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밖 세상/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은초록별 2012. 1. 24. 17:40

 

앙코르와트( 영어: Angkor Wat, Angkor Vat)는 12세기 초에 수르야바르만 2세를 위해 창건된

캄보디아 앙코르에 있는 사원으로서 옛 캄보디아 크메르 제국의 수준 높은 건축기술이 가장 잘 표현된 유적이다.

이 사원은 앙코르에서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캄보디아의 기념비적 유적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이다.

12세기 크메르 제국의 황제 수르야바르만 2세에 의해 약 30년에 걸쳐 축조된 이 사원은

힌두교의 3대 신 중 하나인 비슈누(Vishnu) 신에게 봉헌되었다.

이 사원은 서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해가 지는 서쪽에 사후 세계가 있다는 힌두교 교리에 의한 것으로

왕의 사후세계를 위한 사원임을 짐작케 한다.

길이 3.6km의 직사각형 해자에 둘려싸여 있는 이 사원의 구조는

크메르 사원 건축 양식에 따라 축조되었다.

중앙의 높은 탑은 우주 중심인 메루(Meru)산, 즉 수미산이며 주위에 있는 4개의 탑은

주변의 봉우리들을 상징한다.

외벽은 세상 끝에 둘러쳐진 산을 의미하며 해자는 바다를 의미한다.

이 해자를 건너기 위해서는 나가(Naga)난간을 따라 250m의 사암다리를 건너야 한다.

앙코르(Angkor)는 산스크리트어 나가라에서 파생된 도읍이라는 의미의 노코르(Nokor)의 방언이고,

와트(Wat)는 크메르어로 사원이라는 뜻이니 앙코르와트는 '사원의 도읍'이라는 뜻이된다.

'사원의 도읍'이라는 의미인 앙코르 와트라는 이름은 16세기 이후부터 사용되었다.

 

역사

앙코르 와트는 현재의 씨엠립에서 북쪽으로 약 5.5km 떨어져 있다.

이전 수도에서 약간 동남쪽으로 위치해 있으며, 중심에는 바푸욘이 있다.

이곳에는 캄보디아 주요 고대 건축물들이 다 모여있다.

앙코르의 주요 유적지의 남쪽 끝부분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초기의 사원 설계와 건축은 12세기 초반인 수르야바르만 2세(재위 1113~1150년)에 의해 시작되었다.

비슈누에게 봉헌하였는데, 수도에서 왕의 국사로 지어졌다.

이 사원 건축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서 그 초기 이름은 알수가 없지만,

브라 비슈누록으로 알려져 있다.

사원의 기공식은 왕의 사후에 이뤄진 것 같으며, 일부 장식들이 완성되지 않은 채로 발견되고 있다.

그의 사후 새로운 왕인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크메르 제국이 제건되었다.

그는 새로운 수도를 약간 북쪽인 앙코르 톰으로 이전하고, 국사도 바이욘으로 각각 옮겼다.

14세기와 15세기에 사원은 소승 불교 사원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오늘 날까지 이른다.

16세기 이후로도 관리가 제대로 되지는 않았으며, 그렇다고 용도가 폐기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해자가 정글의 침입을 막아줘서 파괴가 최소화 되었던 것이다.

이곳을 최초로 방문한 서양인은 포르투갈 수도사인 안토니오 다 막달레나로

1586년에 이곳을 방문하고서는 "전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펜으로는 묘사할 수 없는

웅장하고 뛰어난 건축물"이라는 찬사를 남기고,

탑과 장식기단 그리고 천재나 그릴 수 있는 세련됨을 찬사하였다.

이 사원군들이 서양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앙리 무오의 여행기가 출판됨으로써 가능해진 것이다.

 

 

 

 

 

 

 

 

 

 

11~12세기의 비슈누 상

앙코르 시는 크메르 제국의 황제 자야바르만 2세에 의해 창건되기 시작했다. 신왕(神王)이라 자칭한 그는 권력과 부를 과시하고 사후에 신과 합체한다는 신앙심으로 300년에 걸쳐 수도 앙코르를 건설한다.

앙코르 왕조를 처음 개창한 자야바르만 2세(802년-850년)는 825년 불교에서 말하는 이상세계인 수미산(Sumeru)처럼 높은 산의 꼭대기에 신이 머문다는 힌두교의 전설에 따라 씨엠립(Siem Reap)에서 앙코르 톰 남문 왼편에 있는 프놈 쿨렌(Phnom Kulen) 언덕에 왕조를 건설하고, 나라 이름을 캄부자(Kambuja)로 정한다. 훗날 캄부자는 캄푸치아(Kampuchea)가 되었고, 1431년 태국의 시암족인 아유타야 왕조가 앙코르를 함락시킨 이후부터는 지금처럼 앙코르(Angkor)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앙코르 왕조는 802년-1432년까지 630여년간 28명의 왕을 말한다. 앙코르 왕조는 1170년 베트남 남부에서 살고 있던 참족(Champa)에게 정복 당하기도 했으나, 자야바르만 7세(1181년-1201년)가 이를 물리치고 그 뒤로 600년 넘게 번영을 누리도록 기초를 확립했다. 바르만 '승리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가진 자야바르만은 원래 왕족이 아니라 지방호족 출신이었다. 군사적 천재이며, 행정적 수완도 대단한 그는 앙코르 와트의 벽면에도 조각되어 있다.

이들의 최초의 종교는 힌두교에서 시작하여 점차 관세음보살 신앙으로 자리를 잡아간 탓에 앙코르에는 힌두교와 불교 미술 모두를 볼 수 있어 그 전체가 하나의 미술관이나 다름없다. 앙코르 왕국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사원 벽화에 새겨진 산스크리트 어로 그 역사를 짐작할 뿐이다.

