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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멸의 화가(Voyage Into The Myth):반 고흐(Vincent van Gogh)展, 2007 (1)

은초록별 2008. 2. 5. 08:36



Voyage Into The Myth
Vincent van Gogh 展
Seoul-Korea, 2007



Self-Portrait with Dark Felt Hat, 1886(미전시 작품)
Van Gogh Museum, Amsterdam
    예술가로서 가난과 좌절로 점철된 쓰라린 인생여정을 통해 스스로의 삶을 마감한 비운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는 창작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독특한 화법 과 내면 중심의 표현력으로 미술사의 한 획을 그은 가장 위대한 화가로 여겨질 뿐만 아니라 영혼구도적인 강렬한 작품으로 사후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화가이다. 10년이 채 안되는 짧은 시간동안 그가 내뿜었던 광적인 예술 세계, 끝없이 감내해야 했던 가난과 고통의 삶의 드라마, 그리고 사후 기록적인 판매 가격을 올리며 세기를 초월해 인류에게 가장 인정받는 예술가로 남은 반 고흐의 신화들은 후대의 많은 예술가들에게 귀감이 되어왔으며, 보는 이들의 가슴 속을 파고들어 진한 감동과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비단 그가 직면했던 삶의 역정에 대한 논점을 뒤로 하더라도, 그가 당시 아카데미즘이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화풍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정치적이거나 계산적이지 않은 채 본질적인 정신세계를 직시하여 평생 본연의 감정에 기반하고 있는 작업을 해왔던 점, 이것이 바로 반 고흐가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작가로 숭배되는 이유일 것이다. 전 세계에 남아있는 반 고흐의 작품 절반 이상을 소장하고 있는 반 고흐 미술관(Vincent van Gogh Foundation, Vincent van Gogh Museum, Amsterdam, Netherlands)과 크뢸러-뮐러 미술관 (Kroller-Muller Museum, Otterlo, Netherlands)으로부터 엄선한 유화작품 45점과 드로잉 20점 및 판화작품 2점, 총 67점을 2007년 11월 24일부터 2008년 03월 16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본관 에서 선보이는 이 전시는 국내 초유의 회고전일 뿐만 아니라 1990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 관에서 열린 작가 100주기 전시 이후 사상 최대 규모로 <붓꽃>과 <자화상>, <씨 뿌리는 사람>, <사이프러스가 있는 길> 등 반 고흐 예술의 진수를 보여줄 걸작들이 전시된다. 이번 전시는 반 고흐 작품의 탄생과 변천 과정을 손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대기 순으로 전시 가 구성되어 있다. 장 프랑수아 밀레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반 고흐가 가난한 농민사회의 처참 한 생활상을 화폭에 담으며 미술을 통해 인류애를 실현코자 화가의 길을 택한 초기 네덜란드 시기(1881-1885)부터, 처음으로 인상파의 빛을 발견하면서부터 자신의 화풍의 기틀을 마련한 파리 시기(1886-1888), 이상향을 꿈꾸며 색채의 무한한 신비를 마음껏 구현한 아를르 시기 (1888-1889), 불타는 예술혼을 자연의 묘사를 통해 분출하던 셍레미 시기(1889-1890),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70일간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1890)로 나뉘어 시기별 대표작들이 전시된다.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그의 이름과 예술 세계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었다. 하지만 사후 그의 영향력은 인상주의, 야수파와 추상주의, 표현주의에 걸쳐 거대한 것이었으며, 20세기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귀감이 되어 오고 있다. "형의 노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오... 난 미래 사람들이 형을 이해할 거라 확신하오. 문제는 그것이 언제냐 하는 것이오." 동생 테오의 예언처럼, 21세기에도 그의 붓 터치 속에 살아 숨쉬 는 듯한 예술정신이 현대인들의 감수성을 일깨우며, 그가 내뿜었던 광기의 불꽃은 꺼지지 않은 채 진정한 영웅으로서 반 고흐의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I. 네덜란드 시기(Dutch Period:1881-1885): 나도 무언가 될 수 있다 슬픔(Sorrow)/Novemer, 1882
    '이제 조금씩 이전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1881년 9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 반 고흐는 1년 넘게 정진해온 화가의 길에 대한 두려움 섞인 자신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7년간의 화상생활과 4년간의 성직자생활 끝에 마땅히 할 것이 없어서 동생 테오의 권유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그가 27세 되던 1880년 봄. 그해 여름부터 시작된 화가로서의 입문을 위한 혹독한 수련과정을 통해 1881년 12월에 첫 유화작품이 탄생한다. 헤이그에서 머문 18개월 동안 본격적인 데생과 수채화 및 유화에 대한 수업을 친척이자 헤이그화파의 수장격인 안톤 마우베(Anton Mauve)로부터 사사받으면서 반 고흐는 2년간에 걸친 화가가 되기 위한 기본적인 수업을 완성한다. 상상과 현실을 오가며 화가로서의 기초수업에 몰두했던 헤이그에서 그린 작품 <슬픔>은 초기 입문과정에서 드로잉에 주력하던 시기에 그려진 대표작이다. 반고흐의 인생에서 짧지만 함께 생활했던 유일한 여인, 헤이그의 길거리에서 만난 병든 미혼모 이자 매춘부였던 시엔(Sien)의 누드를 그린 이 작품(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누드작품)은 절망에 빠진 듯한 가여운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삶에 지치고 사랑에 굶주린 탓에 좌절감과 비통에 빠진 이 여인의 모습은 훗날 반 고흐의 처절했던 삶의 여정을 알리는 계시적인 작품으로 스스로 의 다가올 운명을 예시한다.
