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1.24일부터 2008.3.16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전시한다. 반 고흐는 1853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1890년 37세의 나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화가다.
10년 동안의 짧은 활동 기간 가난으로 점철된척박한 환경속에서 동시대의 어떤 예술가보다도 처절한 삶을 살았으며 예술에 인생의 모든 것을 걸었고 말로 할 수 없는 영혼의 모든 것을 담아내려고 했다.
후기 인상파 작가로 구분되는 반 고흐의 화풍은 1886년 파리에서 인샹주의자들의 그림을 발견하면서부터 어두운 색체는 밝은 색상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테마는 빛으로 가득한 야외 풍경으로 바뀌었다.
예술가로서 너무나 짧았던 불꽃같은 삶을 통해 9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지만 살아있는 동안 그의 작품은 거의 인정을 받지 못했으며 생존 시에 단 1점의 작품만이 팔았다.(그것도 40프랑에...)
예술은 그에게 유일한 피난처였고 오직 그림을 통해서 자신의 인생을 창조력 넘치는 삶으로 바꾸어 놓으려 했다. 태양을 찾아 남불로 내려 간 그는 정신적 고통과 영혼의 구도적인 길을 찾아 불꽃같은 작품들을 탄생시켰고, 미술사상 유례없는 걸작들을 남겼다.
이번 고흐전의 전시구성은 네덜란드 시기, 파리 시기, 아를르 시기, 셍레미 시기,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기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 네덜란드 시기 (1881-1885) 가난한 농민의 생할을 통해 인류애를 실현코자 화가의 길을 택한 초기 ◀◀
< 베틀과 방직공 / 1884 / 캔버스에 유화 / 61 x 93 cm / 크뢸러 미술관, 오텔로 >
고흐가 헤이그 체류 시절(1881-1883)에 브라반트주의 뉘넨에서 일하는 방직공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와서 흥미를 느껴오던 터 1879년 벨기에와 프랑스 북부를 장기간 여행하면서 방직공 마을을 둘러 본 바 있다. 장인들의 작업하는 모습에서 불타오르는 영감을 얻어 뉘넨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방직공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1883년 12월부터 8월까지 그는 방직공을 소재로 한 총 열 여섯 점의 완성된 드로잉과 열 점의 회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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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의 어둠과 바깥 빛의 대조적 색채가 돋보이며 그림속 인물의 진지함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고흐가 매일 방직공이나 농부들과 함께 작업을 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들의 삶을 잘 표현할 수 있었던 것 같다
< 파이프 문 남자 / 1884 / 캔버스에 유화 / 44.7 x 32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서로 높이가 맞지 않은 두 눈, 목에 두른 수건의 매듭은 시점이 어색하며, 파이프 또한 담배 피우기 어려울 듯한 각도로 입에 물려있는 이 그림에서 고흐가 작품 속의 인물을 정확히 묘사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게 역력히 드러난다
그는 인간과 동물의 얼굴 생김새의 유사성을 다루기도 한 관상학 이론을 탐구한 적이 있는데 이 이론은 사람의 외모로 그 성격을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그의 생각과 통했으며, '투박하고 세련되지 못한' 농부들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긴밀하고 불가분한 관계에 있다는 그의 평소 생각을 뒷받침해주었다
< 식탁 앞의 남자 / 1885 / 캔버스에 유화 / 44.3 x 32.5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고흐는 프랑스 화가 밀레처럼 농부를 제대로 그리려면 '농부가 그들의 일상적 환경에 있는 모습'을 그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농부의 일상을 잘 이해하기 위해 '농부의 터전'인 농가 직접 찾아갔다 고흐는 특히 농촌 여인을 즐겨 그렸는데 이 작품은 예외적인 그림이다
" 나는 농부의 일상을 하루종일 지켜보는 동안 그들의 삶에 너무나 깊이 빠져든 나머지 다른 생각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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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1885년 8월 반 라프르드에게 쓴 고흐의 편지 내용 일부분으로 고흐가 그들의 삶에 얼마나 흡수되어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돌아와서 식탁 앞에 앉아있는 이 농부의 너무나 지쳐보이는 표정,, 측은하게 와 닿았다
