 : 23.9 x 36.2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유운홍은 화원으로 첨사(僉使)를 지냈으나. 지금까지 공개된 작품이 별로 없어 크게 주목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의 자는 치홍(致弘)이고 호는 시산(詩山)이다. 산수. 인물. 화조에 능한 것으로 전해져 오나. 대표작으로 내세울 만한 이렇다 할 그림이 없었는데. 한국미술5천년전의 미국 전시를 통해 기녀 한폭이 공개 되면서. 풍속화가로 그의 면모를 다소 부각 시키게 되었으며. 알려진 그림 중에선 그의 대표작으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몇점 안되는 그의 그림들은 소폭들로. 이를 통해 볼 때 기량이나. 용필. 용묵에 있어 김홍도의 여맥(餘脈)이 보이나. 두드러진 면을 찾기 힘든 화가임을 부인키 힘들다. 기녀는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한 속화(俗畵)에 있어 신윤복의 영향이 간취된다. 화면을 꽉 메운 공간 구상으로. 화면 중앙에 아이를 업고있는 여인과. 긴 담뱃대를 문 여인. 거울앞에서 탐스러운 긴 머리를 손질하는 여인등. 각 여인의 자태가 잘 나타나 있다. 가늘고 고른 필선은 거듭 신윤복의 영향을 느끼게 하며. 세 인물의 자연스러운 자태는 묘사력을 알려준다. 배경이 되는 문짝과 툇마루의 평행을 이룬 선들은 기하하적 문양으로 등장인물의 무대 구실을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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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허연(許鍊)
아호 : 마힐(摩詰).소치(小癡).노치(老癡).석치(石癡).연옹(蓮翁)
제목 : 설옹관(雪擁關)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종이에 담채
규격 : 70 x 36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허연은 벼슬이 지중추(知中樞)까지 오른 사대부 화가이다. 호는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자를 따서 마힐(摩詰)이라 했고. 그 외에도 소치(小癡). 노치(老癡). 석치(石癡). 연옹(蓮翁)등이 있다. 그는 대폭(大幅)산수로 이름났는데. 예찬(倪瓚)과 황공망(黃公望)의 화법을 취했으며. 金正喜의 예원(藝苑)에 드나들며. 書. 畵 모두 영향받고 안목을 길렀다. 이 그림은 겨울날 선비가 나귀를 타고 옹관(擁關)을 찾아드는 그림이다. 화면 하단 중앙에 좁은 계곡을 가로지르는 허술한 다리가 걸쳐있고. 그위를 설립(雪笠)을 쓴 선비가 막 건너고 있다. 길은 왼쪽으로 통해서 멀리 누각이 보이는 옹관으로 오르는데. 온 천지가 눈에 덮혀있다. 전경 오른쪽 언덕에는 앙상한 가지의 겨울 나무들이 대여섯 그루 서있고. 옹관으로 오르는길 오른쪽 언덕은 화면 중앙을 향해 뒤틀리며 커다랗게 돌출하는 언덕을 이룬다. 그림의 배경 좌우에는 험준한 원산들이 높이 솟아 예리하게 모난 봉우리를 드러내고 있다. 옹관과 누각을 빼놓고는 모두 닳아서 갈라지는 초묵갈필(焦墨渴筆)로. 이리 저리 휘갈려 단숨에 설경을 그려내었는데. 옹관 주위의 꼿꼿한 약식(略式) 침엽수림만이 단정하게 서 있다. 그림 상단 하늘은 담묵을 비벼 설산과 대조 시키고, 나무. 언덕. 다리밑 여기저기에 연한 갈색과 담묵을 문지를고 입혀 변화를 주고 있다. 화면 상단 공간에. “갈사는 말을 타고 계곡 다리위를 건너는데. 앞길엔 눈덮힌 옹관만이 아득하구나” 란 싯귀를 소치(小癡) 스스로 제(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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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허연(許鍊)
아호 : 마힐(摩詰).소치(小癡).노치(老癡).석치(石癡).연옹(蓮翁)
제목 : 오월강각도(五月江閣圖)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99.2 x 48.5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이 그림은 긴 화폭의 중경 이하로 왼쪽 위에성 오른쪽 아래로 대각선을 이루는 넓은 강으로 구분되면서. 원경에는 수평으로 육지가 오른쪽으로 벋은 두줄기 선으로 구성된다. 전경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벼랑이 깊은 골을 이루면서 얕은 물 위에 수상누각(水上樓閣)이 셋 보인다. 왼쪽 언덕에는 몇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앞뒤로 엇갈리며 서 있는데. 모두 단조롭지 않은 꺾이는 선과 동그라미. 내려긋거나 뻗어나가는 등 다양하다. 중경의 강 건너 낮은 강변에는 어지럽게 늘어진 가지의 수양버들과, 활엽수 아래로 고기잡이 초가가 파묻히듯 자리잡고. 그 뒤로 고깃배 서너 척이 돛대를 뻗치고 숲에 가려 있다. 원경의 모래톱 언덕. 수목이 성기게 자란 가운데 고탑(古塔) 하나 외롭게 서있고. 아주멀리 수평선 위로 자욱한 안개속에 먼 산줄기가 보일 듯 말 듯 가로놓여 있다. 그 위로 밭은 공간에. 오월강각 십리어장(五月江閣 十里漁庄) 이라고 추사체(秋史體)를 닮은 시 한 구 써 있고, 소치(小癡) 라는 주문방각인(朱文方刻印)이 있다. 물상(物狀)의 윤곽. 준법(皴法). 태점(苔點) 모두 농윤(濃潤)하고 탈속한 필선과 묵법으로 지두(指頭)는 물론, 닳고 거친 붓자국이 역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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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한철(李漢喆)
아호 : 희원(希園 또는 喜園)
제목 : 추사김공상(秋史金公像)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비단에 채색