[편집] 수르야바르만 2세와 앙코르 왓의 건설

앙코르 정권의 주사원이었던 앙코르 왓1113년부터 1150년 사이에 수르야바르만 2세에 의해 건설되었다. 수르야바르만은 왕자의 난에서 승리하여 왕좌를 쟁취하였다. 앙코르왓의 기록에서는 전투의 과정과 경쟁 왕자의 전투용 코끼리 위에 올라가 그를 죽이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다.

전쟁과 외교를 통해 정치적인 안정을 다진 후에 굳건한 내치 경영을 하며, 그의 왕실 전용 사원 능묘로 앙코르왓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크메르 왕국의 전통을 깨고, 당시 인도에서 태동하기 시작한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시바에게 봉헌하는 사원이 아니라 비슈누에게 봉헌하는 사원을 지었다. 사원의 중앙에 신들의 고향인 수미산을 의미하는 탑을 쌓고 사방에 1km 이상이 되는 외벽을 쌓았다. 외벽은 세상을 나타내는 산을 말하고, 해자는 바다를 의미한다. 그런 다음 수르야바르만 2세는 외벽에 신화의 역사를 남기기 위한 부조를 조각하게 했다.

[편집] 자야바르만 7세, 앙코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

파리동양박물관의 자야바르만 7세의 상

1150년 수르야바르만이 죽자, 왕국은 내전의 풍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 기회를 틈타 지금의 베트남 남부에 있던 참파1177년 메콩 강똔레삽 호수를 타고 수로로 침공을 하였다. 참파는 크메르의 수도인 야소다라푸라를 약탈하고, 왕을 죽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나중에 자야바르만 7세가 되는 크메르의 왕자는 가신들을 거느리고 호수와 육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참족을 물리친다. 1181년 자야바르만은 왕좌에 등극하고, 앙코르 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이 되었다. 폐허가 된 야소다라푸라에 자야바르만은 성벽도시인 앙코르 톰바이욘 사원을 건설한다. 바이욘 사원의 석벽 부조는 참족과 왕의 전투 장면뿐만 아니라 부근의 촌락민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자야바르만 때는 타 프롬프레아 칸과 같은 사원이 건설하여, 그의 부모에게 바친다. 이 대형 공사로 인해 국가의 종교는 힌두교에서 대승 불교로 바뀌게 된다. 자야바르만 자신이 불교 신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자야바르만 7세의 통치기간 동안 힌두교 사원은 모두 부처로 상을 모셔두게 된다. 그리하여 앙코르 왓도 불교 사원이 된다. 그의 사후에 힌두교는 다시 부활하게 되고, 14세기에 소승 불교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불상을 훼손하는 대규모의 운동이 벌어진다.

 중국 사신 주달관의 진랍풍토기

 

1296년 중국 원나라의 사신으로 주달관(周達觀)(1266년-1346년)이 앙코르에 도착하게 된다. 주달관은 원나라 저장 성 온주 사람으로 원나라 테무르 칸의 사신으로 1296년 온주를 떠나 푸저우 항를 거쳐 하이난을 경유하여, 안남을 거쳐 캄보디아 캄퐁 참의 도시에 메콩 강 수로로 도착하게 된다. 이곳에서 똔레삽 호수로 작은 배로 갈아타고 12일을 항해하여 당시 수도인 앙코르 톰에 도착하였다.

주달관은 인드라바르만 3세가 통치하는 이곳 크메르 수도에 1년을 머물면서 크메르 사회를 관찰한 40장 분량의 기록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남긴다. 그는 종교나, 법제도, 왕위, 농경, 노예제도, 새, 식물, 목욕, 의식주, 도구, 동물, 상거래 등의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기록은 현재 앙코르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으며, 또한 재미있는 여행기로 남아 있다.

바이욘

 앙코르 왕조의 최후

앙코르 문명 자체는 13세기~14세기를 거치면서 쇠락해졌지만, 일반적으로 앙코르 왕조의 몰락은 1431년 타이 침략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평가된다. 15세기에 이르러 불교 사원이 있는 앙코르 왓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것들이 버려진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론들이 분분하다.

 타이와의 전쟁

크메르의 수도가 버려지게 되는 가장 유력한 설은 시암의 침략으로 인한 것이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주달관이 방문을 하게 되는 시기에 이미 활력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의 기록에서 주달관은 이러한 전쟁으로 국토가 전부 황폐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1431년 앙코르 멸망 이후 많은 사람들과 서적, 연구물들이 타이의 수도 아유타야로 옮겨졌다. 대분의 사람들은 남쪽의 프놈펜 근교로 새롭게 중심 이동이 된 것이다.

 종교 분쟁

어떤 학자들은 앙코르 몰락의 원인을 자야바르만 7세 이후 힌두교에서 소승 불교로의 개종한 데서 몰락의 원인을 찾기도 한다. 소승 불교의 개인에 대한 극단적인 실체의 부정으로 인해, 왕조 숭배의 활력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앙코르의 복원과 보존

이 위대한 도시는 19세기 프랑스 고고학자들이 탐험을 해서 발굴할 때까지 밀림에 묻혀있었다. 1907년~1970년까지의 작업은 프랑스 극동학원의 관할 하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은 숲을 제거하고, 제단을 수리하고, 배수로를 설치하여 붕괴를 막았다. 1993년 이후 캄보디아 내전으로 중단된 이런 작업들이 재개되었고, 프랑스일본, 유네스코가 합작을 하여 국제위원회를 만들어 보존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