< 밀짚 더미 / 1885 / 캔버스에 유화 / 40.2 x 30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1888년 6월 고흐는 베르나르에게 시골 생활과 농사일을 통해 '씨 뿌리는 사람과 곡물 더미가 상징하는 무한한 공간'을 경험했다고 전했다 파종이 수확을 향한 출발점, 즉 인생의 시작을 의미한다면 추수는 되돌릴 수 없는 인생의 종결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고흐에게 밀짚 더미는 거의 종교에 가까운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아를르, 셍레미, 오베르에서 완성한 상당수의 작품에서 밀짚을 모티브로 한 것을 볼 수 있다
< 감자 캐는 여인들 / 1885 / 캔버스에 유화 / 31.5 x 42.5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1884년 말부터 한 해 동안 고흐는 두상과 손에 대한 연구작에 매달렸다 <감자 먹는 사람들>을 위한 사전 연구작 차원에서 인물스케치도 시작했다 이 작품은 최초의 걸작으로 평가받았지만 고흐 자신에게는 그림 속 입체감이 떨어지게 느껴지는 작품으로 완전한 표현을 위한 전력투구의 계기가 된 그림이다
새로운 연습을 위해 그는 야외에 나가 밭에서 일하는 농부를 스케치했는데 이 작품에서처럼 밭을 일구는 동작이 고단한 농부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쟁기를 쓰거나 가축을 부릴 형편이 안되는 농부들이 직접 손으로 밭을 갈았기 때문이다
< 마을 뒤 편 집들 / 1885 / 캔버스에 유화 / 43.7 x 33.7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고흐는 1885년 11월 그림을 더 팔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추위 때문에 야외작업이 중단된 상황에서 모델까지 부족하니 작업이 지지부진해질 수 있다는 위압감을 갖고 가끔 도시 생활을 체험할 필요가 있다는 자각때문에 안트베르펜으로 가서 빌데켄스트라에 방을 얻었다 그는 벨기에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도시경관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그림은 주제가 음울하게 표현되어 있는데다 집의 뒷모습을 묘사했으며 좌측 창문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고흐가 원근법에 특히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기때문에 잘 팔릴거라는 목적으로 그린 그림은 아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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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시기 (1886-1888) 빛을 발견하면서 자신의 화풍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 ◀◀
< 수레국화, 데이지, 양귀비, 카네이션이 담긴 화병 / 1886 / 캔버스에 유화 / 80 x 67 cm / 트리튼 재단, 네덜란드 >
고흐가 1866년에 그린 꽃 정물화는 배경이 어둡게 표현되었고 대부분이 연구작이었지만, 이 작품은 선명한 푸른색 배경과 밝은 색상을 사용한 화려함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 압생트가 담긴 잔과 물병 / 1887 / 캔버스에 유화 / 46.3 x 33.2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고흐가 즐겨 마신 압생트는 19세기 프랑스 특히 예술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던 값싸고 도수 높은 술이다 고흐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리를 떠나올 때 자신이 거의 알코올 중독 상태였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일본 판화의 영향을 받은 초기 작품 중의 하나로 창문 앞쪽으로 테이블이배치되어 공간감을 살렸고 그림 속 잔은 창밖의 거리를 보며 외로이 술을 마시는 사람을 상징한다 압생트의 색이 연하다는 점과 물병에서 물을 따라놓은 양을 보아강한 쓴맛을 완화시키려고 술에 물을 타서 희석해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드 프레르 거리 / 1887 / 캔버스에 유화 / 35 x 65.3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은 고흐가 살고 있던 파리 북구의 몽마르트 물랭 갈레트 지역을 둘로 나누는 지라르동 가의 옆 골목인 프레르 거리로 고흐의 작품 총 여섯점에 등장했으며, 평온한 분위기에 초점을 맞춰 그려진 그림이다
< 아니에르의 센느 강변 길 / 1887 / 캔버스에 유화 / 65.3 x 49.4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이 작품은 작품의 일부가 스케치로 남아있기 때문에 미완성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흐는 그림의 전면을 시작으로 물과 하늘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무 줄기, 잎, 걷고 있는 남자, 수평선을 그렸는데 그 구성과 제작과정이 이해하기 쉽게 그려진 작품이다
