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스크랩] 불멸의 화가(Voyage Into The Myth):반 고흐(Vincent van Gogh)展, 2007 (2)

은초록별 2008. 2. 5. 08:37



Voyage Into The Myth
Vincent van Gogh 展
Seoul-Korea, 2007



Self-Portrait/Sept., 1889/Musee d'Orsay, Paris(미전시 작품)
IV. 셍레미 시기(Saint-Remy de Provence Period:1889. 5-1890. 5): 
자연으로 돌아가라

The Starry Night, Saint-Remy/June, 1889(미전시 작품)
    아를르 시기가 반 고흐의 예술에 있어 색채 발견을 통한 인간애의 실현과 좌절이었다면 셍 레미(Saint-Remy de Provence)에서의 1년은 위대한 자연의 발견인 동시에 색채회화가 완성 되는 시기이다. 자연의 빛과 형태를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양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회화 를 통한 구원의 길로 접어든 시기이다. 셍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차츰 안정을 찾아 가면서 새롭게 시작된 작업에서 색채는 아를르 시기에 비해 더 절제되고 차분한 색을 사용 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예고 없는 발작이 반복되면서 형태적인 측면 에서는 반 고흐의 그림을 특징짓는 강력하고 불타는 듯한 붓놀림의 작품들이 두드러지기 시작하는데 올리브 밭이나 들판을 그린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물화와 정물화에서 도 이 같은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 <아이리스>는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과 더불어 셍레미 시기의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다. 힘든 병마와의 사투를 벌이면서 계속된 작업에서 반 고흐는 종교적 귀의를 암시하는 두 점 의 걸작을 만들어냈는데, 정열적 표현에 존경을 마다않던 낭만주의 회화의 대가 들라크루 아의 작품을 모방한 <착한 사마리아인>과 <피에타>가 대표적이다. 인간으로부터의 사랑에 목말랐던 그에게 모든 것이 거부되었고 그가 사랑한 모든 이들이 그를 거부했다. 그가 원했던 여인들이 그러했고 그가 예술에 몸 바치면서 꿈꾸어 왔던 이상마저 절친한 친구 고갱에 의해 무너져버렸다. 그리고 스스로 미쳐버리고 싶었고 '나는 미쳤다'라고 울부짖을 만큼 처절한 현실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그림 속에 자신을 가두어 버렸다. 구원의 길은 오직 그림 속에만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그림을 통해 이제 순교자인양 신 의 아들이 되고 싶었고 신의 손길을 그리워했다. 이러한 사실은 들라크루아를 모방한 작품은 단순한 배색에 대한 기법적인 시도를 넘어 반 고흐의 영혼 깊이 자리한 구원에 대한 염원을 대변하는 작품이라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1889년 9월 벨기에 브뤼셀의 살롱전에 출품된 그의 작품 <붉은 포도밭>(현재 모스크바 푸쉬킨 미술관 소장)이 안나 보쉬에게 400프랑에 팔린다. 이것이 그의 생전에 판매된 유일 한 유화작품이 되었다. 셍레미의 정신병원에 머무는 동안 반 고흐는 여섯 번의 발작을 경험한다. 놀라운 것은 이 같은 정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사용된 색채나 주제는 현실적 고통과는 너무나 판이한 느낌이라는 것이다. 셍레미 시기의 작품에서는 그 를 짓누르는 조울증을 찾아볼 수 없다. 정신적 고통을 작업에 대한 의지로 이겨내면서 예술가적 사명에 충실했던 그의 작품은 오히려 거칠고 강렬한 붓터치를 통해 응어리진 현실의 고통을 더 깊고 강하게 그러나 화려하게 표현했다고 할 수 있다.
The Garden of the Asylum at Saint-Remy(셍레미 병원의 정원)/May, 1889
    1889년 5월 8일, 반 고흐는 아를르에서 셍레미 드 프로방스로 여행했는데, 이곳에서 그는 셍폴드모졸 병원에 자진 입원한다. 여러 번 발작을 일으킨 뒤 반 고흐는 스스로 살아가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첫 주에 반 고흐는 병원 밖으로 나가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원과 방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스케치했다. 병원에 도착한 지 두 주 만에 반 고흐는 네 점의 큰 캔버스와 두세 점의 드로잉을 완성했다. 정원의 한 귀퉁이 와 남자 환자를 수용하는 북쪽 병동을 묘사한 이 작품도 네 점의 캔버스 중 하나이다. 모든 것이 만개할 때였기에 정원은 커다란 보라색 아이리스, 키 큰 소나무 그리고 장미 덩굴과 라일락 등의 풍부한 소재를 제공해 주었다. 반 고흐는 임파스토와 다양한 색을 이용하여 표현된 만개한 수목과 덩굴을 간결하고 굉장히 부드럽게 채색된 건물과 대비 시켰다. 작업 과정의 대부분이 실경을 관찰하여 덧칠기법으로 그렸지만, 캔버스가 거의 말랐을 때 짙은 파란색과 붉은 물감으로 여러 곳에 액센트를 주어 구도의 균형을 맞추 었다. 이 시기에 반 고흐는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는 일이 드물었지만 이 작품에는 자신의 이름을 넣어 이 작품이 만족스러웠으며 완성된 작품으로 간주했음을 알려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오에게 그림을 보내면서 이 작품과 또 다른 정원의 풍경화에 대해 '그림의 소재라기보다는 자연의 연구작'이라고 설명했다.
Entrance to a Quarry(채석장 가는 길)/July-Aug., 1889
    채석장은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올리브나무와 소나무, 사이프러스로 뒤덮인 바위산 아래 위치해 있었다. 밝고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넓은 평야가 나무로 둘러싸인 좁은 산길을 고립시키고 있다. 산 정상의 올리브나무 사이로 푸른 하늘이 보인다. 특히 이 표현법은 프로방스 지방의 대표적인 나무 사이프러스를 두드러지게 하는데 성공 적이었다. 작품 속 바위와 식물은 반추상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전반적인 풍경의 표현에는 깊이가 거의 없다. 산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반 고흐가 직접 산으로 간 것은 이 작품이 최초였다. 몇달 후 그는 동일한 장소를 다시 그렸는데 '일본 데생과 같이 붉은 빛을 띠는 흙에 창백하고 엷은 자색의 바위'로 그렸다고 베르나르에게 말했다. 이 첫 번째 <채석장 가는 길> 또한 어두운 윤곽선과 넓게 채색된 부분이 만들어낸 화면 구성으로 인해 일본 판화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반 고흐는 이러한 작품들을 통해 베르나 르와 고갱이 추구하는 예술과 관계를 가지고자 했다.