The Potato Eaters(감자 먹는 사람들), 석판화/April, 1885
    자신보다 더한 고통 속에 살아가는 시엔과의 인연에 종지부를 찍고 1883년 12월부터 2년 동안 정착했던 뉘넨(Nuenen)에서는 자연과 가난한 농민생활을 주된 소재로 반 고흐의 초기 주요작품 들이 탄생하는데 그 중 대표작이 1885년 4월에 완성된 <감자 먹는 사람들>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표정에서 보듯이 당시 가난한 농민의 참상, 그러나 땅에서 그들의 손으로 일궈낸 수확물로 살아가는 정직한 사람들을 그리면서 반 고흐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려 했다. 반 고흐의 초기작은 인물화들이 상당수를 이룬다. 이는 반 고흐의 영혼 깊숙이 자리한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며 인간의 진실한 모습을 그려 내는 것이 화가의 길이라고 스스로 믿었기 때문이다. 인물화에 대한 그의 집요한 관심은 그가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계속된다. 비록 그토록 갈구하던 사랑을 얻지 못하는 고통과 아픔 속에 서 처절하게 짧은 삶을 마감해야 했지만 그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그림을 통해서 반 고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마음껏 쏟아냈다. 겨울 추위 때문에 진척이 없는 작업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도시생활에 대한 새로운 체험을 하고자 뉘넨을 떠나 1885년 11월 벨기에 안트베르펜에 갔으나 채 3개월이 지나지 않아 진정한 화가의 길을 가기 위해 아방가르드 미술의 산실 파리 행을 택하면서 그는 두 번 다시 조국땅을 밟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
The Potato-Eaters(감자 먹는 사람들)/April, 1885 유화 작품(미전시 작품)
    이 작품은 장차 그를 위대한 화가의 반열에 오르게 만든 대표 걸작으로 꼽힌다. 고흐는 이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석판화를 제작해두었다. 석판화 <감자 먹는 사람들>은 전사 지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면 구성이 유화 작품과는 정반대이다. 고흐가 석판화 <감자 먹는 사람들>를 몇 점을 찍어냈는지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대략 17-18점 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7점은 현재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흐는 파리의 화상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작품 일부를 동생 테오에게 보냈고, 자신도 반 라파 르드를 비롯한 지인들에게 몇 점을 보냈는데, 반 라파르드의 반응은 냉담하기 이를데 없었다. 반 라파르드는 이 작품이(석판화) 반 고흐의 우상이었던 쥘 브르통과 장 프랑수아 밀레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다. 반 고흐는 그의 말에 상처를 받고 기분이 크게 상해 반 라파르드의 편지 위에 퉁명스런 말 몇 자를 휘갈겨 적은 후 반송했다. 그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는 차가워졌다.
Loom width Weaver(베틀과 방직공)/June-July, 1884
    헤이그 체류 시절(1881~1883) 반 고흐는 브라반트주의 뉘넨에서 일하는 방직공들에 관한 이야기 를 들었다. 그는 예술가의 길을 처음 걷기 시작할 때부터 방직산업에 커다란 흥미를 느껴왔던 터였다. 이미 1879년에 그는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장기간 도보로 여행하면서 방직공 마을을 들러 본 바 있었다. 장인들의 작업하는 모습에서 불타오르는 듯한 영감을 얻은 그는 뉘넨에 도착하자마자 방직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사작했다. 1883년 12월부터 1884년 8월까지 그는 방직공을 소재로 한 총 열 여섯 점의 완성된 드로잉과 열점의 회화를 그렸다. 대부분 천을 짜거나 실을 정렬하는 것과 같이 베틀 앞에서 작업하는 모습을 담았다. 1884년 7월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방직공을 소재로 한 작품 두 점 을 제작하고 있다고 썼다. 그 중 하나였넌 이 작품을 그는 이렇게 묘사했다. '창문이 세 개인 실내가 배경인데, 창문 너머로 보이는 노란빛의 풍경이 베틀에서 짜이는 푸른 천과도 대조를 이루고 방직공이 입고 있는 또 다른 푸른색 작업복과도 대조를 이룬다.' 이는 그가 얼마나 색채에, 그리고 식채의 대조에 골몰해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이다. 그는 또한 저녁시간에 먼지가 홑날리는 작업장에서 볼 수 있었던 렘브란트적 명암 효과 와 그가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묘사했던 등불을 밝히며 작업하는 방직공의 모습에 각별한 흥미를 느꼈다.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가장 전형적인 자세의 방직공을 그려내고 있다. 방직공은 왼팔을 뻗어 베틀의 바디로 씨실을 들어올리는 동시에 오른팔을 약간 더 높이 들어 북을 앞뒤로 젓고 있다. 그는 방직공의 자세에 거의 변화를 주지 못했는데, 이는 그가 여전히 인물화에 능숙치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돈이 모자랐던 탓에 그는 물감을 아껴 써야 했고, 모델을 고용할 형편도 안됐다. 이 모든 사정상 그는 방직공을 비슷한 자세로 여러번 반복해서 그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Head of a Man with a Pipe(파이프 문 남자)/Nov., 1884-May, 1885
    이 작품은 반 고흐가 뉘넨에서 남긴 많은 연구작 가운데 하나이다. 그가 작품 속의 인물을 정확히 묘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은 것이 분명하다. 인물의 두 눈은 서로 높이가 맞지 않고, 목 에 두른 수건의 매듭은 시점이 어색하며, 파이프 또한 담배 피우기 어려울 듯한 각도로 입에 물려 있다. 그는 배경을 두 부분으로 분할했다. 왼쪽 부분은 매우 어둡게 처리하여 엷은 녹회 색의 오른쪽 부분과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Head of a Woman(여인의 초상)/March, 1885
    1884년 10월 말 반 고흐는 그 전해 5월부터 이미 계획하고 있었던 초상화 연구작을 연작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친구이자 동료 예술가인 반 라파르드의 뉘넨 방문이 그 계기였다.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반 라파르드가 이미 '여러 점의 초상화 연구작'을 완성했고 그의 작품들이 대단히 훌륭해 보이더라고 했다. 그는 반 라파르드를 모방해 '초상화 서른 점' 을 그리기로 결심했다. 반 고흐의 의도는 초상화 속의 인물을 실제에 가깝게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특정 유형의 얼굴을 그리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거칠고 평평한 안면 에 이마는 높고 입술은 두툼한, 그다지 날카롭지 않은 넉넉한 인상의 얼굴, 밀레의 작품 속 인물 같은 얼굴'을 찾아 헤맸다. 그에 따르면 농부의 거친 외모와 가꾸지 않은 순수함은 자연 에 대한 근접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와 같은 문명인들의 삶과는 완전히 다른 삶의 방식'이며, '많은 점에서 문명사회보다 더 월등한'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농부의 고달픈 삶을 실로 탁월하게 표현했다. 초상화의 여인이 질병과 형편 없는 음식, 고된 노동으로 고통 받았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초상화가 그토록 매혹적인 것은 '흰색 부분과 그림자에 묻힌, 지극히 섬세한 톤의 얼굴 부분 간 명암 효과' 때문이었다. 모두 합해 그는 마흔 일곱 점의 초상화 연구작을 남겼고, 그 중 마지막 작품은 1885년 5월 말에 그린 것이다.