< 자화상 / 1887 / 마분지에 유화 / 40.9 x 32.9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 이곳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많은 사진작가들이 있다 하지만 그 초상들은 늘 같은 틀에 박힌 눈, 코, 입에 창배하고 차가운 느낌이다 항상 죽어있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그림으로 표현된 초상화에는 기계로는 도달할 수 없는 화가의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그 자체의 생명력이 있다. 사진으로 찍은 초상을 보면 볼수록 일반 사람들도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
이는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로 안트베르펜에 많은 초상 사진작가가 있지만 초상화가 사라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고 말했다
고흐는 처음 돈을 벌 생각으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사람이 가진 고유한 특색을 묘사하는 연습을 하려고 했으며 색채와 붓놀림으로 다양항 실험을 하고자 인물 연구작을 자주 그렸다
< 포도 / 1887 / 캔버스에 유화 / 32.3 x 46.3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파리에서 머물던 마지막 시기에 고흐가 그린 작품 수는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마지막 몇 달간 초상화와 자화상, 정물화 그리고 일본 풍경화 모작 등에 주력했다
이 작품을 비롯한 대부분의 정물화는 사용된 색채와 기법면에 있어서 연구작으로 볼 수 있다 네덜란드에서 그린 작품에 사용되었던 황토 빛 색채는 파리에서 보색대비로 대체되고 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시기에 완성된 작품들은 자유로운 붓놀림과 밝은 색채의 사용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정물화에서 색혼합을 하지않아 결과적으로 보다 강렬한 색채로 그린다 또한 채색할 때 짧고 강한 붓 터치와 선을 사용하여 색채가 진동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 파리인들의 소설책 / 1887 / 캔버스에 유화 / 53 x 73.2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이 작품은 동명의 대작인 <파리인들의 소설책>(개인소장)을 그리기 위한 연구작이다 고흐는 책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작품과 후에 제작한 대작 <파리인들의 소설책>은 현대적 삶을 기록한 프랑스 작가들에게 대한 존경으로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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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를르 시기 (1888-1889) 이상향을 꿈꾸며 색채의 마법을 구현한 시기 ◀◀
< 감자가 있는 정물 / 1888 / 캔버스에 유화 / 39.5 x 47.5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1885년 뉘넨에서 그는 보색 혼합을 통해 서로 다른 색으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 사과와 감자를 담은 바구니를 소재로 색채 연구작을 여러 점 그렸다 고흐는 색채 이론에 대한 책을 읽고 배운 것을 자신의 우울한 색조의 팔레트에 응용하려 했으나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아를르에서 그린 이 작품에서는 색을 혼합하기 보다는 나란히 칠함으로써 보다 설득력 있는 색감을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 꽃핀 복숭아나무 / 1888 / 캔버스에 유화 / 48.5 x 36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1888년 4월 고흐는 아를르 근처의 꽃이 활짝 핀 과수원을 그리는데 열정을 다하였는데 이 작품은 그가 아를르에서 그린 첫 번째 연작이었으며, 그 연작 중에서도 첫 연구작이다 복숭아꽃은 아몬드 다음으로, 살구와 자두와 같은 시기에 일찍 꽃을 피운다 배가 그 뒤를 따르고 마지막으로 사과꽃이 활짝 핀다 그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꽃이 피는 순서대로 이 모든 과수를 그렸다
< 셍트마리드라메르의 풍경 / 1888 / 캔버스에 유화 / 64.2 x 53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셍트마리에 머무는 동안 고흐는 두 점의 바다풍경 작품과 마을 전경을 담은 이 작품을 포함한 세 점의 그림을 그렸는데
" 노란색이나 오렌지색 없이는 푸른 색도 없으며, 푸른색을 사용하면 반드시 노란색과 오렌지색도 사용해야 한다 " 고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썼듯이 그림에 밝고 대비대는 색채가 드러나있다