Pieta(After Delacroix:피에타, 들라크루아 모작)/Sept., 1889
    한 달 이상 병마와 힘겨운 사투를 벌인 후, 1889년 9월 초 반 고흐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발작을 일켰을 때 물감을 먹고 테레핀유를 마셔 음독자살을 시도했기 때문에 의사는 병원 밖에서 작품활동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반 고흐는 방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자화상 그리고 이전에 했던 연구작들을 손질하는 작업을 했다. 같은 달 반 고흐는 들라크루아와 밀레의 판화를 모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러한 작업은 모델이 없더라도 인물 연구에 열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에게 '본질을 포착하여 단순화'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모작은 또한 장식용으로도 쓰였다. 한 예로 반 고흐는 이 작품을 자신의 병실에 걸어둘 용도로 제작한 것이었다. 발작을 일으켰을 때 들라크루아의 그림을 모사한 석판에 기름과 물감이 떨어져 손상되었 기 때문에 반 고흐는 다시 모작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작은 크기의 스케치를 그리기 시작했고 이후 더 큰 크기의 이 작품을 그렸다. 모작에서 반 고흐는 들라크루아의 색을 사용하고 있는데 바로 노란색과 파란색이라는 보색이다. 들라크루아가 <피에타>에 표현 된 빛을 마음 깊은 곳의 순수한 크롬옐로로 그리고 그림자를 감청색으로 채색했다는 주장에 따라, 반 고흐는 마리아에게 진한 푸른색의 외투를 입혔고 죽은 예수를 밝은 노란색으로 표현했다. 또한 동일한 색채를 배경인 하늘과 바위에도 사용했다. 예수의 붉은 머리카락과 수염 때문에 자신을 고통 받는 예수와 동일화한 것으로 반 고흐 의 자화상으로 종종 해석되기도 한다. 그는 테오에게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너무나 많은 화가들'을 생각한다며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종교적 상념은 나에게 큰 위안이 된다'고 썼다. 반 고흐는 '잠 못들고 고뇌하고 눈물을 흘리다 지친 사람의 상실감이 가득하고 흐릿하게 응시'하고 있는 마리아와도 자신을 동일화 했을 것이다.
Portrait of a One-eyed Man(외눈박이 신사)/Oct., 1889
    반 고흐는 초상화가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아를르에서 그는 이 장르로 인정받고 싶어했다. 자신이 현대미술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거의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셍레미에서 반 고흐는 초상화라는 분야에 대한 야망을 여전히 품고 있었다. 한쪽 눈이 불편한 신원불명의 남자를 그린 이 초상화는 셍레미 시절 반 고흐의 전형적인 회화 스타일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셀 수 없이 많은 평행한 붓놀림을 볼 수 있다.
The Sower(after Millet)/Oct.-Nov., 1889
    1889년 9월 반 고흐는 밀레와 들라크루아의 판화를 모사한 일련의 작품을 그렸다. 그는 이 작업을 너무도 즐겨 테오에게 더 많은 판화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10월 말 무렵 주문했던 판화를 받은 즉시 반 고흐는 모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밀레의 에칭 작품 <씨 뿌리는 사람>을 모사한 이 작품이다. 셍레미에서 밀레의 판화를 모사한 두 작품은 아를르 시절에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보다 현대적이고 다양한 색으로 채식한 버전의 연속으로 그의 야심이 지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반 고흐가 실제로 밀레의 대작을 본적은 없지만 주 색채가 회색이었다고 추정한 듯 하다. 이 작품은 계속해서 덧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작품을 제대로 표현하 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원본은 훨씬 맑았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훗날 캔 버스 천을 덧대는 과정에서 바닥재가 어두운 자줏빛 갈색으로 변색되어 군데군데 그을린 듯한 효과를 준다.
A Pair of Leather Clogs(가죽 나막신)/October-Novemer 1889
    그동안 이 작품이 그려진 시기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1889년 가을 셍레미에서 그려진 것이라고 추정되는 이유는 평행한 선과 황토 색조의 사용이 같은 시기에 그려졌던 다른 작품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반 고흐는 일생동안 신발 정물화를 총 일곱 점을 그렸는데, 그 중 다섯 점은 파리에서, 한 점은 아를르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정물화를 셍레미 에서 그렸다. 파리 시절 그린 신발 정물화에서는 갈색, 검정색, 흰색이 지배적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다량의 황토색과 녹색 그리고 붉은 색을 더한 보다 밝은 색조를 선택하여 어두운 색의 신발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신발은 그 자체만의 소재로 그림에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이러한 신발이 있는 정물화들이 반 고흐의 간소함에 대한 관심과 시골 노동자들의 힘든 삶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물론 신발은 일상생활의 쉬운 소재였으며 실내작업을 해야 할 때 마침 꽃이나 다른 정물 화의 소재가 없을 때 그리기 쉬운 소재이기도 했다.
Path in the Garden of the Asylum(병원 정원의 오솔길)/Nov., 1889
    이 풍경화는 1889년 11월 반 고흐가 정신병원의 정원에서 그렸던 10여 점의 가을 연구작 중 하나이다. 파리에서 배송되어 올 새로운 물감을 기다리면서 10월 대부분을 작업만 하며 보낸 결과, 나무 연구작이 여러 점 탄생하였다. 추가로 주문했던 황토색 물감이 든 소포가 도착하자마자 가을 효과를 내는 작업에 바로 착수했다. 반 고흐는 황토색을 선호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말했듯이 네덜란드 시기에 사용했던 색채로의 회귀를 의미 하는 것이었다. 파리와 아를르에서 무절제한 색채를 사용했던 반 고흐는 이후 셍레미 에서는 '단순한 색채를 다시 사용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차분 한 붉은색, 갈색, 홍토색 빛을 표현했고 푸른색과 녹색의 붓터치로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이 연구작에서 반 고흐는 정원을 가로지르는 길과 길을 따라 서있는 키 큰 소나무 나무 줄기에 중점을 두었다. 길을 표현하는 데에는 다양한 양식의 구불거리 는 붓놀림을 그림에서 잘라 버렸는데, 이는 이전에 나무를 그릴 때 그가 사용했던 일본 판화에서 따온 구도적 장치였다. 소나무의 억세고 울퉁불퉁한 줄기가 그를 매료 시켰던 것임이 틀림없다. 여러 점의 가을 연구작에서 소나무 줄기는 주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으며 잎과 가지보다는 줄기에 더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구도를 잡는 과정 에서 반 고흐는 낮은 담에 앉아 나무에 기대고 있는 파란 옷의 남자를 그려 넣었는데, 이는 주변의 붉은 갈색과 대비를 이루면서 풍경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적인 방법 이다.