Man at Table(식탁 앞의 남자)/March-April, 1885
    반 고흐는 프랑스 화가 밀레처럼 농부를 제대로 그리려면 '농부가 그들의 일상적 환경에 있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농부의 일상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농부의 터전'인 농가를 직접 찾아갔다. 반 고흐는 특히 농촌 여인을 즐겨 그렸는데,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예외적인 경우다. 이 작품은 농부의 검소한 생활 양식을 잘 보여주는데, 밭에서의 고된 일과를 마친 농부가 검소한 식사를 하고 있다. 밀짚을 댄 나무 의자와 평범한 나무 식탁이 전부인 단순한 실내 모습, 그리고 인물의 투박한 얼굴은 농부의 고된 생활을 말해준다. 이 작품은 몇 달 뒤 그린 걸작 <감자 먹는 사람들(유화)>을 그리기 위한 사전 연구작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인물에 대한 조명 효과를 연습했음이 틀림없다. 인물의 얼굴과 옷 전면에 입힌 엷은 물감 터치는 어두운 방에 있는 인물에 뚜렷한 윤곽을 부여한다. 그는 <감자 먹는 사람들>에서 같은 인물을 살짝 다른 위치에 배치했다. 이 인물은 <감자 먹는 사람들>에도 등장하는 여자 모델 고르디나 데 그롯의 삼촌인 프란시스 반 루이지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Sheaves of Wheat(밀짚 더미)/July-Aug., 1885
    반 고흐에게 밀짚 더미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상징적 의미를 가진 것이 분명했다. 1888년 6월 그는 친구이자 동료인 베르나르에게 시골 생활과 농사일을 통해 '씨 뿌리는 사람과 곡물 더미가 상징하는 무한한 공간'을 경험했다고 전했다. 파종이 수확을 향한 출발점, 즉 인생의 시작을 의미한다면 추수는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종결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수평의 여러 층으로 나뉘어 있다. 벤 지 얼마 되지 않은 밀짚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과감한 붓놀림으로 베고 남은 밑동을 묘사했다. 그림의 뒤편에는 푸른 하늘 아래 나무 가장자리로 아직 베지 않은 밀이 자리하고 있다. 중간 층에는 나란히 기대어 놓은 밀짚 더미가 쌓여 있다. 가느다란 밀짚을 표현하기 위해 미세하고 가는 붓을 사용했다. 밀짚 더미라는 소재는 그의 전 작품세계에 걸쳐 일관되게 등장한다. 인물과 함께 묘사되거나 들판에 여러 열로 늘어선 모습 등 다수의 작품에 나타난다. 밀짚 모티브는 반 고흐에게 지속 적인 영감을 주었으며 아를르, 셍레미, 오베르에서 완성한 상당수 작품에 나타난다.
Peasant Women Digging Potatoes(감자 캐는 여인들)/Aug., 1885
    1884년 말부터 한 해 동안 반 고흐는 두상과 손에 대한 연구작에 매달렸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위한 사전 연구작 차원에서 인물스케치도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 작품이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 다. 테오와 반 라파르드의 지적도 있었지만 본인 스스로도 그림 속 인물의 입체감이 떨어진다 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1885년 6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새 작품에서는 인물을 '몸통부터' 그리기 시작했으며 덕분에 '보다 크고 완전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입체감을 살리기 위해 타원이나 달걀형을 그리는 연습에 전력을 다했다. 이 새로운 연습을 하기 위해 그는 야외에 나가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스케치했다. 이 작품에서처럼 밭을 일구는 모습은 자주 등장한 모티브 중 하나였다. 그는 이 동작이 고단한 농부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쟁기를 쓰거나 가축을 부릴 형편이 안되는 농부들이 직접 손으로 밭을 갈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그는 '무언가에 전념 하고 있는' 동작을 묘사하고자 최선을 다했다. 그는 보다 많은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상체를 구부리고 있는 인물을 선택했다.
Houses Seen from the Back/Dec., 1885-Feb., 1886
    1885년 11월 말 반 고흐는 그림을 다 팔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안트베르펜으로 가서 빌데켄스 트라트 194번지에 방을 얻었다. 뉘넨에서 '추위 때문에 야외작업이 중단된 상황에서 모델까지 부족하니 작업이 지지부진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고 또 가끔은 도시 생활을 체험할 필요 가 있다는 자각 때문에 안트베르펜으로 옮긴 것이다. 그는 벨기에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창문에 서 바라본 오래된 집들의 뒷모습'을 포함한 수많은 도시경관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지붕을 덮고 있는 눈이 눈길을 끈다. 12월 9일 첫눈이 내렸고 12월 14일까지도 여전히 눈이 쌓여 있었으며 '눈이 왔다. 오늘 아침 눈 속에 덮여있는 도시가 아름답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동생 테오에게 보냈다. 반 고흐는 이 작품을 이 기간에, 또는 눈이 내렸던 1886 년 1월 혹은 2월에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안트베르펜에서 그린 도시의 풍경 중 대중에게 알려진 작품은 이 작품이 유일하다. 반 고흐는 무엇보다도 분위기를 포착하고자 애썼다. 비록 자신의 작품들이 팔리기를 간절히 원하기는 했지만, 이 그림의 경우는 판매를 위해서 그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주제가 음울하게 표현되어 있는 데다 집의 뒷모습을 묘사했기 때문에 잘 팔릴만한 그림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좌측 창문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반 고흐가 원근법에 특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II. 파리 시기(Paris Period:1886. 3-1888. 2): 빛의 발견 Vase of Gladioli and Autumn Asters/Aug.-Sept., 1886 (글라디올러스와 가을 과꽃이 담긴 화병)
