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국을 호령하고 만인을 포용하다
동아일보가 국립중앙박물관 이란국립박물관 SBS와 공동 주최하고 컬쳐앤아이리더스가 주관하는 특별기획전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The Glory of Persia)’. 독수리의 날개,염소의 뿔,사자의 얼굴을 지닌 이 상상의 동물은 세계의 중심에서 세계를 호령했던 페르시아의 위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의 궁전이었던 페르세폴리스 궁전에서 출토된 것으로,지금은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이 전시는 인류 최초의 세계 제국이었던 페르시아(지금의 이란)의 영광의 역사를 한눈에 조망하는 자리다. 또 실크로드를 통한 고대 페르시아와 한국의 문화 교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하다. 고대 동서문화교류사에서 로마와 페르시아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고 신라 경주는 실크로드의 종착지였기 때문이다.
페르시아는 우리에게 ‘아라비안나이트’의 나라로 잘 알려져 있으나 최근 드라마 ‘대장금’이 시청률 86%를 기록하는 등 이란에 한류 열풍이 불면서 한국과 이란 간 문화 교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페르시아전은 한국과 이란의 문화 교류의 디딤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페르시아의 역사와 문화, 세계사적 의의 등을 소개하는 시리즈를 연재한다.
○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
기원전 6세기 어느 새해 첫날,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 왕궁. 낙타를 타고 온 아라비아인, 들소를 몰고 온 간다라인, 전차를 끌고 온 리디아인, 상형문자가 가득한 파피루스를 들고 온 이집트인 등 세계 곳곳에서 온 사신들이 궁전 입구 ‘만국(萬國)의 문’ 앞에 줄지어 서 있었다. 서아시아부터 지중해를 건너 이집트에 이르기까지 28개 민족의 사신이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 대왕에게 조공을 바치기 위해 줄을 지어 서 있는 것이다.
사신들의 행렬을 바라보는 다리우스 1세의 표정은 흐뭇했다. 그 뒤로는 1만 명의 정예병으로 구성된 왕의 불사(不死) 친위사수대가 당당하게 도열해 있었다. 그 다음 날, 다리우스 1세는 페르시아의 영광을 과시하기 위해 1만5000명의 왕족을 페르세폴리스 궁전으로 초청해 영광의 향연을 베풀었다.
○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는 아시리아를 격파하고 오리엔트를 통일했다. 페르시아가 로마제국에 앞서 최초의 세계 제국이 되었다. 페르시아의 영토는 지중해와 이집트로부터 서아시아를 지나 인더스 강 유역에 이르렀다.
당시 페르시아의 왕은 다리우스 1세. 그는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가파른 절벽의 바위 위에 승리를 선포하는 글을 새겨 제국의 탄생을 널리 알렸다. 그는 제국을 20개 지역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그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교통과 유통. 전국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를 닦았다. 이 길을 통해 왕의 명령이 들고 났으며 경제와 문화가 오갔다. 그 핵심은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였고 그래서 “모든 길은 페르세폴리스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다.
다리우스 1세는 만국의 왕이 되었다. 이란의 페르세폴리스 궁정 터에 가면 ‘만국의 문’이 지금도 당당히 버티고 서 있다. 주변 민족의 사신들이 조공을 바쳤던 바로 그곳. 페르세폴리스 궁전 건축물의 기둥머리엔 용맹스러운 그리핀(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가 달린 신화속의 동물)과 황소 등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의 기둥과 벽에는 당시 주변 민족들의 조공 행렬 모습, 왕의 친위 사수대의 모습을 새긴 부조가 즐비하다.
○ 세계사에 길이 남는 불멸의 문화
페르시아 아케메네스왕조는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200년 동안 세계의 중심이었다. 페르시아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포용의 정신. 다리우스 1세를 비롯해 아케메네스왕조의 왕들은 정복한 민족의 지역공동체와 종교, 문화를 존중했다. 페르시아의 지배하에서도 이집트는 파피루스 위에 상형문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바빌로니아로 쫓겨난 유대인(헤브라이인)들은 그들의 신전을 세울 수 있었다.