< 씨 뿌리는 사람 / 1888 / 캔버스에 유화 / 64.2 x 80.3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1885년 네덜란드를 떠난 이후 처음으로 그는 밭을 일구는 농부라는 주제와 그에게 대단한 모범이 되었던 프랑스 출신 농부의 화가 밀레에게 돌아갔다 견습생 시절 고흐는 종종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1850)을 모사한 작품을 그렸으며, 훗날 밭에서 씨 뿌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스케치하곤 했다 그는 자신만의 현대적 색채로 밀레의 주제를 모방한 그림을 시도하고 있다
파란색과 노란색, 오렌지색과 보라색, 녹색과 붉은색 등 보색을 작은 반점과 선으로 표현한 보라색과 노란색간의 과도한 대비를 추구하고 있는 그림이다
< 노란 집(거리) / 1888 / 캔버스에 유화 / 72 x 91.5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이 그림은 아를르의 라마르틴 광장에 있는 건물을 묘사하고 있다 고흐는 1888년 5월 이 건물 오른쪽 방을 작업실로 임대했고 9월 중순 그곳으로 이사했다 그가 '작은 노란 집'이라고 불렀던 이 집은 그가 드로잉과 회화를 그리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공원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었다. 7월 말부터 그는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과 공원의 풍경, 그리고 초상화 등 이 집을 장식할 장식용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가 말한 매우 단순하고 일상적인 소재를 그리는 것에서 얻은 그의 고양된 마음과 커다란 기쁨을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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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익숙한 고흐의 작품 중 하나인 이 그림,, 코발트색 하늘 아래의 대조되는 노란색 집이 동화적이면서 따뜻하게 와 닿아 그림 앞에서 한참동안 서 있었다
< 남자의 초상 / 1888 / 캔버스에 유화 / 65.3 x 54.4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이 초상화 인물은 아를르에 있는 역전 카페의 주인인 조셉 미쉘 지누라는 주장과 아를르의 루이 파스라는 매춘업소 주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데 정확한 신원은 알 수 없으나 고흐는 대가다운 솜씨로 자신감 넘치는 남자의 강한 인상을 성공적으로 작품속에 영원히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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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 장의 캐리커처 작품을 보는 것 같은 그림으로 강하고 굵은 붓터치가 위압감으로 다가온다
< 까미유 룰랭 / 1888 / 캔버스에 유화 / 40.5 x 32.5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이 작품에서 배경과 얼굴에 사용된 노란 색조를 비롯하여 얼굴을 채우는 빛의 표현이라든지 모자와 코트가 특히 눈에 띄는데 이 노란 색조에 대한 가장 논리적인 설명은 고흐가 초상화를 저녁에 그렸으며 이 색이 화실에 설치한 가스등이 비춘 결과라는 것이다
< 뒤집어진 게가 있는 정물 / 1888-1889 / 캔버스에 유화 / 38 x 46.5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이 작품에서 고흐는 붓놀림에 다양한 변화를 주었는데, 게의 몸체에는 소묘와 같은 붓놀림을, 배경에는 흐르는 듯한 획과 선, 교차하는 듯한 붓 터치로 표현했다 이 연구작의 붉은색과 녹색의 대비 효과를 연구하기 위해서였으나, 게가 굉장히 수준 높게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고흐가 게를 해부학적으로 흥미롭게 생각했으며 최대한 현실적으로 관찰하여 그리려 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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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의 그림을 감상하다가 이 그림 앞에서 발길이 딱 멈췄다 강한 낯설음으로 다가온 그림으로 고흐의 색다른 그림 풍이 느껴졌다
< 우체부 조셉 룰랭 / 1889 / 캔버스에 유화 / 65 x 54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이 작품은 고흐가 조셉 룰랭을 그린 여섯 점의 초상 가운데 하나이다 고흐는 룰랭을 '우체부'라고 불렀으나 엄밀히 말해 룰랭은 우체부가 아니었다 룰랭은 아를르역의 우편물 저장소에서 일했는데, 우편물을 기차로 발송하거나 수령하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1888년 7월 말 그는 처음으로 고흐의 모델이 되었으며, 고흐가 여동생 빌레민에게 쓴 편지에 따르면
" 소크라테스 같은 머리에 코는 거의 없고 높은 이마와 대머리에 작은 회색 눈, 진한 색 볼, 커다란 수염과 희끗희끗한 머리에 큰 귀를 가졌다 열정적인 공화당에 사회주의자고, 논리적 사고가 뛰어난 해박한 사람이다 " 라고 했는데 이는 그만큼 고흐의 마음에 들어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둘은 친구가 되었으며 고흐가 룰랭은 '알코올중독자 같은 사람'이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둘이 카페에서 상당한 시간을 함께 보냈음을 알 수 있다