    1886년 3월 초에 도착하여 2년간 동생 테오와 함께 살며 지낸 파리에서의 생활은 반 고흐가 자신의 화풍을 정립하는 기틀을 마련한 중요한 시기로 기록된다. 렘브란트, 프란츠 할스, 홀바인 등과 같은 미술사 대가들의 작품을 답습하던 네덜란드 시기의 어두운 화면들은 빛의 화가로 불리는 인상주의 미술이 휩쓸고 간 파리에서 점차 밝은 톤으로 변화하는데, 아방가르드 미술의 산실인 파리에서의 빛의 발견은 반 고흐의 화풍에 지대한 영향 을 끼친다. 그가 파리에 도착한 해인 봄에 여덟 번째 인상파 회화전이 열리고 있었고 새로운 빛의 회화로 번져가고 있었다. 몽마르트의 가난한 그러나 훗날 미술사의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툴루즈-로트렉, 에밀 베르나르, 쇠라, 고갱과 같은 동료 화가들과의 교류와 친분을 통해 반 고흐의 화풍은 다양한 실험의 시기를 맞이한다. 기법적으로 채 완숙하지 못한 자신의 재능을 보완하기 위해 유화물감의 사용에 집약적인 노력을 기울이는데 파리에 도착 직후 집중적으로 그렸던 꽃 그림들은 화면의 배색에 대한 집요한 탐구에서 비롯된 작품들이다. 이 같은 색에 대한 연구를 통해 단순한 명암대비적인 기능으로서의 빛이 아닌 색채효과로서의 빛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아돌프 몽티셀리의 색을 두껍게 바르는 임파스토(impasto: 두터운 물감을 붓이나 나이프로 거칠게 발라주어 입체감과 질감을 나타내는 방법이다. 보통 유채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할 때 활용할 수 있다. 임파스토를 가장 잘 이용한 미술가로는 빈센 트 반 고흐가 있다.) 기법을 터득하게 되고 그의 작품은 점차 새로운 사조의 일원으로서 손색 이 없는 개성적 표현으로 진화해간다. 반 고흐는 2년간의 파리생활 동안에 엄청난 양의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는데 그가 남긴 40여 점 의 자화상 중에 35점이 파리에서 제작된 작품들이다. 반 고흐가 자화상에 집착한 이유는 모델 료가 없어서 모델을 구하지 못하는 경제적인 이유가 그 첫 번째라면, 네덜란드 시기부터 줄곧 그의 주된 연구대상이었던 인물화에 대한 그의 집착이 두 번째이다. 인물의 외형보다는 인물 각각의 특성, 즉 내면의 표현에 한층 다가가려 했던 그의 집착 탓인지 파리에서 그린 자화상과 인물화에는 개개인의 삶과 연륜이 배어있는 듯한 강렬한 인상이 특징 을 이룬다. 당시 파리화단을 휩쓸고 있던 인상파 화풍의 영향은 반 고흐의 여러 작품에서 고스 란히 엿볼 수 있는데 전시작 <아나에르의 센느 강변 길>이 그 하나이다. 인상주의와 더불어 당시 유럽인과 예술가들에게 깊이 영향을 준 일본판화에 대한 관심은 반 고흐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작품 <압생트가 담긴 잔과 물병>은 일본판화의 영향을 받은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다. 일본판화에서 보이는 간결한 선의 처리와 윤곽이 뚜렷한 색채의 배색법 그리고 일본판화가 담고 있는 자연의 평화로운 풍경들은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낀 반 고흐에게 남프랑스에 대한 동경을 갖도록 하기에 이르렀고 반 고흐는 아방가르드 미술과 함께 했던 2년 간의 파리 생활을 접고 색채와 태양을 찾아서 아를르로 떠난다.
Roses and Peonies(장미와 모란)/June, 1886
    1886년 여름 반 고흐는 35-40여 점의 꽃 정물화를 그렸다. 1886년 가을로 추정되는 시기에 화가 호레이스 리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모델료를 지불할 돈이 없어서 꽃을 그리기 시작했 으며 돈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인물화를 그리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반 고흐는 색상 이론을 충실히 익히기 이해 꽃 정물을 그려 나갔다. 뉘넨에서 열독한 바 있는 샤를르 블랑의 [데생기법의 교범]은 색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서로 대배되는 색상을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하는 법을 비롯해, 빨강 파랑 노랑의 3원색 대비와 초록 주황 자주의 색상환 대비의 활용법을 익혔다. 초록과 빨강이 들어간이 정물화는 당시의 연구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동생 테오의 친구들이 보내온 꽃이 정물화의 소재로 쓰였다. 반 고흐는 꽃을 그려본 경험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름 내내 연습을 계속했다. 하지만 9월 말 이 되어 생화를 구하기 어려워지자 다음 해 봄까지 꽃 그리기를 중단했다. 장미와 모란이 피는 시기를 감안하면 이 그림은 1886년 6월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반 고흐가 파리에서 그린 꽃 정물화 중 비교적 초기작이다.
Vase of Cornflowers, Daisies, Poppies and Carnations (수레국화, 데이지, 양귀비, 카네이션이 담긴 화병)/June-July, 1886
    이 작품은 화려한 색상이 사용되었고 작품 속 화병이 <파란 화병 속의 꽃>이나 동일한 시기의 다른 정물화에도 등장한다는 이유로 1887년 여름에 그린 작품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꽃을 표현한 임파스토 기법과 배경을 채운 방식은 반 고흐가 몽티셀리 작품에 영감을 받았던 1886년 여름에 그린 작품 속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스타일이다. 꽃의 종류로 미루어 볼 때 파리에서 그린 거의 최초의 정물화 중 하나로 6월이나 7월 경의 작품 으로 판단된다. 1886년 가을 리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주로 '붉은 양귀비와 푸른 수레국화'를 그렸다고 말했다. 이 꽃들은 작품의 기본적인 색감을 제공해 주었고 여기에 카네 이션과 데이지의 흰색과 노랑이 더해졌다. 선명한 푸른색 배경과 밝은 색상의 사용은 이 작품 을 눈에 띄게 생기가 넘치는 여름날의 작품으로 만든다. 1886년에 그린 다른 꽃 정물화는 대부분 배경이 어둡게 표현되었고, 예외적으로 <글리디올러스와 가을 과꽃이 담긴 화병>에서 만 배경이 푸른색으로 처리되었다. 색을 입힌 정물화 대부분은 연구작이었지만, 이 작품은 대형 캔버스를 사용했고 서명도 했기 때문에 반 고흐 스스로 완성작으로 간주했다고 볼 수 있다. 반 고흐는 꽃 정물화를 팔고 싶어했으며 집안, 카페, 레스토랑에 장식용으로 걸어두기에 이상적 이라고 생각했다. 베르나르의 회고에 따르면, 반 고흐는 카페 겸 레스토랑인 르 탱부랭에 꽃 정물화를 중심으로 자신의 그림을 주고 그 대가로 무료로 식사를 했으며 카페 벽에는 반 고흐 그림이 가득했다. 또한 베르나르는 반 고흐가 카페 여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와 연인 관계로 매일 꽃 정물화를 그려 주었다고도 했다.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두 사람 의 관계가 끝이 났을 무렵 르 탱부랭에는 상당히 많은 반 고흐의 작품이 남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거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그림의 최초 소장자로 알려진 사람은 반 고흐가 오베르에 머물 때 그를 돌보았던 의사 폴 가쉐다. 가쉐는 반 고흐 사망 후 테오에게서 이 작품 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Glass of Absinthe and a Carafe(압생트가 담긴 잔과 물병)/Feb.-March, 1887