정복지의 문화는 주요 도로를 통해 페르세폴리스로 들어와 더 멋진 문화로 다시 피어났다. 페르세폴리스 궁전의 화려한 건축은 아시리아의 궁정 건축, 이집트 건축, 바빌로니아 건축이 한데 녹아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페르시아가 약 200년 동안 서아시아와 오리엔트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포용정책 덕분이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 ‘조공하는 사람 부조’
22일부터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의 출품작 가운데 하나인 ‘조공하는 사람 부조’(사진).
페르시아에 복속된 28개 민족은 페르시아의 수도인 페르세폴리스의 궁전에 와서 다양한 상품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다. 이러한 조공이 모습을 석회암 석판에 부조로 표현해 페르세폴리스 궁전 건축물의 벽을 장식했던 유물이다.
기원전 6세기 이후 약 200년 동안 오리엔트를 제패했던 페르시아의 세력과 위용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또한 당시 페르시아 및 오리엔트 생활문화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조공을 바치는 각 민족의 신체적 특징, 의상, 생활 풍속 등이 각각의 부조에 세세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기, 낙타, 들소, 상형문자가 쓰여 있는 파피루스, 각종 악기 등 부조에 등장하는 조공품도 매우 다양하다. 이번 전시엔 조공 모습을 표현한 부조를 비롯해 페르시아 왕을 지켰던 친위사수대의 당당한 모습을 표현한 부조,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에서 선과 빛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표현한 부조 등 10여 점의 부조가 전시된다.
인간의 ‘자유의지’ 존중… 세계 종교의 모태
《기원전 6세기 오리엔트를 통일하고 약 200년간 세계의 중심이 되었던 페르시아. 그 명성에 걸맞게 페르시아의 종교 사상과 문화 예술도 인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페르시아인들은 정복지 여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존중하면서 그것을 하나로 녹여 더 위대한 종교와 문화 예술을 탄생시켰다. 다인종 다문화가 살아 숨쉬는 세계 국가의 가능성을 후대에 제시해 준 것이다. 페르시아 제국만이 보여 줄 수 있었던 위대한 업적이다.》 옛 페르시아인의 종교 의식을 보여주는 도기.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약400년 전인 기원전 10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이란의 한 무덤에서 출토됐다. 두 마리의 동물이 조로아스터교에서 말하는 선과 악을, 그 위에 올라탄 사람은 선과 악 사이에서 투쟁하는 인간을 연상시킨다. 이란국립박물관 소장품. 사진 제공 생각의 나무
○ 자라투스트라(조로아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고 외치면서 20세기 서양 철학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니체의 이 외침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상징한다. 여기서 말하는 자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의 예언자 조로아스터.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이 되었던 기원전 6세기경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인물이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가 니체의 철학에 어떻게 영향을 준 것일까. 니체는 왜 조로아스터에 열광한 것일까. 조로아스터교는 선과 빛의 신 아후라마즈다와 악과 어둠의 신 아리만의 대결로 세상을 보았다. 개인의 삶이 발전하려면 선과 악 사이에서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선악 투쟁의 최후는 불이 심판한다. 불의 제단은 그래서 특별한 숭배의 장소이자 페르시아 종교의 중심이었다.
조로아스터와 페르시아인들은 인간이 선과 악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의 자유 의지를 중시한 것이다.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아후라마즈다의 편에 서면 최후의 심판 때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렇게 되길 기원했다. 세상과 삶을 선악의 투쟁으로 보고 동시에 인간의 자유 의지와 도덕성을 존중한 것은 인류의 종교사 지성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니체가 조로아스터에 열광한 것은 바로 그 자유 의지 때문이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인간의 자유 의지를 존중했다는 점은 종교의 개방성 보편성과 연결된다. 그건 누구나 자신의 뜻에 따라 선을 쟁취할 수 있다는 개방성 보편성을 의미한다. 페르시아의 종교는 페르세폴리스로 통하는 길을 따라 지중해 이집트에서 중앙아시아 인더스 강에 이르는 28개 민족의 땅으로 구석구석 전파되었다.