Wheat Fields in a Mountainous Landscape(산이 있는 밀밭)/Nov.-Dec., 1889
    반 고흐는 이 그림을 매우 특이한 바닥재 위에 그렸는데, 바로 식탁보로 보이는 면 조각 이었다. 채색되지 않은 부분에는 아직도 빨간 체크무늬가 선명하게 보인다. 반 고흐는 병원의 정원과 올리브 과수원을 쉬지 않고 그린 결과 11월 말 무렵에는 캔버스 를 모두 소비해버렸다. 그는 테오에게 사이프러스와 산을 그릴 수 있도록 십미터 분량의 캔버스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사이프러스와 산은 내가 프로방스 여기저기에서 한 작품의 핵심인 것 같다'고 썼다. '산'이라는 것은 셍레미 근처의 알피유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는데, 알피유 없이는 셍레미 의 풍경이 상당히 평면적이었을 것이다. 1889년 7월 반 고흐는 처음으로 산을 그리는 데 에 매료되었고 밀밭을 주제로 한 그림을 비롯한 다른 그림의 구도를 잡을 때에도 배경으 로 종종 사용하곤 했다. 이 그림에서 알피유산은 더욱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지만, 그래도 주된 모티브라기보다는 배경으로서의 기능을 하고 있다. 반 고흐는 밀밭과 잎을 표현하 는데 녹색과 황토색을 그리고 산은 푸른 빛을 띠는 보라색을 썼으며, 이는 녹색 빛 나는 노란색 하늘과 대비되는 것이다. 당시 작품의 붉은색은 더욱 밝았으나 연한 자주빛으로 탈색되어 대비 효과가 줄어들었고 전반적으로 차분한 느낌을 주게 되었다.
Olive Grove with Two Olive Pickers/December, 1889 올리브 따는 두 인부가 있는 올리브 과수원 Still Life: Vase with Irises Against a Yellow Background(아이리스) May, 1890
    1890년 2월 말부터 4월 말까지 오랜 기간 발작과의 싸움을 한 반 고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마침내 병에서 회복되었을 때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채우려는 듯 그리고 병마가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듯 많은 양의 캔버스를 매우 빠른 속도로 그려나갔다. 그 사이 그는 병원을 떠나 북부 프랑스로 돌아갈 결심을 했으며 5월 16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가 떠나기 전 그린 십여 점의 그림은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과 <아이리스> 등 뛰어난 작품을 포함하고 있다. 반 고흐가 1년 전 병원에 도착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리스는 만개해 있었다. 셍레미에서 반 고흐가 그렸던 첫 작품인 가까이서 그린 정원에 핀 보라색 아이리스(게티센터, LA 소장)의 정물화는 1889년 9월 파리의 전시회에 전시되었으며 호평을 받았다. 동일한 소재로 돌아온 반 고흐는 이번 에는 화병에 꽂힌 아이리스를 그렸다. 배경과 화병의 구도와 색채는 그가 1888년과 1889년 아를르에서 그렸던 해바라기 정물화의 뒤를 따르고 있다. 해바라기 정물은 노란 색조로 된 다양한 빛의 효과의 연습이었다.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과 오렌지빛 노란색의 보색 대비를 사용하고 있다. 대칭을 피하기 위해 그는 화병 오른쪽에 껶여서 축 늘어져 있는 줄기를 그렸다. 이 작품은 초상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놀랍도록 서로 다른 대비를 통해 서로를 강화하면서 보완하는 효과'를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The Good Samaritan(After Delacroix)/May, 1890 착한 사마리아인(들라크루아 모작)
    반 고흐는 아를르의 병원에 머물 때 병실에 걸어두었던 들라크루아의 <피에타>와 <착한 사마리아인>의 석판화를 셍레미로 가져가 그곳에서 그것들을 모사한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은 <피에타>와 마찬가지로 파란색이 주로 사용되었지만, 이것은 노란색과 보색 대비를 이루는 보완적인 색이 아니라 다른 여러 색상들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파란색 이다. 그는 바위를 표현하는 데 청보라색을 썼고 알피유산이 굽이치는 모습으로 그렸다. 이 작품에서 색채보다도 더욱 중요한 것은 반 고흐의 붓놀림이다. 그는 구불거리는 선 과 짧고 평행한 터치를 사용함으로써 인물에 양감을 불어넣고 풍경에 깊이를 주려고 했다. 데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도 반 고흐가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동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889년 여름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풍경화들에서 반 고흐는 고도로 양식 화된 선 다루는 기법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그림들에 대해 반 고흐는 '구성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 과장되었고, 고대 목판화와 같이 선이 왜곡되어 있다'고 썻다. 테오는 이와 같은 그의 의견에 회의적이었고, 반 고흐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들라크루아의 풍경화을 인용했는데, 반 고흐에 따르면 그 그림들에서는 '매스의 얽힘' 역시 데생의 한 양식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이 작품에서는 말에 태워지고 있는 남자에서 이러한 매스의 얽힘이 있는 그대로 보여진다. 이 장면은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인 이야기 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교도의 남자가 강도를 당하고 죽게 내버려진 한 여행객을 만난다. 사마리아인은 여행객을 도움으로써 희생자를 거둘떠보지도 않고 지나쳤던 성직 자와 고위 관료보다 더 많은 자비심을 보여준다.
Sorrowful Old Man(At Eternity's Gate)/May, 1890 비탄에 잠긴 노인(영원의 문에서)
    반 고흐는 셍레미에서 보냈던 후반기에는 북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더욱 커졌다. 그는 반복적이고 점점 더 긴 시간 지속되는 발작으로 인해 낙담한 상태였고 환자와 간호사 들 틈에서 불편함을 느꼈다. 1889년 9월에 이미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였 으며, 작품에서도 네덜란드 시기의 주제로 점점 더 돌아가고 있었다. 셍레미에서 마지막 발작이 일어난 시기(1889년 2월 말에서 4월 말까지) 중 의식이 돌아온 동안에 그는 광부와 밭에서 일하는 씨 뿌리는 사람들을 그렸고 그가 '북에 대한 회상'이라 고 명명한 농가가 있는 세 점의 풍경화를 그렸다. 그는 5월 초 발작에서 회복하면서 다시 모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명한 거장의 그림을 모사했을 뿐 아니라 반 고흐는 테오에게 자신이 그렸던 옛 인물 데생들도 보내달라고 요청 했는데, 이는 네덜란드 시기에 그렸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위해 사용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테오는 <영원의 문에서>의 석판화 한 점을 반 고흐에게 보냈을 것을 추정되는데, 그 그림이 이 작품의 밑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화인 이 작품에서 반 고흐는 모델의 자세를 조금 수정하였으며 공간 구성에 변화를 주었다. 또한 부드러운 보랏빛 파란색과 황록색의 가벼운 보색대비를 사용했으며 석판에서의 각진 선보다는 둥글고 짙은 파란색의 윤곽선으로 인물을 그려냈다.