    압생트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즐겨 마시던 술로, 특히 예술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놓았던 값싸고 도수 높은 술이다. 반 고흐 역시 압생트를 무척 즐겨 마셨으며,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리 를 떠나올 때 자신이 '거의 알코올 중독 상태'였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따라서 1886-1887년 뚤루즈 로트렉이 친구인 반 고흐를 그린 작품 <르 탱부랭 카페>에서 압생 트 잔을 앞에 둔 반 고흐를 묘사한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이 작품에서는 창문 앞쪽으로 테이블이 배치되어 공간감을 살렸다. 그림 속 잔은 창밖의 거리를 보며 외로이 술을 마시는 사람을 상징한다. 압생트의 색이 연한 점과 물병에서 물을 따라놓은 양을 보아 강한 쓴 술맛 을 완화시키려고 술에 물을 타서 희석해 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은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다. 현재 반 고흐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반 고흐의 일본 목판화 컬렉션에는 유사한 구성의 판화가 여러 점 포함되어 있다. 날카로운 사선 구도 역시 일본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Road by the Seine Near Asnieres(아니에르의 센느 강변 길)/May-June, 1887
    이 작품은 앙식적인 면에서 잘 알려진 인상화 화가인 끌로드 모네와 알프레드 시슬리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그림에는 강을 따라 나무를 심어놓은 길이 보이고, 푸른 옷에 밀짚모자를 쓴 남자 가 나무 그늘 아래 걷고 있다. 화가용 푸른 작업복을 자주 입고 밀짚모자를 즐겨 썼던 반 고흐 가 스스로를 그림속에 그려 넣은 것으로 추측된다. 동생 테오의 갤러리에서는 1887년 5월부터 모네의 작품을 팔았고, 반 고흐는 이곳에서 모네의 작품을 보고 그의 작품 스타일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유난히 빠르고 가벼 운 터치를 보인다. 작품의 일부, 특히 수평선 부분이 스케치로 남아있기 때문에 이 작품이 미완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투명해서 구성을 이해하기가 쉽다. 그림 좌측에는 원근 틀을 사용했으며, 강에는 굴곡이 표현되어 있고 나무는 서로 약간씩 가깝게 배치되어 있다. 그림의 제작과정도 이해하기 쉽다. 반 고흐는 그림의 전면을 시작으로 물과 하늘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 줄기, 잎, 걷고 있는 남자, 수평선을 그렸다. 작품 배경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느슨하고 자유로운 붓터치로 보아 반 고흐가 즉석에서 그린 그림으로 보인다.
Trees and Undergrowth(나무와 풀숲)/May-July, 1887
    반 고흐는 파리에 머무는 동안 숲의 전경을 담은 그림을 여러 장 그렸다. 이 작품도 그 중 하나로 그가 인상주의 색채와 빛의 사용을 자유롭게 실험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불과 한 해 전만 하더라도 분명히 자신을 인상파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여러 화가로부터 영향받았음을 보여준다. 작게 끊어지는 점들은 그가 동경하던 점묘법의 대가 쇠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명백히 보여주며, 임파스토는 바르비종파 화가 디아즈 드 라 페냐와 1886년 반 고흐가 알게된 화가 몽티셀리의 작품과 유사하다.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끝없이 이어지는 동일한 색조의 변화를 포착하는 것에 관심을 보이며 나뭇잎의 본질을 묘사하는 데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는 자연을 대단히 사랑한 화가였다. 1887년에 그는 '꽃과 소나무 가지, 담쟁이 덩굴과 산사나무 울타리를 사랑할 줄 아는 것은 멋진 일이다'라고 썼다. 1889년 셍레미 정신병원에 있을 때 그는 담쟁이 덩굴로 뒤덮인 정원 을 여러 번 화폭에 담았는데 이 작품과 마찬가지로 장식적인 느낌이 강하다.
Flowers in a Blue Vase(파란 화병 속의 꽃)/June, 1887
    1886년 여름, 반 고흐는 꽃 정물화를 여러 점 그렸다. 이 작품을 포함하여 그로부터 1년 후 그린 작품들을 비교해 보면, 그가 그동안 많은 진전을 이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1886년 작품 <글라디올러스와 가을 과꽃이 담긴 화병>에 비해 이 작품은 보다 화사하고 생동감 있는 색채로 표현되었다. 반 고흐는 두 그림 모두 보색대비를 활용했지만 채색방식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글라디올러스와 가을 과꽃이 담긴 화병>에서는 몽티셀리의 임파스토와 유사한 기법으로 두껍게 채색한 반면 이 작품에서는 의도적으로 다른 기법으로 채색했다. 긴 사선과 곡선의 느낌을 주는 붓놀림이 인상주의의 짧은 붓터치와 교차하고 있다. 테이블 위의 파란색과 노란색 선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보색의 점과 선을 나란히 사용하고 있다. 두 그림의 소재와 구도는 전통적이지만 이 작품의 붓터치는 현대적으로 보인다.
Self-portrait/Aug.-Sept., 1887
    안트베르펜에 머무는 동안 반 고흐는 돈을 벌 생각에 초상화를 많이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안트베르펜에 많은 초상 사진작가가 있지만 초상화가 사라질 것으로 생각 하지 않는다며 편지를 썼다. 경제적인 이유가 초상화라는 주제 선택에 영향을 미쳤지만 반 고흐는 주로 초상화를 그리기 원했기 때문에 인물 연구작을 자주 그렸다. 그는 사람이 가진 '고유한 특색'을 묘사하는 연습을 하려고 했으며 색채와 붓놀림으로 다양한 실험을 하고자 했다. 반 고흐는 돈이 없었고 모델 또한 부족했기 때문에 자신이 초상화의 주요 모델이 되었다. 밀짚모자를 쓰고 붉은 테두리의 가벼운 양복조끼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묘사한 이 작품은 소묘성이 짙은 작품으로 매우 날카롭게 관찰된 초상화이다.