고흐는 아를에 정착한 초기부터 인생의 무상함과 인간이라는 개체를 초월한 초상화를 표현하고자 했으며 스스로 현대미술의 미래라고 여긴 초상화라는 장르에 진정으로 몰두하기 위한 순간을 초조하게 기다렸는데, 룰랭이 그의 모델이 되면서 1888년 7월 말 그는 드디어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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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이 내 눈에 익숙해져서일까,, 전시장 벽 한켠에 걸려있는 이 그림의 인물에 마치 아는 누군가를 만난 것 마냥 반가운 맘이 일었다 무뚝뚝하면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룰랭의 곱슬거리는 수염은 해학적인 이미지로 친근하게 와 닿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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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셍레미 시기 (1889-1890) 불타는 예술혼을 자연을 통해 분출한 시기 ◀◀
< 셍레미 병원의 정원 / 1889 / 캔버스에 유화 / 91.5 x 72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1889년 5월 고흐는 아를르에서 셍레미 드 프로방스로 여행했는데, 이곳에서 그는 셍폴드모졸 병원에 자진 입원한다 여러 번 발작을 일으킨 뒤 고흐는 스스로 살아가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병원에 도착해서 동생 테오에게 이곳에 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다 다양한 인간들의 무리에서 여러 방식으로 미치거나 정신 나간 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보면서 병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를 잊어버리고 있다고,, 광기도 다른 여느 병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라고,,,
< 피에타 (들라크루아모작) / 1889 / 캔버스에 유화 / 73 x 60.5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한 달 이상 병마와 힘겨운 사투를 벌인 후 1889년 9월 초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고흐는 발작을 일으켰을 때 물감을 먹고 테레핀유를 마셔 음독자살을 시도했기 때문에 병원 밖에서의 작품 활동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방 밖으로 보이는 풍경과 자화상, 그리고 이전에 했던 연구작들을 손질하는 작업을 했다 그러면서 고흐는 들라클아와 밀레의 판화를 모사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이 작품은 노란색과 파란색이라는 보색 대비로 들라크루아의 색을 사용했다 들라크루아가 <피에타>에 표현된 빛을 마음 깊은 곳의 순수한 크롬옐로로 그리고 그림자를 감청색으로 채색했다는 주장에 따라, 고흐는 마리아에게 진한 푸른색의 외투를 입혔고 죽은 예수를 밝은 노란색으로 표현했다. 또한 동일한 색채를 배경인 하늘과 바위에도 사용했다
< 외눈박이 신사 / 1889 / 캔버스에 유화 / 56 x 36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초상화가 장래성이 있다고 생각한 고흐는 요양소에서 간수를 모델로 초상화 작업에 열중했는데 이 작품에서의 외눈박이 신사는 요양소 간수나 간호사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 작품은 셍레미 시절 반 고흐의 전형적인 회화 스타일을 보여주는 좋은 예로, 셀 수 없이 많은 평행한 붓놀림을 볼 수 있다 캔버스 천을 덧대는 과정에서 사용된 밀랍 때문에 캔버스가 탈색되어 가공되지 않은 캔버스의 채색되지 않은 부분은 갈색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색채 효과를 상상하기 어렵다
< 씨 뿌리는 사람 (밀레 모작) / 1889 / 캠버스에 유화 / 64 x 55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1889년 9월 고흐는 밀레와 들라크루아의 판화를 모사한 일련의 작품을 그렸는데 그는 이 작품을 너무나 즐겨 테오에게 더 많은 판화를 보내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10월 말 무렵 주문햇던 판화를 받은 즉시 모작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모사한 작품이다 사실 고흐가 밀레의 대작을 본적은 없지만 주 색채가 회색이었다고 추정한 듯 하다 이 작품은 셍레미에서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첫 번째 작품이었는데 계속해서 덧그린 점으로 미루어 보아 작품을 제대로 표현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원본은 훨씬 밝은 것으로 추정되지만 훗날 캔버스 천을 덧대는 과정에서 바닥재가 어두운 자줏빛 갈색으로 변색되어 군데군데 그을린 듯한 효과를 준다