Country Road in Provence by Night(Road with Cypress and Star)/May, 1890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아를르에서 반 고흐가 과수원과 밀밭에 주력했던 것과 같이 셍레미에서는 올리브 과수원 과 사이프러스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전원 작품에 두 개의 새로운 전형적인 이미지를 추가 하게 되었다. 반 고흐는 올리브 과수원을 주제로 한 열다섯 점 정도의 유화작품을 제작하 였고, 사이프러스 연작은 지속적으로 그리려고 하였으나 결국 원했던 것 보다 적은 수의 그림을 그리는데 그치고 말았다. 가지 친 버드나무가 네덜란드 풍경의 특징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반 고흐는 올리브 나무와 사이프러스가 남부 프랑스 풍경을 특징짓는다고 생각 했다. 또한 그는 해바라기 역시 남프랑스의 특징적 소재라 생각하였고, 해바라기에서 빛의 효과를 포착하고자 했다. 사이프러스는 '크게 순환하는 공기의 흐름을 타고 움직이는, 푸른색에 둘러싸인 검은 부호'와 같았다. 사이프러스가 가진 색과 선은 반 고흐를 매료시 켰다. 그것은 그림으로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었으며 셍레미를 떠난 직후 반 고흐는 '사이프러스의 상징적 언어를 나보다 유능하고 더 나은 이들이 표현하길 바란다'고 썼다. 반 고흐가 셍레미에서 그린 마지막 그림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 풍경화에서 그는 다시금 사이프러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작품은 순전히 상상력으로 그렸으며 셍레미에서 반 고흐가 그린 다양한 주제들-밀밭, 사이프러스, 알피유산,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병마와 싸울 때 '북에 대한 회상'으로 그렸던 뒷배경에 보이는 초가지붕 농가-의 종합체로 간주될 수 있다. 고갱에게 보내려고 했으나 결국 보내지 않고 미완성으로 남은 편지에서 반 고흐 는 자신의 '마지막 시도'라 말하며 이 그림에 대해 상세히 적는다. 즉, 상상력으로 그림을 그리는 마지막 시도라는 것이다. 아를르에서 함께 그림을 그리는 동안 반 고흐는 고갱의 고집에 따라 이러한 기법을 실험해 보았지만 그 이후 다시 직접 관찰 기법으로 돌아갔다. 상상을 통해 작품을 그리고 고갱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자 했던 것은 다시금 고갱과 작품을 해보고 싶었던 그의 바람과도 연관지울 수 있다. 그것은 어쨌든 그 시기에 반 고흐가 조심 스럽게 추구한 바이지만 결국 이루어지지 못한 채로 끝났다.
V. 오베르 시기(Auvers-sur-Oise Period:1890. 5-7): 나는 아무 쓸모없는 인간인가 Portrait of Dr. Gachet/June, 1890(미전시 작품)
    남프랑스의 꿈을 접고 북부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파리 북쪽 35킬로 정도 떨어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에 반 고흐가 도착한 때는 1890년 5월 20일 오후 2시 반경 이다. 오베르 마을의 시청 앞에 자리한 라부(Ravoux)여인숙에서 다락방을 얻고 의사 가셰 의 보호 아래 시작된 오베르에서의 생활은 그림 그리기가 전부였다. 도착한 지 3일 만에 <꽃이 핀 밤나무>를 비롯한 네 점의 그림을 완성했으며 생의 마지막 70일을 보낸 오베르에서는 무려 80여 점의 유화작품을 그려냈다. 남프랑스의 따사하고 태양빛 가득한 노랗고 붉은 색채들은 오베르에 와서는 다소 냉기를 머금은 녹색과 파란 색조로 대체됐다. 오베르의 농가와 들판이 주는 봄기운을 굵은 곡선이 윤곽을 이루는 독특한 필치로 정감 있게 표현한 작품들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또한 소재의 표현에 있어서 더 세밀한 묘사를 보여주는데, 작품 <밀 이삭>은 이 같은 기법으로 완성된 작품 이다. 헤이그에서 시작된 인물화에 대한 집착은 파리와 남프랑스를 거쳐 오베르에서도 계속되는데 하숙집 주인 딸을 그린 세 점의 <아들린느 라부>의 초상에서는 녹색과 파란색 의 대비를 통해 아직도 그의 색채 실험이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경매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면서 세계미술시장을 떠들썩하게 한 작품 <의사 가셰의 초상>에서는 녹색 에서 군청색으로 변이과정을 단계적으로 처리하면서 차갑고 어두운 색, 고향의 색깔로 회귀를 암시하는 듯하다.
Portrait of Adeline Ravoux/June, 1890(미전시 작품) Wheat Field Under Threatening Skies(까마귀가 있는 밀밭)/1890(미전시 작품)
    오베르에서 반 고흐가 7월초부터 그린 마지막 작품들에는 직사각형의 수평적 캔버스를 사용한 독특한 규격이 등장하는데 특히 밀밭을 주된 소재로 다룬 풍경화에 사용된 캔버스 의 모양이 주목된다. 풍경화에 다소 의외적인 규격의 캔버스를 사용한 것은 반 고흐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강조하기 위해' 채택한 형태라고 했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그의 생애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7월 27일 그는 자살을 시도하고 이틀 후인 7월 29일에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다. 흔히들 이 작품이 그의 자살을 암시하고 있다고 하는데, 같은 주제와 양식의 그림은 바르비종파의 전통적 구성에서 흔히 볼 수 있기에 그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더구나 그가 죽을 때 몸에 지니고 있던 7월 23일자 동생 테오에게 쓴 마지막 편지에서는 그림에 대한 더 많은 구상이 있으니 새로운 캔버스와 물감을 보내달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70일간의 오베르 생활을 끝으로 비운 의 삶을 마감했다. 현실은 비록 어두었지만 그의 그림은 어둠을 뚫고 찬란한 빛의 색채로 장식되어 불꽃같은 10년의 세월을 통해 살아서 못 다한 인류애와 진정한 예술의 의미를 세상에 되새겨주고 있다.