Grapes(포도)/Sept.-Oct., 1887
    파리에서 머물던 마지막 시기에 반 고흐가 그린 작품 수는 이점보다 현저히 줄었다. 1887년 9월까지 그는 최소 60여 점의 그림을 그린 반면, 그때부터 1888년 2월 아를르로 돌아갈 때까지 그가 그린 작품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소재 선택 또한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 마지막 몇 달간 그는 초상화와 자화상, 정물화 그리고 일본 풍경화 모작 등에 주력했다. 이 작품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물화는 사용된 색채와 기법면에 있어서 연구작으로 불 수 있다. 정물화를 그림으로써 반 고흐는 네덜란드 시기에 그렸던 주제로 회귀하는 듯 보인다. 네덜란드에서 그린 작품에 사용되었던 항토 빛 색채는 파리에서 보색대비로 대체되고 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시기에 완성된 작품들은 자유로운 붓놀림과 밝은 색채의 사용으로 특징지어 진다. 그는 정물화에서 색혼합을 하지 않아 결과적으로 보다 강렬한 색채로 그린다. 또한 채색할 때 짧고 강한 붓 터치와 선을 사용하여 색채가 진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반 고흐의 색채 사용에 나타난 변화는 아마도 베르나르와의 공동작업이 원인일 것이다. 그의 친구이자 젊은 화가였던 베르나르는 1887년 가을 브르타뉴의 퐁타방에서 파리로 돌아왔다. 그 시기 베르나르는 신인상주의를 단념하고 파리에서 현대 회화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추구했다. 베르나르가 주창했던 것은 무엇보다도 소재의 양식화와 밝은 색채의 사용이었다. 반 고흐는 강렬한 색채의 사용이라는 점에 있어서 만큼은 친구와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음에 도 불구하고 이를 자신의 신인상주의 스타일과 결합했다.
Parisian Novels(파리인들의 소설책)/Winter, 1887-1888
    이 작품은 동명의 대작인 <파리인들의 소설책>(개인 소장)을 그리기 위한 연구작이다. 반 고흐는 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가 썼던 편지에는 당시 읽고 있던 책 에 관해 자주 언급하고 있다. 1887년 가을, 그는 '졸라, 플로베르, 기 드 모파상, 드 공쿠르, 리슈팽, 도데, 위스망스 등 프랑스 자연주의 작가들의 작품은 정말 훌륭하다. 이들의 작품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시대를 살아간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썼다. 따라서 이 작품과 후에 제작한 대작 <파리인들의 소설책>은 현대적 삶을 기록한 프랑스 작가들 에 대한 존경으로 볼 수 있다.
III. 아를르 시기(Arles Period:1888. 2-1889. 4): 색채의 발견 Fifteen Sunflowers in a Vase/August, 1888(미전시 작품) National Gallery, London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아를르에 반 고흐가 도착한 때는 60센티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눈이 내리 고 28년 만에 가장 추운 겨울로 기록된 1888년 2월이었다. 반 고흐가 남프랑스의 많은 도시를 두고 왜 하필이면 고대 로마의 유적이 즐비한 론강 하구의 작은 도시 아를르를 택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파리에서 남프랑스로 가야겠다는 열망을 드러낸 이후 한 번도 아를르라는 도시를 언급한 적이 없는 그가 평소 존경하던 세잔느가 거주하던 엑상프로방스나 몽티셀리의 마르세이유가 아닌 낯선 아를르를 택한 이유를 혹자는 아를르에 아름다운 여인이 많을거라는 단순한 상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이런 추측을 뒷받침 하는 것은 아를르 여인들의 외모에 반한 그가 도착 직후 아를르 여인들을 모델로 다수의 여인 초상이나 인물화를 그렸다는 사실 이다. 어쨌든 반 고흐는 아를르에서 보낸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그의 삶에서 가장 격정적인 시기를 보냈을 뿐만 아니라 남프랑스의 뜨거운 태양 아래 모든 정열과 재능을 쏟아 부으면서 태양보다 더 눈부시고 불꽃보다 더 뜨겁고 강렬한 색채회화라는 그의 화가 인생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냈다. 아를르 시기의 주된 작품은 인물화와 풍경화이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모델을 살 수 없는 경제적인 이유로 그의 인물화 작업은 항상 제한적 이었다. 아를르 시기의 인물화는 그가 이전에 대상인물의 내면을 포착하던 데 치중하던 표현 방법과는 달리 색채를 통한 인물화의 완성에 초점을 두면서 다양한 배색실험을 겸한 단일 초상화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히 표현하기보다는 내가 원하는 것을 내 방식대로 강렬하게 표현 하기 위해 나는 색채에 심취되었다.' 1888년 9월 작품 <우체부 조셉 룰랭>과 <까미유 룰랭>은 반 고흐가 아를르에서 그린 대표적인 인물화로 그 해 9월부터 친구가 된 우체국 직원 가족을 모델로 한 작품이다. 그의 예술에 정신적 지주였던 밀레의 동명 작품을 모방한 <씨 뿌리는 사람>은 남프랑스의 뜨거운 햇빛과 반 고흐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색채표현의 절정을 이루는 작품이다. 아를르에서의 그의 꿈은 원대했다. 그는 위대한 색채화가로서의 성공을 예견하면서 죽어야만 빛을 발하는 화가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남프랑스의 아틀리에' 라는 화가 공동체를 꿈꾸며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하고자 적극적인 작업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고갱과의 비극은 이 같은 그의 이상이 빚어낸 결과이다. '노란 집'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그는 10월 23일 파리에서 도착한 고갱을 맞이하고 함께 생활하면서 엄청난 양의 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로부터 두달 후인 12월 23일 그를 떠나려는 고갱에 대한 집착은 급기야 자신의 귀를 자르면서 그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반 고흐의 아를르 시기는 그의 생애에서 작업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시기이자 반 고흐의 주요 걸작들이 탄생하는 풍요로운 시기였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안고 병원을 드나들던 1년 남짓한 아를르에서의 체류기간 동안 자그만치 1백 87점의 유화작품이 제작되었다. 또한 10여 점이 넘는 <해바라기>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Still Life with Potatoes(감자가 있는 정물)/Feb.-March, 1888 Pollard Willows at Sunset(석양의 버드나무)/March, 1888
    반 고흐는 1888년 3월 중순, 아를르와 매우 가까운 지역에서 버드나무를 소재로 한 이 작은 연구작을 그렸다. 버드나무는 아직 잎이 피지 않은 상태였으며, 이 작품에 표현된 밝은 노란색, 오렌지빛 붉은색 그리고 파란색의 색채 표현이다. 반 고흐는 일본 판화를 대단히 동경했다. 파리에 있는 동안 그는 히로시게, 쿠니사다 등 일본 작가의 채색 목판화를 수집했다. 이 작품에는 일본 판화의 여러 특징이 표현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높은 지평선과 깊이감 없는 표현이다. 이 풍경화는 완전한 실제 풍경처럼 보일지 모르 나 하나의 요소는 상상 속에서 나온 것이었다. 바로 석양인데 이것은 실제의 현상이 아니었다. 버드나무 뒤의 푸른 띠로 표현된 알피유산은 아를르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해가 그 방향으로 질 수 없다. 반 고흐는 풍경화에서 정확한 자연의 실제 모습을 담아내려 했지만 목적 에 따라 작품에 변화를 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것은 이미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 자신만의 타협하지 않는 회화 접근법임을 입증해준다. 그에게 강렬한 태양은 프로방스의 특징이었기에 빠질 수 없는 요소였던 것이다.