< 가죽 나막신 / 1889 / 캔버스에 유화 / 32.5 x 40.5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고흐는 일생동안 신발 정물화를 총 일곱 점 그렸는데, 그 중 다섯 점은 파리에서, 한 점은 아를르레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정물화를 셍레미에서 그렸다
신발은 그 자체만의 소재로 그림에 등장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이러한 신발이 있는 정물화들이 고흐의 간소함에 대한 관심과 시골 노동자들의 힘든 삶에 대한 동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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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발 그림은 다른 그림들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소재가 아니다 고흐의 작품에서도 눈에 쉽게 띄지 않았는데 이번 전시회에서 볼 수 있어서 새로운 뭔가를 발견한 느낌이다 단순한 소재이지만 깊은 의미가 느껴지는 그림으로 우리나라 한 작가님의 고무신 그림이 떠올려진다
< 병원 정원의 오솔길 / 1889 / 캔버스에 유화 / 61.4 x 50.4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이 풍경화는 고흐가 정신병원의 정원에서 그린 10여 점의 가을 연구작 중 하나다 고흐는 황토색을 선호하였는데 이는 자신이 말했듯이 네덜란드 시기에 사용했던 색채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고흐는 차분한 붉은색, 갈색, 황토색 빛을 표현했고 푸른색과 녹색의 붓터치로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길을 표현하는 데에는 다양한 양식의 구불거리는 붓놀림을 사용했고, 이에 비해 나무줄기는 강력한 수직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고흐는 나무 위의 가지 부분을 그림에서 잘라버렸는데, 이는 이전에 나무를 그릴 때 그가 사용했던 일본 판화에서 따온 구도적 장치였다 구도를 잡는 과정에서 고흐는 낮은 담에 앉아 나무에 기대고 있는 파란 옷의 남자를 그려 넣었는데 이는 주변의 붉은 갈색과 대비를 이루면서 풍경에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 올리브 따는 두 인부가 있는 올리브 과수원 / 1889 / 캔버스에 유화 / 73.3 x 92.2 cm / 크뢸러 뮐러 미술관, 오텔로 >
고흐는 셍레미에서 15여 점의 그림에 올리브 과수원을 담고 있는데 그 중 11점은 그가 선호하는 캔버스 크기인 30호(약 72 x 92cm)였다 1889년 가을 고흐는 포도밭을 그리려 했으나 병원 근처에는 포도밭이 없었기에 프로방스 지역의 특징인 올리브 과수원은 좋은 대안이 되었다
고흐는 이 작품을 1889년 12월에 그렸는데 그림의 구도는 몇 주 전 그린 다섯 점의 올리브 과수원에 대한 연작(괴테보르그 미술관)을 바탕으로 했다
< 아이리스 / 1890 / 캔버스에 유화 / 92 x 74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1890년 2월 말부터 4월 말까지 오랜 기간 발작과의 싸움을 한 고흐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었다 병원에서 회복되었을 때 마치 잃어버린 시간을 채우려는 듯, 그리고 병마가 자신을 이기지 못했다는 점을 입증하려는 듯, 많은 양의 캔버스를 빠른 속도로 그려나갔다 그 사이 그는 병원을 떠나 북부 프랑스로 돌아갈 결심을 했으며 5월 16일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그가 떠나기 전 그린 십여 점의 그림들 중 이 작품 <아이리스>도 포함되어 있다
이 작품은 푸른빛이 도는 보라색과 오렌지빛 노란색의 보색 대비를 사용하고 있는데 대칭을 피하기 위해 그는 화병 오른쪽에 꺾여서 축 늘어져 있는 줄기를 그렸다 이 작품은 초상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반 고흐는 풍경화 형식으로 된 아이리스도 그렸다
< 착한 사마리아인 (들라크루아 모작) / 1890 / 캔버스에 유화 / 73 x 59.5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이 작품은 고흐가 아를르의 병실에 머물 때 병실에 걸어두었던 들라크루아의 <피에타>와 <착한 사마리아인>의 석판화를 셍레미로 가져가 모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고흐는 구불거리는 선과 짧고 평행한 터치를 사용함으로써 인물에 양감을 불어넣고 풍경에 깊이를 주려고 했다 데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도 고흐가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동경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비탄에 잠긴 노인 (영원의 문에서) / 1890 / 캔버스에 유화 / 81.8 x 65.6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1882년 헤이그에서 고흐가 만든 이 석판화는 1년 전 그가 그린 <피로에 지쳐>라는 제목의 데생에서 영감을 받았다 헤이그 시절 고흐는 자신이 삽화들을 수집하던 잡지사들 중 하나에 데생화가로 일하고자 