Chestnut Trees in Blossom(꽃이 핀 밤나무)/May, 1890
    1890년 5월 16일 반 고흐는 셍레미의 병원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파리에서 그는 테오와 사흘간 지냈다. 두 형제는 거의 18개월 만에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었고 반 고흐는 제수인 요안나와 자신의 이름을 딴 네 달 된 조카 빈센트와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원래는 두 주 동안 머무를 계획이었으나 도시의 부산함이 그에게는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다시 작품을 시작하길 바라고 있었으므로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35 킬로미터 떨어진 오베르 쉬르 우아즈라는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테오는 형을 돌봐줄 폴 가쉐라는 의사를 구했다. 그곳에서 반 고흐는 라부 여인숙에 방을 얻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던 가쉐 박사와 친분을 쌓은 뒤 바로 그림을 시작했다. 오베르에는 반 고흐 외에도 샤를르 프랑수아 도비니, 폴 세잔, 까미유 피사로 등 다수의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마을과 시골환경 또한 반 고흐의 마음에 들었다. 도착한 지 3일 만에 반 고흐는 드로잉 두 점과 이 <꽃이 핀 밤나무> 작품을 포함한 유화 연구작 네 점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서 밤나무 꽃이 지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반 고흐가 오베르에서 자신의 첫 유화와 드로잉의 주제로 만개한 밤나무를 선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파리와 아를르에서도 촛불 모양의 분홍색과 흰색 꽃 봉오리가 맺힌 화려한 밤나무를 그렸었기 때문에 이는 반 고흐에게는 친숙한 주제이기도 했다. 이 그림에서 반 고흐는 잎들을 흰 양초와 같이 표현했는데, 직선적 붓놀림으로 두껍게 물감을 바르고 군데군데 짙은 파란색으로 윤곽선을 그렸다. 그는 짙은 윤곽선을 그리는 이와 같은 회화 스타일을 이 시기에 그린 다양한 정물화에도 사용했다.
Farmhouse(농가)/May-June, 1890
    오베르에 도착한 즉시 반 고흐는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오베르는 정말 아름 다운 곳이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흔히 볼 수 없는 초가 지붕이 아름답다. 그것을 주제로 한 진지한 유화 몇 점을 그린다면 머무는 동안 드는 생활비를 어느 정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다. 왜냐하면 초가집들이 정말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특이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시골 풍경의 진수이다.' 짚으로 엮은 지붕의 전통적인 농가는 반 고흐로 하여금 고향 브라반트를 떠올리게 하였으며 그에게는 매우 소중한 회화 주제였다. 반 고흐는 뉘넨에서도 농가를 자주 그렸으며 셍레미에서 마지막으로 병이 덮쳤을 때도 그 가 '북에 대한 회상'으로 명명한 상상 속의 농가를 그린 세 점의 풍경화를 그렸다. 반 고흐는 네덜란드와 가족에 대해 자주 회고했으며 친숙한 환경에서 살게 되기를 갈망하 고 있었다. 반 고흐는 새로운 환경에서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주제를 다시 접하게 된것이 기뻤으며 여러 점의 데생과 유화로 이를 기록했다. 주로 풍경을 배경으로 한 농가 또는 마을의 골목길을 따라 줄지어 서 있는 농가 여러 채를 묘사했지만, 이 작은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가끔 한 채의 농가와 그 앞에 있는 뜰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그는 프로방스의 따뜻하고 햇빛 가득한 색채를 좀 처 추운 기후에 알맞은 녹색과 파란 색조 로 대체했다. 반 고흐는 남쪽 지방에 머무른 경험 덕에 북쪽의 색채를 더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오베르에서 반 고흐가 그린 풍경화 연작 중 첫 번째 작품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 작품은 빠르고 즉흥적으로 제작된 연구작으로 마치 다음 작품의 시작을 서둘 렀던 듯 캔버스의 이곳 저곳이 채색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오베르에서 머물렀던 두 달은 반 고흐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다작을 했던 시기들 중 하나 였다. 약 70점의 유화와 다수의 드로잉과 스케치 작품들을 오베르에서 제작했다. 농가의 지붕은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한 느낌을 주지만 반 고흐가 그림처럼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이 '무너질 것 같은 오래된 초가 지붕 시골집'이었다.
Ears of Wheat(밀 이삭)/June 1890
    1890년 6월 중순, 반 고흐는 고갱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당신이 좋아할만한 아이 디어가 있다. 밀에 대한 연구작을 하려고 하는데 이삭, 청록색의 줄기, 리본과도 같은 긴 잎, 녹색과 분홍색의 그림자 그리고 먼지 나는 개화로 인해 연한 분홍색으로 살짝 경계를 짓고 있는 노랗게 물드는 이삭 외에는 스케치를 할 수가 없다. 아랫 부분에는 줄기를 감 싸고 있는 분홍색 메꽃이 있다. 바로 이런 곳, 정말 활기차지만 차분한 배경 위에 나는 초상화를 그리고 싶다. 이것은 같은 명암이지만 각기 다른 특징들을 지닌 녹색들이며, 진동으로 인해 마치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이삭의 부드러운 소리를 연상하게 하는 녹색의 통합체를 형성하는 것과 같다. 색채로서는 결코 쉽지가 않다.' 이렇게 상세히 그려내기 위해 반 고흐는 이 작품을 모방한 스케치와 밑 줄기를 그린 또 다른 스케치를 그렸다. 이 편지는 미완성으로 남아있고, 대신 고갱에게 보낸 편지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반 고흐가 이러한 새로운 연구작에 대한 이야기를 실제로 고갱에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밀 이삭>은 어찌 되었든 소재적인 측면에서 고갱의 흥미를 불러일키고자 그렸던 작품이었 기 때문에 그가 만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 고흐는 전체 표면을 밑 줄기로 채워 특별히 장식적인 효과를 냈는데 이러한 효과가 바로 그가 노렸던 것이었다. 고갱에게 썼듯이 그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초상화를 그리고자 했는데, 노란 밀짚모자를 쓴 농촌의 소녀를 그린 두 점의 그림에서 이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식물 모티프를 근접 정물로 그리겠다는 반 고흐의 결정은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일본 판화와 관련이 있다. 반 고흐는 '풀 하나'와 같은 디테일을 연구했던 일본 화가들의 치밀한 정확도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찬양했다. 반 고흐 자신도 시골을 '건강하고 활력을 준다' 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확신이 이 작품 뿐 아니라 밀 줄기를 배경으로 건강미 넘치는 농촌 소녀를 그린 작품들에서도 더욱 잘 표현되어 있다.