선과 악의 대결,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 인간의 사후 운명에 대한 관심, 구세주 등 조로아스터교의 기본 정신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에 모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조로아스터가 석가 공자 소크라테스 등 기원전 5세기의 성인보다 한 시대를 앞서 살았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다양한 종교의 원형이 되고 시대를 넘어 20세기 니체에게까지 영향을 준 조로아스터교. 그 종교에 담겨 있는 페르시아인들의 정신은 지금도 일상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 세계 전역에 뻗어 나간 페르시아 예술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만큼 외국 관습과 문화를 기꺼이 받아들인 나라는 없다”고 말했다. 페르시아가 정복지의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과 융합을 통해 세계적 감각의 독창적 문화를 창조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후일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가 인도 유럽뿐 아니라 동아시아까지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가는 원동력이 됐다.
페르세폴리스, 파사르가다에 등 페르시아 옛 수도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도 엘람, 이집트, 그리스, 바빌로니아, 에티오피아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혼합되어 탄생한 결과물. 2500여 년 전 페르시아에 이미 ‘글로벌 아트’가 탄생한 셈이다. 이 장엄한 건축 예술은 인도 마우리아 왕조(기원전 317년∼기원전 180년)의 건축과 예술 전통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를 멸망시킨 비운의 사건은 역설적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문화가 융합된 헬레니즘 문화의 기원이 됐다. 둥근 천장과 돔으로 구성된 사산조 페르시아(서기 226∼651년)의 궁전 건축은 4세기 아드리아 해 스플리트(크로아티아의 한 지방)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10, 11세기 스페인 카탈루냐 교회 건축 등 유럽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인들의 시각에서 보면 ‘이교도’들의 예술이 기독교 신을 모시기 위한 건축에 영감을 준 것이다.
유럽뿐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바미안 석굴사원의 장식, 인도 아잔타 석굴, 중국 투루판 석굴 벽화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 왕조 특유의 양식이 나타난다. 우리 땅 경북 경주의 신라 고분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리그릇이 발견되었고 일본 나라(奈良)의 왕실 보물창고인 쇼소인(正倉院)에서도 사산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직물들이 남아 있다. 이처럼 페르시아 제국은 대형 건축물에서 작은 예술품에 이르기까지 많은 예술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
▼ 미리 보는 ‘페르시아 유물전’▼
○ BC 10세기 제작 ‘동물 장식 잔’ ‘황금의 제국 페르시아’에 선보이는 유물 가운데 하나인 ‘동물 장식 잔’(높이 17.5cm·사진).
페르시아가 세계 제국을 건설하기 약 400년 전인 기원전 10세기 무렵 제작된 것이다. 이 잔은 금과 은 구리 등이 천연적으로 합금된 상태인 호박금(琥珀金)으로 만들어졌다. 페르시아 즉 지금의 이란에서 많이 산출되는 호박금은 구성 성분의 비율에 따라 색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잔은 위쪽 입구(구연부)와 아랫부분에 가는 선으로 끈 모양의 무늬를 정교하게 새겼다. 잔의 위와 아래를 2개의 단으로 나누어 각각 반대 방향으로 행진하는 상상의 동물을 돋을새김 기법으로 표현했다. 잔의 입구 부분이 약간 벌어져 안정감과 세련미를 보여준다.
여기 등장하는 네 발 달린 동물은 이마에 뿔이 달린 상상의 동물이다. 신화적 상상력을 가미해 표현한 것으로, 이마의 뿔은 페르시아인의 용맹스러움을 상징한다. 잔에 장식된 동물의 표현을 보면 매우 정교하고 화려하며 전체적으로 조형미가 빼어나다. 목을 밑으로 내려 고개를 숙이고 걷는 동물의 모습이 다소 익살스럽지만 잔의 표면에 변화감을 주어 오히려 조형미를 더해 준다.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동물들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표면 장식에 생동감을 부여한다. 이 같은 돋을새김 기법의 잔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로 계승되어 페르시아 금속공예미술의 한 전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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