했으며, 석판화는 사람들에게 값싼 판화를 제공하려는 그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다 셍레미에서 석판화는 고흐의 인물 연구를 위한 연습용으로 주로 제작되었다 유화인 이 작품에서 고흐는 모델의 자세를 조금 수정하였으며 공간 구성에 변화를 주었다 또한 부드러운 보랏빛과 파란색과 황록색 간에 가벼운 보색대비를 사용했으며 석판에서의 각진 선보다는 둥글고 짙은 파란색의 윤곽선으로 인물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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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접했던 그림이지만 전시장에서 봤을 때 제목처럼 노인의 비탄함이 더 강하게, 실감나게 와 닿은 그림,,
< 프로방스의 시골길 야경 (사이프러스와 별이 있는 길) 1890 / 캔버스에 유화 / 90.6 x 72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아를르에서 고흐가 과수원과 밀밭에 주력햇던 것과 같이 셍레미에서는 올리브 과수원과 사이프러스에 초점을 맞춰 자신의 전원 작품 두 개의 새로운 전형적인 이미지를 추가하게 되었다 이 그림은 고흐가 상상력으로 그린 셍레미에서의 마지막 그림으로 추정되며 셍레미에서 고흐가 그린 다양한 주제들-밀밭, 사이프러스, 알피유산, 별이 빛나는 밤, 그리고 병마와 싸울 때 '북에 대한 회상'으로 그렸던 뒷배경에 보이는 초가지붕 농가-의 종합체로 간주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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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베르 시기 (1890) 70일간의 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시기 ◀◀
< 꽃이 핀 밤나무 / 1890 / 캔버스에 유화 / 63.3 x 49.8 cm / 크뢸르 뮐러 미술관, 오텔로 >
1890년 5월 16일 고흐는 셍레미 병원을 떠나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북서쪽으로 35킬로미터 떨어진 오베르 쉬르 우아즈라는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오베르에는 고흐 외에도 샤를르 프랑수아 도비니, 폴 세잔, 까미유 피사로 등 다수의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으며, 마을과 시골 환경 또한 고흐의 마음에 들었다 도착한지 3일 만에 고흐는 드로잉 두 점과 이 작품을 포함한 유화 연구작 네 점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서 고흐는 잎들을 흰 양초와 같이 표현했는데 직선적 붓놀림으로 두껍게 물감을 바르고 군데군데 짙은 파란색으로 윤곽선을 그렸다 그는 짙은 윤곽선을 그리는 이와 같은 회화스타일을 이 시기에 그린 다양한 정물화에도 사용했다
< 농가 / 1890 / 캔버스에 유화 / 38 x 45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 오베르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흔히 볼 수 없는 초가 지붕이 아름답다 그것을 주제로 한 진지한 유화 몇 점을 그린다면 머무는 동안 드는 생활비를 어느정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 같다. 왜냐하면 초가집들이 정말로 아름답기 때문이다 특이하고 그림처럼 아름다운 시골 풍경의 진수이다 "
이는 고흐가 오베르에 도착한 즉시 테오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으로 새로운 환경에서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주제를 다시 접하게 된 기쁨을 잘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그림에서 프로방스의 따뜻하고 햇빛 가득한 색채를 좀 더 추운 기후에 알맞은 녹색과 파란 색조로 대체했다. 고흐는 남쪽 지방에 머무른 경험 덕에 북쪽의 색채를 더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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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한 초가 지붕과 안정적인 그린 톤의 색감이 향수애와 함께 평온하게 다가온다
< 밀 이삭 / 1890 / 캔버스에 유화 / 64.5 x 48.5 cm /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
이 그림에서 고흐는 전체 표면을 밀 줄기로 채워 특별히 장식적인 효과를 냈는데 이러한 효과가 바로 그가 노렸던 것이었다
고흐는 풀 하나와 같은 디테일을 연구했던 일본 화가들의 치밀한 정확도와 자연과의 조화 속에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찬양했다 그래서 식물 모티브를 근접 정물로 그리겠다는 고흐의 결정은 그가 그토록 동경했던 일본 판화와 관련이 있다
고흐 자신도 시골을 '건강하고 활력을 준다'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확신이 이 작품 뿐만 아니라 밀 줄기를 배경으로 건강미 넘치는 출처 : <J.J> 불멸의 화가 반 고흐전(서울시립미술관) |