Peasant Woman with Straw Hat/June, 1890(미전시 작품) V. 종이작품(Works on Paper) Pollard Birches(가지친 버드나무,Nuenen)/March, 1884(미전시 작품)
    반 고흐의 명성은 의심할 여지 없이 색채화가로서의 뛰어난 재능과 물감을 두껍게 바른 독특하고 개성적인 표현양식이 특징을 이루는 그의 유화작품에서 비롯된다. 이처럼 유화작품에 치중된 반 고흐 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와 관심은 오랫동안 데생 화가로서의 그의 재능을 알리는데 소홀히 했다. 그의 종이작품, 즉 드로잉과 수채화 또는 판화 작품은 실제로 그의 유화작품보다는 훨씬 수가 많을 뿐 아니라 그의 화가로서의 발전 과정에 있어 유화작품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늦은 나이에 화가의 길에 들어 선 그에게 데생은 회화의 기법을 익히는 최초의 수단이었으며 데생을 통한 끊임없는 훈련과 수련을 통해 그의 회화의 기틀이 마련되고 발전해 나갈 수 있었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종이작품은 네덜란드 시기(1881-1885)에 제작된 작품들 가운데 선 별한 작품들이다. 유화작품 못지않게 방대한 종이작품을 총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는 종이작품 만을 모은 별도의 전시를 통해 심층적인 연구와 접근이 필요한 만큼 이번 전시 에는 초기 드로잉만을 모아서 그의 입문 과정을 보여주는데 초점을 맞추었다. 헤이그에서부터 뉘넨에 이르는 네덜란드 시기의 데생작품들은 미술에 입문한 초보자의 발전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초기 작품에 두드러진 주제는 농촌과 농민의 생활상이다. 그리고 인물화에 대한 남다른 관심이 일찍부터 반 고흐의 예술표현에 자리하여 인물에 대한 탐구와 표현에 심취한 데생이 습작 형태로 많이 제작되었다. 표현기법에 대한 수련과 연구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초기 작품에서는 미술사의 대가들의 작품을 참고로 하여 원근법과 화면의 비율 및 명암의 대비 등 미술 입문의 기초 적인 연구를 엿볼 수 있는데 표현의 정확성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즐비하다. 초기 종이작품에서도 훗날 그의 양식적 특징으로 자리하게 되는 요소들은 다분히 엿볼 수 가 있는데 다듬지 않은 거친 선의 처리는 말년에 유화작품의 특징을 이루는 거친 붓 터치 와 윤곽선 처리로 이어진다. 종이작품에서 엿볼 수 있는 어설픈 인물처리나 묘사는 단순히 그의 표현기법의 미숙함에서 비롯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보잘것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어설픈 모습이나 투박한 농민들과 농가의 풍경과 같은 소재의 성격 자체를 꾸밈없이 묘사 하려는 정직함에서 다소 부자연스러운 표현이 산재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길 수 있다. 네덜란드 시기에 그린 천여 점에 달하는 데생과 데생을 통한 습작을 바탕으로 반 고흐의 작업은 빛의 발견으로 이어지는 파리 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색채작업에 심취했던 남프랑스에서의 유화작업과 병행한 종이작업은 그를 가장 위대한 데생화가로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업적을 남기는 작업으로 발전한다.
Sower with Basket(바구니를 든 씨 뿌리는 사람)/September, 1881
    반 고흐는 작품 <씨 뿌리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가 밀레를 깊이 추앙했다. 이 작품에서 힘차게 씨를 뿌리는 한 젊은 농부의 모습을 담아냈다. 비록 생전에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1850>을 본 적은 없지만 몇몇 작품을 통해 밀레의 작품 세계를 재현하고 자 노력했으며 실제로 씨 뿌리는 농부의 모습은 그의 전 작품세계에 있어 중요한 테마가 되었다. 이 작품에서도 그는 아마도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의 시작을 함께 담아내고자 한 것 같다. 뒤편의 옥수수단과 그 사이로 살짝 보이는 여인의 모습을 볼 때 이 작품의 배경 이 여름을 마감하는 추수이며, 씨 뿌리는 농부의 모습은 다가오는 가을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작품은 반 고흐가 매우 공들인 연구작이다. 그는 자신이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는 지인이었던 반 라파르드에게 스케치 를 보내 그림의 진전 상황을 알렸던 편지에서도 잘 나타난다. 반 라파르드는 답장에서 기술적 단점을 지적했다.
Road with Pollard Willows(가지 친 버드나무 길)/Oct., 1881
    나무는 반 고흐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특히 그가 좋아했던 가지 친 버드 나무, 떡갈나무, 자작나무는 스무여 점의 유화와 데생에 등장한다. 버드나무는 매년 가지치기를 통해 튼튼해지는데, 옹이진 몸통과 위로 뻗은 가늘고 긴 줄기 는 전형적인 네덜란드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이 작품은 목탄으로 밑그림을 그린 뒤 검정 초크로 완성했다. 반 고흐는 다섯 점의 연구작을 통해 가지친 버드나무를 정성 들여 표현 했는데, 그는 살아있는 모델을 담아내려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대상에 집중하는 법을 익혔고 이는 풍경화에도 도움을 주었다. 그는 풍경과 사람의 모습이 서로 닮았다고 생각 했다. 훗날 헤이그에 간 그는 일렬로 늘어선 가지 친 버드나무를 보고 고아의 행렬을 연상 했고, 어린 옥수수를 보곤 잠자는 어린아이를 떠올렸으며, 사람들의 발에 밟힌 길가의 풀 을 보곤 '지치고 먼지투성인 모습이 마치 빈민가 사람들을 연상시킨다'라고 하기도 했다.