규격 : 131.5 x 57.7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추사체(秋史體)라는 서체를 만들어낸 대서예가이면서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실학자(實學者)였던 김정희(金正喜)의 초상은, 조선조 후기 이후 절정에 이르는 우리나라 화원 계통의 대표적 초상화로서. 전신사조(傳神寫照)에 힘쓸 뿐만 아니라. 의복과 흉배(胸背), 의자, 족대, 호피(虎皮), 화문석 등 세밀한 부분까지 극사실적(極寫實的) 경향으로 흐른다. 초상 위에는 당대 영상(領相)이던 권돈인(權敦仁)의 제찬(題贊)이 있는데 추사와는 단금(斷金)의 벗으로, 두 사람의 글씨는 서로 분간할수 없을 만큼 흡사 하였다. 또한 약간 왼쪽으로 향하고 성장을 한 모습에서 후기 초상화의 명암법을 엿볼수 있다. 아래 왼쪽 귀퉁이에 8년 정사 전감목관 이한철 모(八年丁巳 前監牧官 李漢喆摹) 라 했으니. 추사가 작고하던 해. 이미 있었던 초상을 보고 다시 그린 것 같다. 이초상을 그린 이한철은 자를 자상(字常). 호를 희원(希園 또는 喜園)이라 하며. 부친 이의양(李義養)의 가업을 이어받은 화원으로 군수를 지냈고 90세 가까이 살았다고 하나 몰년은 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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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남계우(南啓宇)
아호 : 일호(一濠)
제목 : 화접(花蝶) 대련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종이에 채색
규격 : 각각127.9 x 28.8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남계우의 자는 일소(逸少), 호는 일호(一濠)이며. 숙종(肅宗) 때 영상에 올랐던 남구만(南九萬)의 5대손이다. 그는 나비를 잘그려 “남(南)나비” 로 지칭되었다. 나비와 더불어 그린 초화들은 섬세하고 치밀한 기법으로 단순히 화본에 의한 것이 아닌. 실제 나비와 화초를 보면서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이 그림처럼 대련(對聯)으로 그리는 예는 19세기 후반에 크게 유행된 것으로 보인다. 나비 묘사가 지나치게 사실적이며 설채(設彩)로 인해 일견 속기(俗氣)가 누출되나 상단에 적은 발문(跋文)으로 해서 이를 제어해 준다. 화접 대련은 각기 하단 좌우에 붉은 모란과 어승이. 흰모란과 장미를 그리고. 그위에 한 무리의 나비를. 상단에 긴 제발을 써서 꽃과 나비. 제발이 각기 같은 비중을 지닌다. 묘사에 있어서 사실적(寫實的)인 표현과 선명한 채색의 사용. 구도의 적합성 등이 이분야 그림에 있어 풍미했던 성가(聲價)를 능히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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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하응(李昰應)
아호 : 석파(石坡)
제목 : 석란(石蘭) 대련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비단에 수묵
규격 : 각각123 x 32.3 cm
소장 : 국립중앙박물관

해설 : 흥선(興宣)대원군 이하응은 10년간 섭정을 하여. 역사에서 득실의 자취를 함께 남긴 정치가이면서. 특히 서(書)와 墨蘭 에 뛰어나. 상당히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10폭병 등 대작을 위시해. 전칭작을 포함하면 그수가 엄청나며. 대작(大作)과 방작(倣作)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란 대련은 각기 좌우단(端) 중앙에 괴석을 그리고 그 상하에 두종의 난을 나타내고 있다. 갈필로 잎이 좁고 긴 난엽(蘭葉)을 자신감 넘치는 익숙한 필선으로 거침없이 그려 나갔다. 그러나 전체 화면에서 살필 때 단조로움과 획일이 보이지 않는 각기 다른 형태로. 자연스러움과 상호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한쪽이 성글면 반대편은 촘촘히 잎을 그렸고. 괴석도 길이와 부피가 강조되게끔 달리 했다. 다만 난의 꽃에 있어 선염(渲染)의 묘를 찾기 힘든잎과 같은 색이어서 아쉬움이 함께 약점으로 보이기도 한다. 관서(款署)에 의해 1892년 73세의 노필(老筆)로 그렸음을 알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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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 이하응(李昰應)
아호 : 석파(石坡)
제목 : 묵란(墨蘭)
언제 : 19세기
재료 : 족자 종이에 수묵
규격 : 93.2 x 27.6 cm
소장 : 한국개인

해설 : 석파(石坡) 이하응은 서화에는 영웅의 기개가 넘치고. 학자다운 문기(文氣) 또한 깃들어 있어. 특이한 멋과 운치가 흐른다. 金正喜는 석파의 난을 찬(贊)하여. 사란(寫蘭)은 가장 어려우니 그인품이 고고특절(高古特絶)하지 않으면 함부로 칠수 없다” 석파는 난에 조예가 깊으니 그 천기(天機)가 청묘(淸妙)하여 이에 이른 것이다” 라고 했다. 이 그림은 원래 쌍폭이었으나 지금은 이 한쪽만 전해 있다. 세간에는 대원군란(大院君蘭). 석파란(石坡蘭)이라 전해지는 그림이 많으나, 이 작품이 가장 확실하다 할수 있다. 화폭 왼편에는 농담을 섞은 먹으로 힘차게 난을 쳤고, 오른편에는 자신감 넘치는 초예체(草隸體)의 독특한 필치로 간기(干紀)와 낙관(落款)을 크게 써 난과 대립시키면서 시원스럽게 널찍한 여백을 남겨두고 있다. 아래위 여백의 글은 정인보(鄭寅普)의 제화(題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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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의 명화들(조선후기)
글쓴이 : 글밭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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