Peach Tree in Blossom(꽃핀 복숭아나무)/March, 1888 View of Saintes-Maries-de-la-Mer(셍트마리드라메르의 풍경)/June, 1888
    1888년 5월 말에 반 고흐는 마차를 타고 지중해에 있는 셍트마리드라메르라는 해안가로 출발 했다. 카마르그의 평원을 가로지르는 약 다섯 시간의 여정이었다. 그는 셍트마리드라메르에서 나흘간 머무르며 지중해 연안의 빛과 색에 대한 황홀한 감정을 느꼈다. 바다를 바라보면서 반 고흐는 남쪽 지방에 머무르며 일본 판화에서와 같은 밝은 색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두 점의 바다풍경 작품과 마을 전경을 담은 이 작품을 포함 한 세 점의 그림을 그렸다. 교회가 마을 전경 위로 솟아 있는 가운데 드렌테에 있던 잔디로 덮인 지붕의 시골집을 연상하게 하는 특유의 오두막집이 그림의 중앙에 묘사되어 있다. 라벤더 꽃밭이 원래는 조금 더 붉은 색조를 띠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가 표현하고 있는 색채는 해안가로 오기 전 아를르에서 그린 작품들보다 훨씬 부드럽다. 그리고 셍트마리에서 돌아오고 난 뒤 드로잉을 바탕으로 그린 회화작품에서도 더욱 밝고 대비 되는 색채가 선택되었다. 반 고흐는 그림에 색채 대비를 사용하면서도 밝은 노란색, 오렌지 빛 붉은색, 그리고 푸른 보라색 등 이전보다 부드러운 색조를 선택했다. 화면에서 두드러지는 요소는 바로 시골집인데 검은 지붕을 비추는 흰색으로 표현된 빛 때문이다. 하늘은 나머지 색채와 대비되지 않는 파란색, 연한 녹색과 흰색의 조합으로 신중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가 하늘을 표현하는 데에 많은 고민을 한 것으로 보인다.
Seascape Near Saintes-Maries-de-la-Mer/June, 1888 셍트마리드라메르의 바다 풍경 The Sower(씨 뿌리는 사람)/June 1888
    이 작품은 반 고흐가 아를르에서 그린 야심작 중 하나였으나, 그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를 가져 왔다. 그는 이 그림을 1888년 6월 중순 경에 과수에 이은 밀밭 연작의 하나로 계획했다. 당시는 수확기여서 반 고흐는 풍성한 밀밭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다. 밀 짚단과 추수를 소재 로 10여 점의 회화와 다섯점의 스케치를 그리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구성회화'라 는 점에서 계획한 연작에서 제외되었다. 밀밭은 실경을 보고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파종 시기가 2월과 10월이었음을 감안할 때 씨 뿌리는 사람은 상상으로 그려진 인물일 것이다. 밀밭이라는 소재는 반 고흐에게 눈부신 노란색과 선명한 파란색 그리고 밝은 녹색을 탐닉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반 고흐는 이 작품에서 매우 화려하고 현실적이지 않은 색을 선택하였으며, 도시에 '불 타는 듯한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1885년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그는 밭을 일구는 농부라는 주제와 그에게 대단히 모범이 되었던 화가 밀레에 게 돌아갔다. 견습생 시절 반 고흐는 종종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모사한 작품을 그렸으 며, 훗날 밭에서 씨 뿌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곤 했다. 그는 자신만의 현대적 색채로 밀레의 주제를 모방한 그림을 시도하고 있다. 반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작품과 그보다 더 신인 상주의 화가들인 쇠라와 풀 시냐크의 작품에 영향을 받았다. 들라크루아가 자주 사용한 색상 대비를 철저하게 받아들여 파란색과 노란색, 오렌지색과 보라색, 그리고 녹색과 붉은색 등 보색을 작은 반점과 선으로 나란히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보라색과 노란색 간의 과도한 대비를 추구하고 있다. 반 고흐는 전통적 주제를 현대적 기법으로 표현하는 시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구도와 색 배합을 자주 바꿔서 임파스토가 점점 두껍고 거칠어졌으며 보색 간에 경계를 지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이 작품을 실패작으로 결론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 뿌리는 사람이라는 소재는 계속해서 그를 매료시켰고 이러한 소재로 자주 돌아왔다.