Woman Peeling Potatoes(감자 깎는 여인)/Oct.-Nov., 1881
    1881년 10월 당시 그는 집안일을 하는 여인의 모습을 많이 그렸다. 이 작품의 배경은 어둡게 처리했는데 그림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 여인의 왼쪽에는 벽난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인의 무릎에는 감자 든 바구니가 놓여있고 나막신을 신은 그녀의 두 발은 받침돌 위에 놓여있다. 여인의 허벅지 길이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때까지도 반 고흐는 인물의 비율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가 스승이었던 마우베에게 그림들을 보여주자 마우베는 모델과의 거리가 너무 가깝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의 모델들은 대부분 좁은 집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비율을 측정하기란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Woman Sitting at the Fireside(난롯가의 여인)/Oct.-Nov., 1881
    에텐의 브라반트에 머물 당시 반 고흐는 난롯가에 앉은 농부의 모습을 수차례 그렸다. 16세기와 17세기의 그림 속 겨울에는 난롯가의 모습이 자주 등장하곤 했다. 19세기에 들어 서면서 화가들은 일반 평민들의 비참한 생활을 좀 더 현실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난롯가의 모습을 담아내려 했는데 이는 그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이 작품은 연필과 검정 초크로 밑그림을 그린 뒤 부분적으로 채색했다. 여인의 양팔과 앞 치마 아래 보이는 치마에는 파랑, 초록, 약간의 보라색을 입혔다. 전체적인 회색 배경에서 옅은 황갈색 빛이 도는 타일 바닥이 눈에 띈다. 난로 연기는 흰색 수채물감으로 표현되었다. 난롯가와 배경의 오른쪽 벽 사이는 흰색의 선명한 굵은 선으로 처리했다.
Woman Churning Butter(버터를 만드는 여인)/Oct.-Nov., 1881
    전형적인 네덜란드 농부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 이 그림은 버터 만드는 과정 중 우유를 젓고 있는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버터 제조기 속에서 발효된 우유크림을 저으면 지방 이 응고되어 분리되는데 이 응고된 지방으로 버터가 만들어진다. 당시 상당한 노동을 필요로 하는 버터 만드는 일이 일반 가정에서 행해지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를 잘 알고 있던 반 고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 고된 노동의 순간을 화폭에 담고자 했을 것이다. 모델의 자세가 정적인 점이 눈에 띈다. 여인은 버터 만드는 과정의 핵심인 막대를 들어올리는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막대를 내리 고 있는데 이는 그림의 역동성을 약화시킨다. 이 그림 역시 몇몇 작품을 통해 버터 만드는 사람들을 그려냈던 밀레에게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점은 버터 제조 기의 테두리 모양을 스케치한 흔적을 여인의 앞치마와 오른쪽 나막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는 것이다.
Blacksmith's Shop(대장간)/Feb.-March, 1882
    원근법과 비율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해 반 고흐는 장인의 작업장 내부를 그리곤 했다. 천 짜는 장면을 담은 작품을 제외하고 이 작품은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작품 중 몇 되지 않은 작업장 작품 중 하나에 속한다. 그는 연필로 세부적인 구상을 잡은 뒤 펜과 잉크로 덧칠했다. 어두운 부분에는 흰색 수채물감을 사용해 빛의 효과를 나타냈다. 대장장이는 불 앞에 한 짝의 집게를 들고 서 있으며 그의 옆으로는 그림에 나타나지 않은 풀무 기계의 손잡이가 달려있다. 용광로에는 둥그런 통 위에 올려져 있는 네모난 물통이 보이고 물림틀도 쉽게 눈에 띈다. 그림의 앞 부분에는 모루와 망치가 놓여있고 오른편에는 용광로 앞에 놓인 석탄을 불 속에 넣기 위한 삽이 있다. 이른 아침 커피를 데우기 위한 주전자도 선명하게 보인다. 뒤편으로는 대장간의 안뜰이 살짝 보인다.
Woman with a Headscarf(두건 쓴 여인)/Sept.-Oct., 1882
    테이블 옆에 팔을 포개고 있는 여인은 아마 시엔이 아닌가 싶다. 반 고흐는 연필로 먼저 밑그림을 잡은 뒤 전체 이미지는 묽은 수채물감과 잉크를 이용해 단색적인 색감을 표현 했다. 갈색은 오징어 먹물로 만든 잉크인 세피아를 사용한 듯 하고, 청회색은 남색과 연한 푸른색을 섞은 연회색을 사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이를 통해 다양한 명암을 가진 자연스런 회색빛을 얻어냈다. 이런 방식을 통해 대비효과를 나타냈다고 했다. 이러한 채색은 연필만 사용하거나 초크와 잉크 같은 일반적인 조합으로 그려진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부드러운 이미지를 더해 준다. 이 작품에서 그는 펜과 검정 잉크를 이용해 인물의 얼굴을 뚜렷하게 표현해냈다. 또한 선명한 그리드 자국을 통해 그가 원근 틀을 사용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In Church(교회에서)/Sept.-Oct., 1882
    이 작품을 그리면서 반 고흐는 맨 앞 줄에 있는 세명의 여인을 따로 작게 스케치했다. 그가 이 인물들을 그리면서 애를 먹은 것은 분명하다. 신도석 각 줄에 앉은 인물의 얼굴을 겹치게 그려 일종의 거리감을 표현하려 했지만, 효과는 매우 미미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주된 이유는 인물의 몸통을 비입체적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전체적으로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데, 인물의 얼굴을 정면 혹은 측면으로 배치한 것도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 작품에서는 시엔의 얼굴과 네덜란드 개신교회가 운영하던 양로원의 무연고 노인인 아드리아누스야코부스 주더랜드의 얼굴도 찾아볼 수 있다. 이 장면은 연필로 스케치한 뒤 펜과 잉크로 덧칠하고 수채물감으로 채색했다.
Old Man Drinking Coffee(커피 마시는 노신사)/Nov., 1882
    이 작품의 모델은 네덜란드 개신교회가 운영하던 양로원의 무연고 노인 아드리아누스야코 부스 주더랜드이다. 양로원의 다른 노인들도 반 고흐의 모델을 섰지만 주더랜야말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이었다. 반 고흐는 그를 '특이한 대머리에 큰 귀, 흰 구렛나룻을 지녔 다'라고 테오에게 묘사했다. 그는 모델이 몸을 앞으로 약간 숙인 채 커피를 마시는 장면 을 담고 있다. 그리드 자국을 볼 때 원근 틀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물 주변의 변색은 반 고흐가 고정액으로 우유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법은 초크 를 고정시킬 뿐만 아니라 그가 원하던 바인 흑연의 광택을 제거하고 얇게 검정톤을 입히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그는 '일반적인 연필 드로잉에서는 볼 수 없는 생동감을 살렸다' 라고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밝히고 있다.
Girl with a Shawl(숄을 두른 소녀)/Dec., 1882-Jan., 1883
    1883년 처음 몇 달 동안 반 고흐는 석판화용 크레용으로 그린 인물 두상 드로잉에 몰두 했다. 당시 작업 중인 작품을 <사람들의 두상>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1870년 영국의 일러스트 잡지 [그래픽]지에는 실제로 이 제목 하에 일반인들의 삶을 그린 목판화를 싣기도 했다. 바로 이런 주제가 반 고흐가 추구하던 것이었고 그는 열정적으로 이런 종류의 목판화를 수집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 프랑스 잡지 및 미국, 네덜란드 잡지 에서 관련 그림을 스크랩했으며 그것을 자신의 작업실 폴더에 모아두거나 작업실 벽에 걸어 두었다. 당시 열 살이었던 시엔의 여동생 마리 빌헤미나 호르닉이 이 작품의 모델인 듯 하다. 측면과 윗면에서 그린 이 그림은 뻣뻣한 머리결과 소박한 숄을 통해 모델의 초라한 신분을 말해 준다. 뭔지 모를 듯한 표정에서 그녀의 연약함을 읽을 수 있다.
Farms(농가)/Oct.-Nov., 1883
    스승인 마우베의 드렌테 관련 작품을 보고 그는 당시 아직 사람 때 묻지 않은 이 네덜란드 북부의 작은 마을에 대해 강한 인상을 받았었다. 1883년 9월 반 고흐는 헤이그를 떠나 드렌테로 향했다. 그곳에서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머물면 머물수록 더 아름답게 느껴진다'고 말했지만 머문 기간은 3개월이 채 되지 않았다. 그가 '척박하고 황폐하다'고 묘사한 풍경은 시간이 지날수록 실망감을 더해 주었지만 저녁이 되면 모든 것이 변했다. 그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황혼이었다. 드렌테에 도착한 반 고흐 는 오두막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헛간이 딸린 농가를 그렸다. 밭에는 침엽수가 보이고 그 오른편에 낙엽수도 보인다. 그림의 오른편에는 한 남자가 걸어가고 있으며 뒤편에 다른 농가들도 눈에 들어온다. 그는 부드럽고 매끄러운 검정 초크를 힘주어 사용함으로써 나무 그림자에 보이는 색을 짙고 아름다운 검정 톤으로 만들어냈다. 또한 그는 전방과 헛간의 벽에 날카로운 물체로 자국을 냈다.
Woodcutters(벌목꾼)/Dec., 1883-Jan., 1884
    1883년 12월 21일 반 고흐는 뉘넨의 목재 판매장에 나타났다. 수채화인 이 작품은 인물의 행동으로 보아 목재 판매가 이루어지기 직전의 모습을 담은 듯 하다. 대패질 된 나무는 아마 곧 경매에 부쳐질 것으로 보인다. 밑그림에 사용한 초크 때문에 채색된 일부분에서 기포자국이 보인다. 대패로 깎인 나무의 몸통은 분홍빛이다. 나막신을 둥글고 검은 윤곽에 흰색 수채물감으로 묽게 채색되었으며, 남자들의 자세는 경직되어 있다. 이 작품에서 붓질은 꽤 거칠어 보이는데, 이는 분명 붓이 낡아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림에서 상당히 많은 붓 털을 발견할 수 있다.
VI. 삶과 예술 Vincent van Gogh, c. 1876(19세의 빈센트 반 고흐)
    1853년 네덜란드의 준데르트(Zundert)에서 태어나 1890년 37세를 일기로 파리 북쪽 오베르 마을의 작은 방에서 생을 스스로 마감한 빈센트 반 고흐는 예술에 모든 것을 바친 불운한 천재의 원형이다. 10년이라는 짧은 예술가로서의 활동기간 동안 미술을 통해 인류애를 실현하기로 마음 먹으면서 그는 동시대의 어떤 예술가보다도 처절한 삶을 살았으며 예술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말로 할 수 없는 영혼적인 삶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 했다. 후기 인상주의 작가로 구분되는 반 고흐의 화풍은 1886년 파리에서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을 발견하면서부터 어두운 색채는 밝은 색상으로, 사회적 사실주의의 테마는 빛으로 가득한 야외풍경으로 바뀌었다. 초기, 화가로서의 입문 시기에 가난한 농부들에게 숨겨져 있는 詩 를 표현하려는 그의 야심은 인간의 병을 치유하는 자연의 압도적인 힘을 표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짧게 끊어지는 화필과 밝은 보색의 색상체계는 인상주의, 특히 후기 인상주의의 점묘파 화법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의 독창성은 전통적인 사실주의 기법을 거부 하면서 '비사실적인 그림이 직접적으로 사실을 그린 그림보다 더욱 진실하게 보이고 싶다.' 던 그의 열망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예술가의 인생에 불꽃같은 삶을 통해 9백여 점의 작품을 남겼지만 생전의 그의 작품 은 거의 인정받지 못했으며 단 한 점의 작품만을 팔았다는 사실에서 보듯이 그의 일생은 가난과 소외로 점철된 쓰디쓴 것이었다. 인생에서 찾고 싶었던 사랑에 실패한 그에게 예술 은 유일한 피난처였고, 그는 오직 예술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창조력 넘치는 삶으로 바꿔 놓으려 했다. 태양을 찾아 남프랑스로 내려간 그는 정신적 고통과 영혼의 구도적인 길을 찾아 불꽃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고 미술사상 유례없는 걸작들을 남겼다. '언젠가 내 그림들은 물감 값 이상의 가격에 팔릴 날이 올 것이다.'라고 스스로 위로했던 그의 작품 <의사 가셰의 초상>은 1990년 당시 경매 역사상 최고가격인 8천2백50만 달러에 팔렸다. 반 고흐의 임종을 지켜본 의사 가셰는 '반 고흐는 정직한 사람이었고 위대한 화가 였다. 그는 인도주의와 예술이라는 두 가지 목표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살아갈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그림이었다.'라고 말했다. 미술사의 신화적인 인물로 기록되고 있는 반 고흐 가 오늘날 이토록 명성을 누릴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을 불멸의 것으로 만드는 이유는 '화가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다른 것은 차후의 일이다.'라고 말한 그의 신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L'Auberge Ravoux, in Auvers-sur-Oise(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라부 여인숙), where Vincent Van Gogh spent his final months and where he died. It is now a restaurant. Graves of Vincent and Theo van Gogh at the cemetery of Auvers-sur-Oise. Sergei Rachmaninov/Concerto for Piano No.2 in C minor, Op.18 2. Adagio Sostenuto
출처 : 불멸의 화가(Voyage Into The Myth):반 고흐(Vincent van Gogh)展, 2007 (2)
글쓴이 : isadora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