The Yellow House(The Street:노란 집)/September, 1888
    이 유명한 그림은 아를르의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건물을 묘사하고 있다. 반 고흐는 1888년 5월 1일부터 이 건물 오른쪽 방을 작업실로 임대했고 9월 중순 그곳으로 이사했다. 그가 '작은 노란 집'이라고 불렀던 이 집은 그가 드로잉과 회화를 그리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었다. 7월 말부터 그는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 과 공원의 풍경, 그리고 초상화 등 이 집을 장식할 장식용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반 고흐는 이 집을 작가들의 은신처로 만들고자 했으며 아를르로 오겠다고 약속한 자신의 친구 고갱을 몹시 기다리기도 했다. 반 고흐는 며칠간 지속되던 화창한 날씨를 충분히 즐겼 다. 그는 작품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느껴 커다란 캔버스를 차례차례 완성해 나갔 다. 그는 '햇살, 화창한 날씨, 푸른 하늘'은 '화가의 낙원'을 위한 요소라고 했다. 이 작품은 그가 말한 매우 단순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그리는 것에서 얻는 그의 고양된 마음 과 커다란 기쁨을 나타낸다. 반 고흐는 자신이 살던 집을 '레몬빛 태양과 순수한 코발트색 하늘 아래' 그렸다. 그는 이것이 어려운 소재라고 하면서 '노란 집들은 태양 아래 있고, 비할 데 없는 순수한 파란색은 참으로 굉장하다'라고 썼다. 반 고흐는 베르나르에게 쓴 편지에서 이 그림에 '거리'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이는 아마도 테오가 그에게 보낸 잡지에 실려있던 파리 거리의 풍경을 그린 장 프랑수아 라파엘리의 동명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것 이라 추정된다. 반 고흐는 장식적인 효과를 강조하는 작품군의 일부로 제작된 작품에는 일반적인 제목(별이 빛나는 밤, 밭이랑, 포도밭)을 붙였는데 이는 프로방스의 특징을 요약 하려 한 것이다. 이 작품의 거리에서 눈에 띄는 모래더미는 가스등 설치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아를르의 문서 보관소에는 이에 대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Portrait of a Man(남자의 초상)/December, 1888
    이 작품에서 초상화 모델의 정확한 신원은 알 수 없지만 반 고흐는 캐리커처처럼, 대가다운 솜씨로 자신감 넘치는 남자의 강한 인상을 성공적으로 작품 속에 영원히 남겼다. 녹색 빛을 띠는 노란색 배경과 얼굴의 왼쪽을 비추는 밝은 불빛은 반 고흐가 가스등 불빛 아래 에서 초상화를 그렸다는 근거를 강력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반 고흐는 특히 고갱이 올 것에 대비해 저녁에도 작업할 수 있도록 작업실에 가스등을 설치해 놓았다. 1888년 10월 말 반 고흐는 테오에게 '가스등이 밝히고 있는 인물의 초상화는 언제나 내 관심을 끈다'라고 썼는데, 이 작품에서 그와 같은 아이디어를 실험한 것으로 보인다.
Portrait of Camille Roulin(까미유 룰랭)/Decebmer, 1888
    1888년 12월 반 고흐는 조셉 룰랭 일가족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 작품은 11살 소년 까미유 룰랭의 초상화로 단체 초상보다는 개별 인물의 초상을 추구했다. 조셉 룰랭은 아를르에서 반 고흐의 좋은 친구였다. 그는 1888년 7월 말 이미 반 고흐의 모델 이 되었으며, 12월에는 가족 전체가 반 고흐의 화실로 향했다. 그때 고갱도 룰랭의 아내 오귀스틴과 4달 된 아기 마르셀을 그렸다. 반 고흐는 다양한 가족 구성원을 모델로 총 17점 의 초상화를 그렸다. 반 고흐는 까미유 룰랭의 초상을 두 가지 버전으로 그렸는데, 하나는 룰랭가를 위한 그림이었고 다른 하나는 테오와 자신이 소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테오에게 보낸 <까미유 룰랭>에서는 배경과 얼굴에 사용된 노란 색조를 비롯하여 얼굴을 채 우는 빛의 표현이라든지 모자와 코트가 특히 눈에 띈다. 이 노란 색조에 대한 가장 논리적인 설명은 반 고흐가 초상화를 저녁에 그렸으며 이 색이 화실에 설치한 가스등이 비춘 결과라는 것이다.
A Crab on Its Back(뒤집어진 게가 있는 정물)/1888-1889
    이 작품은 명확하지 않은 배경 위에 배를 보이며 뒤집어져 있는 게를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이 작품에서 붓놀림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는데, 게의 몸체에는 소묘와 같은 붓놀림 을, 배경에는 흐르는 듯한 획과 선, 교차하는 듯한 붓 터치로 표현했다. 이 연구작의 주요 목적은 붉은색과 녹색의 대비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으나, 게가 굉장히 수준 높게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반 고흐가 게를 해부학적으로 흥미롭게 생각했으며 최대한 현실적으로 관찰하여 그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주제로 게 두 마리가 있는 더 큰 정물화도 그렸다. 일반적인 추정에 따르면 반 고흐가 1889년 1월 초 병원에서 퇴원 하면서 다시금 작품 제작에 익숙해지기 위해 몇 점의 정물화를 그릴 때 두 작품 모두 그려졌으 며, 아를르 시기 후반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Postman Joseph-Etienne Roulin(우체부 조셉 룰랭)/February-March, 1889
    반 고흐가 조셉 룰랭을 그린 여섯 점의 초상 가운데 하나이다. 반 고흐는 룰랭을 '우체부'라고 불렀으나 엄밀히 말해 룰랭은 우체부가 아니었다. 룰랭은 아를르역의 우편물 저장소에서 일했 는데, 우편물을 기차로 발송하거나 수령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1888년 7월 말 룰랭은 처음 으로 반 고흐의 모델이 되었으며 여동생 빌레민에게 쓴 편지에서 반 고흐는 그를 열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소크라테스 같은 머리에 코는 거의 없고 높은 이마와 대머리에 작은 회색 눈, 진한 색 볼, 커다란 수염과 희끗희끗한 머리에 큰 귀를 가졌다. 열성적인 공화당에 사회주의자 고, 논리적 사고가 뛰어난 해박한 사람이다.' 다시 말해 반 고흐의 마음에 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둘은 친구가 되었으며 반 고흐가 룰랭은 '알코올 중독자 같은 사람'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둘이 카페에서 상당한 시간을 함께 보냈음이 틀림없다. 아를르에 정착한 초기부터 반 고흐는 인생의 무상함과 인간이라는 개체를 초월한 초상화를 표현하고자 했다. 룰랭이 그의 모델이 되면서 1888년 7월 말, 그는 드디어 기회를 갖게 되었다. 반 고흐는 그가 의자에 앉은 모습을 담은 커다란 회화를 그렸으며, 룰랭 일가가 12월에 모델이 되어주었을 때 그의 얼굴을 또 한번 그렸다. 이 초상화는 반 고흐가 1889년 2월에서 3월 사이 에 커다란 초상화를 보고 그린 세 개의 얼굴 그림들 중 하나이다. 당시 룰랭은 이미 마르세이 유로 이사하고 난 후였으므로 더 이상 모델이 되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룰랭의 아내 오귀스틴을 위해 세점의 그림 중 두 번째일 것으로 추정된다. 반 고흐는 오귀스틴을 위해 양귀비, 수레국화, 데이지 등 여름 꽃을 모티브로 배경을 채웠다.
Tchaikovsky/Nocturne Op.19, No.4 -Cont'd-
출처 : 불멸의 화가(Voyage Into The Myth):반 고흐(Vincent van Gogh)展, 2007 (1)
글쓴이 : isadora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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